선자는 그 혼란하고 끔찍했던 시기, 그럼에도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밑에서 잘 자라 주었다. 반듯했고 정직했으며 용감했다. 일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남을 속이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올곧은 성품에 고한수는 끌린다. 자신과 다른 모습, 자신과는 다른 색의 사람.
그래서 둘은 더욱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고한수가 유부남임을 아는 순간, 선자의 사랑은 멈춘다.
그런 선자의 손을 잡아준 이삭, 그리고 일본에서의 생활.
경희와 요셉 그리고 노아와 모자수.
책을 덮으며, 노아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일본인의 눈에 조선인은 더럽고 지저분하며 머리 나쁜 종족이다. 거짓말을 일삼으며 게으르고 불법적인 일들을 한다.
그렇게 규정지어진 틀안에서 노아는 발버둥을 친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일본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도 싫었던 일본인이 규정한 틀에 맞는, 나쁜 조선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아는 순간 무너진다.
선자와 이삭의 아들로는 살 수 있지만, 선자와 고한수의 아들로는 어디에서든 살고 싶지 않다는 노아.
그러면서 그 와중에도 일본인 행세를 하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넷이나 낳은 노아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온전치 않다고 믿으면서, 결혼이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줄거라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좀 더 일본인답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몸 한쪽은 여전히 이삭의 무덤을 찾고 있는데... 그에게서 유럽인 되고싶어했던 근대 일본인들의 모습이 겹친다.
유럽인이 될 수 없다면, 아시아의 유럽인이 되고 싶다던 그들.
일본인이 될 수 없다면, 조선인중의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노아는 자신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 고귀하다 생각하는 가치들을 갖고 그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 그 삶은 고한수의 피로 인해 얼룩지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된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정체성은 조선인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조선인들과 달랐던 지적이고 순결했으며 고귀한 이상을 추구했던 이삭에게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이삭의 아들인 자신, 그러나 그건 가짜였다. 폭력과 범죄로 나쁜 조선인의 표상인 고한수의 피가 흐르는 것도 모자라, 그가 벌어들인 피 묻은 돈과 구역질나는 권력으로 그는 자신의 목숨과 고결함을 지킬수 있었다. 그 안에서 문학을 논하고 읽었고 고결한 세상을 꾸었다. 자부심을 가졌던 자신의 둥지는 더러운 둥지였다.
그러면서 덕혜옹주의 딸이 떠올랐다.
일본의 귀족 피와 일본에서 가장 비천하게 취급되는 조선의 피가 흐르는 공주의 딸.
천박함과 고귀함이 공존하고, 어떨 땐 존귀한 존재로 어떨 땐 거짓말 잘 하고 손버릇 나쁘며 목소리 큰 혐오스러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어떨까.
패전 후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 자살한 덕혜옹주의 딸이 오버랩된다.
1권, 선자의 이야기는 생각대로 흘러갔다.
어지러운 역사앞에서 한 인간, 그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의 삶이 거기다 사랑에 배신당한 삶이 꽃길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건 로판이겠지.
2권에선 좀 더 다양하고 예측하기 힘든 삶들이 나열된다.
그들의 삶은 이제 단순히 살아남기에서,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더 복잡해진다. 길을 잃고 방황하고, 그 방황의 대가가 그저 툴툴 털어도 될 먼지같은가 하면 누군가에겐 목숨을 내놓는 일이기도 하다.
“노아가 아키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키코는 항상 노아를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상상 속 모습을 덧씌워서 보고 있었다. 아키코는 모두가 꺼리는 사람과 어울려주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노아라는 존재는 아키코가 좋은 사람이고, 배운 사람이며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주었다. 노아는 아키코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자신이 조선인이든 일본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이든, 노아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때로는 자신을 아예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키코와 함께라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며칠 전 장을 보러갔다가 때이른 크리스마스를 만났다. 벌써 크리스마스인가 하고보니 금방 12월이 올 것만 같다
( 보너스로 할로윈 특집 허수아비인형도 한 장 찍어봤다. 이런걸 집 앞에 놓는다는 건 도대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