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 다시 읽기~
옛날 옛적에~ 로 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권선징악이나 어떠한 행동들이 사회적으로 배척받는지에 대해 굉장히 잔인하고 선명하게 낙인찍는 효과가 있다. 어릴 적 들은 그런 이야기들은 꽤 오랫동안 두려움을 주기도 하며, 이유 없이 대상에 대한 혐오를 심어준다. 계모, 숲속, 호기심, 이복동생, 낯선 남자들, 늑대, 쓸데없는 질문, 반항. 그와 반대로 대책 없는 낭만을 심어주기도 한다. 왕자, 사또, 잘생긴 누군가. 그렇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에서, 똑같이 낯선 왕자는 잘도 따라나서는 걸까. 정확하게 서로 등본이나 증명서 등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서로를 알고 지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그러니 말 잘 듣고, 조용히 사고 치지 말고 있다가, 사회가 혹은 부모가 용인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두말하지 말고 즐겁게 따라나서라는 이야기다. 여성은 마치 포대 자루처럼 욕망도 없고 그저 가문이나 아버지의 도구로 쓰이던 시절, 그러니 괜히 숲속을 뛰어다니다 나쁜 평판이나 소문내지 말고 비싼 값에 교환가능하도록 조용히 살 것.
남자들은 전쟁에 나가 나라와 세상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걸고 명예를 얻는데, 여자들은 꽃 따다가 호기심에 문을 열어봤다가 “거 봐라, 부모 말 안 듣더니.” 하며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다. 가해자는 없다. 그저 그런 곳에 간 피해자가 스스로를 가해한 것, 죽어도 억울할 것 없는 죽음이다.
사실 구전동화나 민담은 긴긴밤 어른들의 놀이였다. 야하기도 하며 삶의 거친 웃음도 담긴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긴긴밤의 권태나 혹은 끝나지 않을 노동의 힘듦을 잠시 잊는 역할. 그런 민담들이 아이용으로 바뀌면서 그 속에 숨어있던 아낙네들의 지혜와 풍자들은 사라지고, 억지스런 교훈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바로잡고자, 아니 맘에 들지 않아 새로 쓰고자 한 이가 바로 앤절라 카터다.

제일 무서웠던 이야기하면 내겐 “푸른 수염”이다. 푸르스름한 수염과 기괴한 모습과 큰 덩치, 그리고 바들바들 떠는 작고 아름다운 새신부, 그리고 피로 물든 방은 사실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과하게 무서운 이야기.
마치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처럼, 여기서도 여자들의 호기심이 문제가 된다. (에로스가 하지 말라고 한 일, 에로스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다 촛농이 떨어져 들키고,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된다. 푸시케는 온갖 어려움 끝에 다시 에로스를 만나게 된다. 금기를 깨게 한 것은 여기서도 프시케의 언니, 왜 친언니조차도 동생의 행복을 질투하며 꼬드기는 존재로 나오는걸까.)
실상은 여자들의 아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이용해 금기를 만들고, 금기를 어길 시는 살인을 저지르는 변태살인마 이야기일뿐이다. 새신부는 언니의 유혹에, 푸른수염인 남편이 절대로 열지 말라는 방을 열게 되고, 그곳에 예전 신부들이 시체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결국 놀라서 열쇠를 떨어뜨리고, 그 열쇠의 피는 지워지지 않는다. 푸른수염에게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순간, 오빠들이 달려와서 구해주는 이야기가 앤절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에서는 위험을 느낀 엄마가 말을 타고 달려와 딸을 구한다.

“엄마처럼 거센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모자가 바람에 실려 바다로 날아가서 엄마의 머리카락은 마치 흰 갈기털 같았고, 검은 망사스타킹을 신은 다리는 허벅지까지 드러나고, 치마는 허리춤에 끼워져 잇고, 한 손은 뒷다리로 일어서는 말의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아버지의 권총을 잡고 있었으며, 엄마 뒤에는 사나운 정의의 목격자처럼 거칠고 무정한 바다의 파도가 보였다.” (67쪽)
푸른 수염이 간과한 것은, 주인공의 엄마가 열여덞 살 생일날 하노이 북쪽 산에 있는 마을을 습격한 식인 호랑이를 처치한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인 나는 조금 더 주체적인 인물로, 가난을 벗어나고자 청혼을 허락했으며 자신의 성욕에 대해 알게 되는 인물로 나온다.
<푸른 수염>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되었다.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에서는 아홉 번째 세입자 사튀르닌이 집주인인 돈 엘레미오를 처단한다. 죽은 전처들의 시신을 본 대가로 죽음을 맞는 새신부들, 그런 첫 번째 신부는 어떻게 죽게 된 걸까에 대한 해답은 하성란 작가의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에서 사회적 약자(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첫 번째 아내는 죽지 않았다.

<피로 물든 방>은 푸른수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장화 신은 고양이, 발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앤절라 카터의 동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행동하며, 희생양이 아닌 적극적인 인물로 책략과 기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과 가부장제에 대해 과감하게 반기를 드는 동화 속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면뿐만이 아니라, 문장들이 아름답다. 배경묘사와 몽환적 분위기들이 어른들의 동화를 제대로 느끼게 해 준다.

