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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ㅣ 문명탐험 8
설혜심 지음 / 한길사 / 2002년 7월
평점 :
내가 왕이 될 관상이냐 ㅎㅎ
(인류는 관상에 지대한 관심과 믿음을 가졌다. 왕이 될 관상을 찾았지만 그 후엔 왕이 될 관상으로 스스로를 꾸미는 것이 훨씬 품이 덜 드는 일임을 깨달았다 )
첫인상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첫인상으로 알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적다. 눈빛, 옷차람. 미소?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이 편견으로 작용해, 오히려 좋은 인연을 놓칠때가 있다.
가끔은 어른들이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외모와 관련된 말들에 상처받기도 했고, 싫다면서도 물들기도 했다.
그런 이미지들은 어디서 나온걸까, 왜 누구는 이마의 주름을 보고 우둔함과 영민함을 논하고, 눈의 크기에 따라 용맹함과 비겁함이 나뉘는 걸까.
바로 이런 관상과 관련한 역사이야기다.
메소포타미아의 관상학은 관상뿐만 아니라 행동 등을 통해 예언적 관상학을 발달시켰다. 얼굴로 그 사람의 미래까지 점친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비뚤어진 얼굴에 오른쪽 눈이 튀어나와 있다면,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떼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다 또는 어떤 남자가 잠을 자다가 크게 웃는다면 그는 심각한 병에 걸릴 것이다 등이다.
그리스에서는 관상이 학문의 한 형태로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인간성격을 추론하고 인간형을 구분하는데 쓰였다.
대표적 관상학자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으며, 저서로는 <관상학>이 있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며, 관상의 원칙으로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서 동물에서 인간삶의 덕성을 동물에게 부과했다. 또한 인종을 구분하고 특색을 찾았으며, 다양한 표정에서 감성을 찾았다.
당나귀를 닮은 이는 성적으로 방종하며, 돼지를 닮은 사람은 색정적이라 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소심하며, 거친 머리카락은 용맹을 의미했다. 토끼나 사슴등은 부드러운 털을 가졌고, 사자는 거친 털을 가졌다는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관상학이 남녀와 인종의 불평등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들은 야만인을, <마른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거친 이마, 멍하게 쏘아보는 눈, 머리카락은 축 늘어지고, 뻣뻣하게 곤두선 눈썹은 짐승과도 같은 완벽한 열등함의 지표 62쪽>라고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타민족을 부정적으로 설정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찾았으며, 관상학을 그 도구로 썼던 것이다. 특히 연극에서 썼던 가면들은, 각 성격이나 인종 특성등의 모습이 정형화되어 있었다.
로마의 관상학은 예언적 형태를 띠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어스에 의해 점성학과 연계되면서 더욱 발전했다. 황제들은 관상학과 점성술 전문가들을 거느렸고, 다양한 분야에 인물을 뽑을 때도 관상학과 점성술에 의존했다.
중세인들은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고대의 문화에 지적권위를 부여했다. 고대의 관상학은 중세에도 인기를 끌었으며, 그런 관상학이 신학에 포함되었지만, 불경하다고 하여 인간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불안한 시대였던 중세는 오히려 관상학과 점성술을 통해 미신적 요소를 더욱 많이 포함하였다.
중세에는 뱃속에서 나는 소리로 점을 치기도 했는데, 배에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나면 악에 들렸다고 믿었다.
또한 생김새는 본질이니 인공적으로 꾸며서는 안된다는 “화장신학”이 탄생한다. 여성의 꾸미기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색채도 중세에선 중요한 요소였는데, 밝은 색깔을 숭배하면서 어두운 색은 비하되었고, 유대인과 노예 등에 대한 표현엔 언제나 검은 피부 등이 묘사되었다.
르네상스의 시기부터는 인간의 가치를 중요시여기며, 외적장치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모든 품성을 갖출 순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필요하다고 했다. 관상과 점성술에 이어 이 시대에는 수상학이 인기를 끌었다. 질병이 유행하면서 별과 관련된 점성술도 유행했다. 이 시기는 별의 색이나 모습등을 관찰하며 유행병의 유무를 점쳤다.
