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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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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투명인간>은 죽었으나 죽지 않은 '유령'을 포함하고 내가 나를 벗어나는 '유체이탈'적인 상황도 설명한다. '존재감'의 진하기로 투명인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무엇보다 <투명인간>, '세어지지 않는 사람'을 과장한 말이라고도 생각한다소설의 이해를 위해 '투명인간'이라는 명쾌한 비유를 가져왔지만 구체적인 의문은 '세어짐'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얼마나 세어지는 사람인가하는 것은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나는 얼마나 보이는 사람인가'는 묻는 것부터 통하지 않을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천만의 시민들 중에 나는 기꺼이 한 사람으로 세어지는가이 물음은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야 구할 수 있는 어려운 문제다대답이 더디고 어둡다그들은 '나를 모른다'라는 명확한 사실에 더해 '나도 그들을 모른다'라는 사실이 길을 막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내가 '나를 제외한 천만의 시민을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은가'라는 물음이며 물어보나 마나 '못하다'라는 뜻을 안고 있는 무거운 조소다그러니까 더 들어가서역사를 청소하시는 바랜 파란색의 제목의 아주머니와 허리가 굽어 리어카를 끄시는 폐지 가득한 그분의 삶을 ''는 모를 뿐더러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완성된다한편에선 이런 목소리다모르면 다행이지알고서 지나친다말뜻을 알았다면 광화문광장은 발 디딜 틈 없어야 한다특별법 좌초를 무겁게 받는다.

 

"오천 명이 죽었다는 일은 한 번의 죽음이 오천 번 일어났다는 것으로 말해져야 한다*" 라는 말에 깊이 아프다면 나 역시 한 명으로 세어질 수 있는지 깊이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명 죽음 이라는 기사는 현실감이 없다한 줄의 기사는 너무나 빠르게 사라진다이 사건은 한 번 일어남으로 인해 그 안에 수많은 죽음도 한 번으로 뭉뚱그려지는 기이한 현상이 사건과 별개로 또 일어난다역사도 깊어서 언제부터인가세어지지 않는 사람들을 세는 행위가 갖은 핍박을 받았던 것은여기서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저 위에서 까맣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산 이와 죽은 이가 섞여 진도 앞바다와 밀양과 청와대 앞에 두껍다.

 

<투명인간>은 세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진화인 '투명인간'이 과연 언제부터 생겨났나라는 의문에 대한 추적이다성석제는 자신이 복원할 수 있는 끝까지 밀어 올라가 원인 같은 것을 찾으려 샅샅이 살핀다그 결과 만수의 삶이었고자신의 나이와 같은 만수의 탄생이었다자전적인 요소가 없으되 자신의 삶이 묻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만수의 조부모 이야기부터 석수의 아들 태석의 이야기까지 아우르는 그네들의 반백년 이상의 삶은 현재 우리가 시시로 만나고 기꺼이 되고 말았던 투명인간의 탄생기다그러나 흔하게 있었을 사람들이 성실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투명인간이 되버렸다는 허무한(?) 결론에 이른다. <투명인간>을 읽기 전까지 만수의 속삶을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공들여 적었으니 나는 더 이상 만수를 모른다고 할 수 없게 되었다나는 만수의 세간을 알고 있고 만수의 어릴 적을 알고 있으며 만수의 놀이를 알고 있다만수가 자신의 동생들을 어떻게 위했는지 알고 있으며만수의 동생들은 각각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다. <투명인간>을 읽는 이는 만수의 삶을 다 꿰어버렸으니만수는 소외되고자 노력해도 그럴 수 없다만수의 삶은 오십대의 만수만큼 많은 삶의 대표하고 있으니한국 현대 삶 일부를 이해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투명인간>이 이루고자 하는 이해는 무엇일까,

 

우와우리 같은 서울에 사니까 오늘 천만분의 일의 천만분의 일을 만나는 거네요확률로 따지면 백조분의 일이에요. p.359.