(이 책이 여성들의 책략이 오고가던 그 밤의 이야기들이, 샤를페로란 여성의 입에서 ,그림형제란 남자들의 손으로, 그리고 어린이용으로 훼손되고 달라져버린 옛 민담들의 본 모습과 가장 닮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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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31 18: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등!🎃 ^^

mini74 2021-10-31 18:24   좋아요 4 | URL
고맙습니다 스콧님 ~ 🎃

scott 2021-11-01 00:45   좋아요 0 | URL
오 이 모든 책들이 옛날 동화에서 모티브를!
앤절라 카터 작품은 많이 번역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라 워터스의 창작 스승인데 ㅎㅎㅎ

오거서 2021-10-31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헉 1등 따라잡기 힘듬… ^^;

mini74 2021-10-31 18:27   좋아요 4 | URL
앗 오거서님은 수레를 끌고 오셔야 돼서 그런거 아니신가요 ㅎㅎ 오거서님 고맙습니다 오거서님도 해피 🎃

오거서 2021-10-31 18:40   좋아요 4 | URL
미니님이 추천하시는 책들을 퍼다 날라야 하니까 수레가 필요해요. 해피~ ㅎㅎㅎㅎㅎ

미미 2021-10-31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인간짐승보다 더 무서운 제목인데요?!!ㅎㅎㅎ 할로윈데이 맞춤소설!!!♡(((༼•̫͡•༽)))♡

mini74 2021-10-31 19:11   좋아요 3 | URL
헉 미미님 말씀대로 제목이 ㅎㅎ 좀 그렇네요 ㅎㅎ ~~ 미미님도 해피 🎃

Falstaff 2021-10-31 19: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카터 누님의 방으로 진입하셨군요!
축하합니다. 써커스의 밤과 매직 토이 샵까지는 달리셔야 되겠습니다. ㅋㅋㅋㅋ

mini74 2021-10-31 19:27   좋아요 3 | URL
헉 검색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폴스타프님 *^^*

새파랑 2021-10-31 19: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부터 표지까지 좀 으스스한데 책 내용도 좀 그렇군요. 말로만 들어본 푸른 수염이 저거였군요 ㅋ 미니님 은근 호러 마니아 이신듯~!!

mini74 2021-10-31 20:28   좋아요 3 | URL
으스스하고 재미있어요 ㅎㅎ

붕붕툐툐 2021-10-31 2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푸른 수염 제목은 넘 익숙한데, 작가가 초면이네요~ 제가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아멜리 뉴통브 책 때문인 거 같기도 하네요~ <피로 물든 방>이라니 무서워서 밤엔 못 읽을 듯요!ㅎㅎㅎㅎ

mini74 2021-10-31 20:54   좋아요 3 | URL
무섭기도 하지만 통쾌한 면도 많답니다 툐툐님 *^^*

페넬로페 2021-10-31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들한테 저런 엽기와 혐오적인 것이 없으면 사는게 좀 심심한가 봐요~~
10월의 마지막 밤에 느끼는 으스스함이네요^^

mini74 2021-10-31 23:2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래서 핼러윈도 이렇게 인기인걸까요. ~~ 10월의 마지막 밤 그래도 페넬로페님 따뜻하고 즐겁게 보내세요 *^^*

하나의책장 2021-10-31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은근 무섭네요😳 미니님 글 읽고나니 문득 [흑설공주 이야기]도 자연스레 떠오르네요!ㅎㅎ

mini74 2021-10-31 23:34   좋아요 0 | URL
아 한때 많이 읽었지요. 새로운 시선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

다락방 2021-11-0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 물든 방은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젊은 신부를 데리러 오는 것이 왕자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고 엄!마! 라는 것은 제가 읽어본 그 어떤 구원서사, 영웅서사보다 짜릿합니다. 후훗.

mini74 2021-11-01 10:1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엄마 짱 멋지심!!*^^*

서니데이 2021-11-03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로 물든 방, 제목은 많이 봤는데 그게 그런 이야기였군요.
새로 나온 책들은 너무 많아서 읽어도 시간 지나면 잘 기억이 안 나는 것들 많은 것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mini74님 좋은 밤 되세요.^^

mini74 2021-11-03 00:3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래요. 서니데이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

레삭매냐 2021-11-03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른 수염의 전설...

다른 방식으로 고 전설에 접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드는 그런 리뷰였습니다.

mini74 2021-11-04 13:12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읽으며 그런 생각 들었어요. 막 다양헌 상상이 떠오르지요. ㅎㅎ

오늘도 맑음 2021-11-04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었습니다. 미니님ㅠㅠ 저희 집으로 똘망이 친구 푸들 딸기가 일주일 전부터 객식구로 와있습니다. 지인 가족인데.......... 어쩌다 한 달 정도 저희 집에 함께 있기로 했어요....... 요즘 일도 바쁜데, 퇴근 후 산책을 한 두시간씩 하다보니~ 밥 먹이고, 양치도 시키고, 옷도 입히고ㅠㅠ 잠도 같이 자려고 해서 수면시간도 부족하네요ㅠㅠ 미니님의 멋진 글도 마음이 급하다 보니 집중이 잘 안돼네요~ 세상에나.... 그래도 아이는 참으로 예쁩니다. 미니님의 똘망이에 대한 사랑을 저도 알것 같아요~!! 다시 또 정신 차리고 찾아 뵙겠습니다~!!

mini74 2021-11-04 16:26   좋아요 2 | URL
양치도 하나봐요. 아이 귀여워라. 울 똘망이는 양치를 너무너무 싫어해서 ㅠㅠ 맑음님이 정말 예쁘게 잘 봐주셔서 지인분 정말 좋겠어요 강아지가 아기같은 면이 있지요 ㅎㅎ 예쁜 추억 많이 만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