17세기에도 관상과 점보기는 여전히 인기였고, 특히 경제적 성과에 대한 관상보기를 즐겨했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관상은 “구별짓기”에 사용되었다.
옷과 치장 등 포장에 집중했으며, 옷이 신분이며 과소비가 미덕이 되었다.
라바터는 <관상학>에서 정교한 기준으로 분류해, 범죄관상학을 주장했다.
표정 등 변하는 것은 관상으로 볼 수 없으며, 이른바 ‘그림자관상’이라고 해서 변하지 않는 부분으로 관상을 봐야함을 주장했으며 범죄자의 모습은 이미 얼굴에 다 나타나있다 여겼다.
발자크는 이런 라바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고, 절친이었던 괴테는 훗날 라바터를 사기꾼이라 비난했다.
19세기에는 갈이 골상학을 들고나왔다.
두개골로 두뇌의 능력이라는 내적 상태를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골상학은 과학적으로 보이는데다가 모자란 부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또한 골상학에선 신체를 억압하는 의류를 옳지않다고 보아, 여성이 코르셋에서 해방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실제론 남녀평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성은 두뇌크기가 남자보다 작으며, 존경심관련 기관이 더 커서 여성은 남성을 우러러 본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성은 열등한 감정이라 보았다. 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보여주기 위해 건강한 여성보다는, 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여성의 골상을 연구하였다. 모성이 너무 과하면 광적이고 환상을 보게 되며, 여성의 뇌는 누군가를 섬기거나 봉사하는 부분의 기관이 더 크기에, 남성에게 복종하고 봉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관상학은 비과학적이라 여겨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범죄와 인종주의, 나와 타자와의 이분법 등으로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정체성을 잃는다. 열등감을 갖게 만들며, 그런 열등감은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혐오하며 자라게 한다.
<인종이란 개념이 유럽인의 발명품이듯, 인종을 특정짓는 신체의 차이 역시 유럽의 발명품이었다. 여기서 타자의 몸은 실제의 몸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자신들과 다른 몸이다. 19세기의 의학서들은 신체의 이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른바 동양인의 몸을 종종 동원하곤 하였다. 이 담론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것은 기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으로, 특히 생식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곤 했다.> 311쪽
외모가 내면을 보여준다는 고대의 믿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내면을 보여주는 외면은 그러나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타자화된 누군가는 대중매체의 아름다운 이들이기도 하고, 제국주의하에서 미의 본보기가 된 백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각자의 내면이 다르듯, 그 내면을 담는 외면 또한 다름에도, 우리는 그 외면의 모습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찾는다.
타인이 만든 기준, 타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본인의 정체성을 찾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과거부터 내려온 관상학과 골상학, 구별짓기에 사용된 그 많은 외적 요인들의 기준으로 자신을 본다. 환영받는 관상의 모습은 변하고 있지만, 그 관상학이 가지는 편견과 구별짓기는 여전하다.
또한 1647년 아일랜드 요새를 정복한 영국 병사들에 의해 잔인한 살육이 저질러진 후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영국 병사들은 아일랜드 병사들의 시체에서 20센티미터가 넘는 꼬리를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 사실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 앞에서 무려 40명이 넘는 병사들은 자신들이 직접 보았다며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나와 타자를구별하고 타자에 열등한 동물적 속성을 부여하는 전통은 유럽 사람들에게 체화되고, 문화적으로 전수되면서 역사상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코 뿌리가 몹시 오똑하고 가슴이 풍만하며 이가 개의 이빨처럼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여성은 언뜻 보기에 정이 가지 않을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완벽한 미녀보다도 남자들을 더욱 잘 호린다. 창녀 기질이 강한 여자들은 대개 이런 여성들이다. 이런 여자들을 대할 때는무서운 질병을 대하듯 해야 한다. 이런 여자와는 어떤 관계도 맺지마라. 비록 순수하고 고상해 보일지라도 그러한 여자와 결혼해서는절대로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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