 

라는 감탄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추임새인가그러나 이것은 백조분의 일의 확률을 '기적'으로 치환할 수 있는 생각의 트임이다성석제는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라고 썼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함께 느끼고 있다고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다이것은 소설이 갖는 목표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이해를 바라는 것도 아니며 그보다 작은 '느낌'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대답이다나와 다름없이 그저 살아오는데 온전히 생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있음을 느낄 뿐이해보다 작은 느낌의 문제에는 긍정도 부정이 개입하지 않고 그저 다른 존재를 감지하는 데에 있다.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느낌의 문제에서 얼마나 멀었었나 하는 반성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나와 다른 이들이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반증그리고 이것은 다른 이에게 뿐만 아니라 가족 내에서부터 얼마나 가혹한 일이었는지 되 집는다가족이란 얼마나 외부에 잘 보이기 위한 울타리로 치장되기 쉽던가가까이서 보면 살대가 다 썩어 있는 지경을. <투명인간>은 곰팡내 난 부분까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그래서 가장 아픈 곳 중에 하나는 만수 아내의 독백이었다.


앞으로도 누군가 내 삶 앞에 쳐놓은 거미줄 같은 덫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앞으로도 남편이 가져다주는 알량한 수입을 쪼개 살림을 해야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아이를 감당해야 하고 내 한 몸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면서 시누이를 돌봐야 할 것이었다내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졌다앞으로도 삶에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지친 사람이면서 지쳤다 하소연도 못하고 그들이 배설하는 비정상적인 감정을 모두 받아내야 할 것이었다그게 제일 힘들었다나는 김만수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남편으로 맞아들였다는 죄로 이상한 방식의 희생을 강요받고 그것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앞으로도 영원히. p.338-339.

 

아멘이라고 나도 모르게 말을 잇는다오십대 남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그와 비슷한 유년을 거친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삶에 가장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지친 사람이면서 지쳤다 하소연도 못하는” 이 이자 이상한 방식의 희생을 강요받고 그것을 감내하고 있는 사람” 어머니요새 가정의 거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 아닐지투명인간은 가장 '작은 사회가족에서부터 시작하는 '투명인간화'를 그리고이윽고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사태를 그린다그러나 꼭 투명인간이 사회의 크기별로 발전하거나 양상 되는 것 같지는 않다소설 뒤편에 다소 엉성하게 들어가 있는 <투명인간>문답 내용은 소설이 더 커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독자에게 맡기고 물러서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났고그 이후는 알아서 생각하라는 주문이랄까.


소설이 과거를 그리는 것이 그저 이야기를 풀기 위한 장치거나 풍경을 선명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박물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그것을 재현하는데 힘을 쏟았던 까닭은 지금 이 책을 보는 이들에게 과거를 선물하기 위해서먼 날을 품에 안고 '스마트'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금은 어디 없을 아궁이북데기나 검불솔가지처럼 매운 연기가 많이 나는 것. "내가 부엌에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짓다보면 방 안에서는 갈라진 구들 사이로 연기가 솟아올라 동생들이 울고 굴뚝에서 나온 연기에 무슨 밥 냄새라도 숨어 있는지 소와 돼지가 밥 달라고 울었다." p.70. 이 날들이 배어있는 이름 모를 모든 만수를 위하여사라진 그날을 복원하는 소설의 ''을 다시금 확인한다. 종합해 <투명인간>은 무엇보다 지고 있는 오십대의 존재감을 알렸으며이들을 나 어린 세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으나 과묵했던 세대여책을 읽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없음을 지켜볼 수 있었다당신은 투명인간으로 사라지지 말아라투명해 질 것은 아궁이 군불에 맵고학교를 졸업하면서 읽었던 답사의 울먹임과 아침과 장성한 여동생이 시집가는 어느 정오그리고 어느 날 무심코 지나온 늙음을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뿐이다


<투명인간> 읽기의 마지막은 이 소설에 기대고 위안할 수 있었던 이야기의 힘을 나의 읽기와 쓰기로 돌려놓는 것이다투명해 지는 것을 붙잡아 그 자리에 놓기 위해서그곳에 내가 '있기위해서그리고 나는 '나의 있음'이 내가 있는 거의 모든 곳에서 투명하지 않을 일을 기다린다내가 확실해지는 만큼 다른 이와 확실하게 부딪힐 수 있을 테니까.

