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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하버드 스퀘어
전학이 싫다. 온 가족이 다 같이, 손때 묻은 가구들이며 모든 가재도구를 싣고 고스란히 옮겨 오는데도 싫었다.
낯선 교실에, 공책겉면에 쓰인 반과 번호를 두 줄로 그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저번 학교와 다른 진도와 보조교재들, 그리고 이미 무리 지어버린 아이들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하며, 누구와 손 잡아야 하는지 눈치봐야 하는 시간들이 배앓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외톨이와 눈이 맞게 되면, 그 아이 손을 꼭 잡고 위태로운 전학생활을 시작한다. 조금씩 익숙해지면 기존의 무리들 틈에서 받아주겠다는 너그러운 제안이 들어오고,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내가 좀 더 성숙했고 단단했다면,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외톨이 친구와 계속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이 친구와 함께 둘이서만? 그러기엔 난 너무 어렸고 두렵기도 했다. 깊어지는 관계가 불편했고 부담스러웠다. 좀 더 평범하고 보편적인 아이들 무리에 서 있고 싶었다. 마음이 맞았지만, 함께 있으면 좋았지만, 불안한 내 마음은 그 우정을 지키기엔 너무나 작았다.
책 속 주인공의 마음을 한 줄 한 줄 따라가면서, 어쩌면 내 마음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주인공은 뿌리째 뽑혀, 흙까지 탈탈 털렸고 가진 것도 없이 낯선 땅에 섰다.(주인공은 이집트에서 쫓겨난 유대인가족의 일원이다) 그런 그에게 익숙했던 언어들과 공기, 바람과 햇빛은 이제 없다. 유년의 소금기도 친구들도. (그러니 전학따위완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때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하버드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그는 종합시험을 앞두고, 텅빈 캠퍼스에서 공부중이지만 불안하고 외롭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숨겨놓았던 또 다른 자아같은, 자신의 하이드를 만난다. 그의 이름은 칼라지다(칼라지는 튀니지에서 온 아랍인이다).
입도 걸걸하고 궤변을 늘어놓지만, 그와 칼라지의 밑바닥은 닮았다. 불안함과 우울, 그리고 흔들림이다. 그래서 사랑도 삶도 불안하다. 튼튼하지 못한 뿌리로 살기엔, 사랑도 진지함도 버겁다. 칼라지에게도 이 곳은 낯선 곳, 고향을 떠난 그 나이 그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그의 뻔뻔함 뒤엔 상처 입은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 숨어 있다. 간절히 원하기에 경멸하는 미국의 대용량같은 삶, 더 미화되는 고향의 모습들 속엔 돌아갈 곳 없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 칼라지에겐 그토록 원하는 영주권이 주어질까. 주인공은 그런 칼라지의 모습을 알지만, 그 또한 흔들리고 불안하다. 자신이라는 하나의 몸뚱이도 버겁다. 누군가를 책임지기도, 사랑하기도 힘들다.
찬란했고 아름다웠다던 젊은 시절, 그러나 돌아가긴 싫다. 그 시절 누군가에게 우린 참 잔인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는 내게 참 잔인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했고 잔인했고 어리석었고 서툴렀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다. 그저 그 시절의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추억을 떠올릴 뿐이다.
( 스콧님 추천으로 읽게 된 책~ 읽는 내내 참 좋았다 )
나는 자의식보다 부끄러움을 더 많이, 더 깊이 느꼈다. 수치심은 언제나 내 목숨과 내 영혼을 쉽게빼앗고, 내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나를 헌 양말 뒤집듯 뒤집어서 내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더 보여줄 것이 없고 나 자신을 더 참아줄 수도 없으며, 다른 모든 사람을 경멸함으로써 못난 내 모습을 만회하려 하는 지경까지 나를 끌고갈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안다는걸 자랑스러워했지만 나는 그 작은 카페를 나오면 그와 함께있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그는 아랍인이었고 나는유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즉시 역할을 바꿔서 살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활화산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인류 전체에 대해 과장된비난이나 쏟아냈을 뿐 그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장했다고 생각하거나 성장한 척했다. 우리가 그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은 그에게서 열일곱 살 소년을발견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이 멈춰버린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그 이후로는 실수와 헛소리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을 뿐이었다.
이 낯선 보스턴을 배경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자니, 오후에 법정에서 잔인성을 발휘할 예정이라 점심 때 웨이터에게후한 팁을 주는 변호사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를 속이고 불륜을 저지른 후가 아니라, 결혼 생활을 파괴시킬 사람을 찾아내기 직전에 아내에게 비싼 보석류를 선물하는 남편의 모습도보였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더는 소명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두를 용서하는 성직자의 얼굴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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