맨 앞을 다시 생각하건데 신문에 나지 않는 산적한 일들삶을 자신의 뒤에 놓고 외치는 가장 중요한 호명이 가슴 아프게 잦아드는 것은, 그토록 명백한 구호와 절규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외치는 이가 투명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지켜보는 그 밖의 사람들이 투명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 모르고서 멀리서 아플 뿐이었던 나는 더이상 투명해 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곳에 내 일부를 보태고 싶다목소리와 무릎과 눈빛그리고 이렇게 무용한 글쓰기 같은 것을.






*문학동네 팟캐스트 채널1. 10회 에서.

옮긴 내용이 확실하지 않습니다들어보시기를추천합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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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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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잃어버린 장소-非공간의 발견_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오늘 아침 단어>는 '오늘 아침'에 이후에 놓일 관습적인 말을 총합한다. 이를테면 식사나, 기분이나 날씨 등으로 자연스러울 '오늘 아침 ○'을 '단어'라는 말로 축약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으로 오늘-아침은 스스로 갖는 지루한 리듬을 벗어나 '오늘 아침'에서 달아난다


아침은아침이 오지 않을 때까지 일어나서 손쉽게 일상이라고 불리지만. '일상'에 순식간에 잡아 먹히기 때문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아침은 조용하고 유순한가. 아니, 아침은 당신이 당신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기록적인 시간 아닌가가장 가까운 어느 곳에라도 가려 할 때당신은 반드시 당신을 벗어나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다집 앞의 슈퍼만 가려해도 그렇다주섬주섬 어질러진 옷을 입으면 당신은 '그 옷을 입은사람이 된다그래서 옷을 갖춘다는 '의례'는 그 뜻만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목이 '티셔츠'를 통과하는 것은 그래서 '의례(儀禮)'라고 해야 한다그것을 통해 당신은 이상한 공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시인 역시 웃옷을 갈아입으며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부분. 그곳은 아직 당신의 바깥이 아니고 당신의 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공간이다그곳에서 바깥은 불투명하고 그렇다고 나를 알기에는 표면에만 머물 뿐이어서 무엇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다누구에게나 이런 공간이 있으나 어떤 고민도 없이 지나쳤기 때문에 비공간으로 존재해왔다. 이곳은 무엇보다 이름이 없어서 불리지 않았고 겨우 발견했으나 '시간'으로 치우쳐 기록될 뿐이었다.

 

오래 전 세일러문은 정의의 이름으로 ''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 변신했었다옷과 머리카락과 마술봉화려한 영상과 음악으로 변신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어떤 악당도 세일러문이 옷을 갈아입을 때 공격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악당의 변신 역시 세일러문은 두고 볼 뿐이었다돌아와 생각하건데 '의례'에 대한 '윤리'였기 때문이리라문 파워 액션만화속의 일만이 아니다당신이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바깥은 당신을 기다려준다당신은 아직 나오려는 채비중일 것이고그 채비는 곧 끝날 것이며 당신은 티셔츠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할 것이다누구나 티셔츠에 머리를 드미는 순간을 지난다시인은 이 의례의 순간에서 '이름이 없어 없었던 장소'를 발견하고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다시인은 그곳에서 "가슴 바깥으로 걸린 간판을 읽으며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이제 둘 '사이'에서도 비공간을 발견한다. "둘이서 마주 않아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이마를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내일, 내일」, 부분. 여기서 문제는 두 사람이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마주해서가 아니라스스로를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생각하는 것에 있다제 스스로(도시락의 내용)는 문제가 없으되우리가 함께 있는(도착한장소가 잘못된 것이라는 고백이다누가 우리를 이곳에 데려왔는가대답이 된다면 슬프겠지만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라는 마지막 행을 답지로 밀어 넣는다안온한 공간이 불시착한 난감으로 바뀌는 순간. '없었던 공간'이 우리를 쳐들어온 사건이다시인은 이곳을 벗어나거나 뒤집으려고 하지 않는다. "생전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라며 다만 이곳에서 가능한 이야기를 읽어낼 뿐이다.

 

다시 '물건'에 집중해 조금 더 분명하게 비공간의 부조를 떠내고자 한다.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로등 켜지고그림자 사라지고나는 머뭇거릴 때.” 「우산의 과정」, 부분. 시인은 우산이라는 물질이 마침내 우산으로써 활약하는 과정을 쓴다그리곤 마지막에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우산이라는 검은 빛으로 펼쳐진 시간에는 빗속에 생긴 '새로운 공간'도 있다비가 아니라면 사라질 공간에서 어깨를 가까이 하며 걸었던 날을 깊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는 우산 아래의 움직임을 '시간'으로 말하지 '장소'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 단어>의 공간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불리지 않으며 장소임엔 분명하지만 장소로써 역할하지 못하고 어떤 ''로 표기되고 마는 이상한 곳이다. ‘이 없되 시간만 있는 장소를 가 본적 있는가아무래도 갈 수 없는 곳이다우리가 기억이나 혹은 추억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시간이 없는 장소는 다른 방법으로 반복된다이 반복 속에서 시가 속수무책인 까닭은 하나 이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그것들 앞에서 웃거나 강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시 「맑은 날」에서는 지금과 다른 뜻밖의 장소를 만난다술을 진탕 먹은 는 짬뽕이란 단어는 어떻게 발음해도 슬퍼지지 않는다며 몰아치는 행간을 지난다그리고는 문득 내게 없는아내가 식탁에 앉아 펑펑 쏟는 눈물앞에 도착하고 그 앞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물고아내를 지켜보는 단답형 남편이된 것 같다고 말한다무엇보다 솔직하게 그런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길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고백하면서, ‘내게 없는 아내’ 앞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쓴다내게 없는 아내는 아마도 미래에서 만날 아내 같다그 아내를 생각하는 사이’ 자신이 앉은 식탁은 비현실적인 장소가 된다그곳에서 도저히 착해지지 않는 마음을 뒤져보아도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글자만 가득할 뿐이라는 자신을, 미리 틀키고 싶은 협소를 쓴다뜻 없는 독백을 당신은 듣고 있는가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공간에서 '나'는 당신을 상상하고 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

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면목동」, 부분.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 아내는 술을 마시고 울고남편을 이유를 모르고 부축하는 상황이 전술되었고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간명함아마도 가 의 탄생을 기억하는 일일 것같다이 이야기 푸는 일을 다음 구절로 대신하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현실속에는 근원과 리듬이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즉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그저께 시작된 것이기도 하며까마득한 옛날에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까마득한 옛날. '나'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마지막 시는 마침내 시의 제일 앞 <오늘 아침 단어>를 상기한다나의 한 겹 한 겹이 시간과 장소를 함께 포개며 지나왔고 그 사이 탈락 돼버린 시간과 장소가 등 뒤에 헝클어져 있다. 장소를 잃어버린 장소, 비공간의 발견.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그곳을 시인은 찾아 보통의 곳에선 소리 낼 수 없던 마음을 낸다세상에 시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있다면 이름이 없는 이런 '곳'들이 아닐까당신의 마음이 머물기를 고집 피우는 곳은 어떤 장소를 잃어버렸나. 그저 그때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으로 걸음이 기울었지만 한 번 가까워본 적 없다. 는 고백을 나도 함께 쏟는다. 작은 카페. 엎질러진 커피향이 소란스런 테이블을 바라본다. 한 때 당신의 얼굴이 가만가만 비쳤었던 빈 잔과 내가 함께 말이 없는 오후다.  



*페르낭 브로델김홍식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해제中,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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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라는 시는 봄밤 님이 소개했기에 읽은 기억이 나네요. 봄밤 님 알라딘 하기 전에 네이버 블로그 할 때 소개하지 않았나요 ? ( 다른 사람이 소개한 글 읽었나 ?! ㅎㅎㅎ ) 됐고 !! 봄밤의 시 읽기는 그냥 그렇고 그런 평론가가 시집 뒤에 쓴 영혼없는 평론보다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짜증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시집 뒤에 평론을 안 읽는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앞으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봄밤 2014-08-09 23:3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랬던것 같아요. ㅎㅎ티셔츠 좋아해서 블로그에 올렸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다니! 소개라고 해도 그냥 시를 올린 것뿐 아니었나 곰곰합니다.

무심히 지나는 그런 공간을 이렇게 생각하다니. 깜짝 놀랐어요. 전반적으로 촌스러운 시도 많지만 촌스러움이 좋습니다. (다음 시집이 기대됩니다)

그리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저 제가 이해하는 시 읽기를 하는 것뿐이라 평론(!)과는 당연히 비할바도 못되고 층위도 다릅니다. 저는 곰발님과 다르게(!) 평론을 잘 읽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많아서요! 그저 시를 많이 읽고 이런 이해도 있구나 하고 읽습니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 7.7

성석제, 『투명인간』, 창비, 2014. 6. 30

 


뜻 모를 연대에 대하여

불과 일주일 차이로 나온 두 권의 책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를 뒤로하고 글을 업삼은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와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투명인간>이 그것이다. (너무나도 평이한 설명에 손발이 배배 꼬인 새끼줄처럼 돌아간다제목은 물론 분야도 다르지만 이들은 닮은 데가 많다각자 서로 잘하는 분야를 택했을 뿐글이 보여주는 방향과 여로가 친밀하다는 생각같은 선상에서 떠올려 본 적 없는 두 사람이고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의견을 교류한 결과도 아닐텐데책을 덮고 나자 그동안 끓여왔을 목소리가 한 과녁에 같은 곳을 관통한다는 느낌이 들어 몹시 놀랐다일종의 연대를 확인한 것 같았다. 이 '불확실한 확신'을 설명하고 싶어졌다두 권을 읽으면서 들었던 모종의 연대감. 그저 ''으로 그치는 것일지 아니면 두 권의 책에 의도 없었던 무엇이 있었는지두 작품의 나이부터 헤아려 보기로 했다.


만수유시민성석제

한국에서 나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한데로 묶는다한국과 나이라는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대개 시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유난히 눈이 왔고 IMF가 몰아쳤다. 교육과정이 바뀌었고 수능 배점이 달라졌고 취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유난히 늘어난 정원으로 경찰 공무원 시험은 초만원을 이뤘다이것은 대화나 지식으로 공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확인하기 전에 미리 알고 있을 것즉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투명인간의 만수는 정확하게 몇 년 생이라고 나오지는 않지만 전쟁 통에 백수가 태어난 후(1950년이후집안의 둘째 아들총합 넷째로 태어난 것은 확인할 수 있다금희 명희와의 터울을 어림잡았을 때 만수의 나이는 백수와 여덟아홉의 차이가 있다유시민은 1959년생이다멀리 갈 것도 없이 성석제가 1960년생임을 떠올리면 만수는 유시민과 동갑내기거나 한두 살 터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이것으로 두 책은 같은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일대기'적 성격에 유사성을 확보한다물론 유시민과 만수의 삶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수는 없다그러나 아무리 다른 인물이라 하더라도 통과해 온 삶의 총량과 사회의 모습이 다르진 않을테다. <투명인간>은 성석제의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더라도 그때를 살아낸 경험이 바탕이 된 소설에는 분명하므로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석제 표 <나의 한국현대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의 역사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저자는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해라는 이유로 '1959'을 기점으로 근현대사를 잡는다독특한 행갈이다이러한 읽기 방식은 크게 역사와 개인의 위치변화이자 인식의 전환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역사서를 기술할 수 있는 '연구자'가 '제시한 통사'에 자신의 일대기를 맞춰서 이해해 왔다면, 이 관습을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것'으로 미뤄둘 수 있겠다. 첫째그것을 탈피하겠다는 선언이다둘째어떤 역사가 자신의 삶속으로 들어왔으며 내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이뤄올 수 있었는지 '직접 기록하고 싶은 욕구'의 출현이고 셋째 각종 통계자료를 활용해 자신의 여로를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음을 의미한다세 번째 항목은 의지와 시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유시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모든 개인에게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문서의 접근 가능성에 가장 무게가 실릴 문제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세 개의 특징을 갖추고 '자신의 삶'과 '현대'가 어떤 영향을 받고 주었는지 감초 역할하며 정치, 경제, 민주화, 사회변화, 남북관계 등의 장으로 현대사를 정리한다. 믿을만하면서 세세하게 읽을 수 있는 현대사가 없는 틈을 뚫고 들어온다. 조리개, 4.19과 5.18를 한 장으로 확대해서 읽고 다시 역사 속에서 이날을 읽는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이력 때문일까. 5장은 특히 인구의 변화추이와 함께 보건복지의 변화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

유시민은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거듭 말하며 서문을 쓴다. "과거를 회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고 싶어서집필 동기를 분명하게 말한다. "아직 인생을 회고할 나이가 아니고 아직은 과거보다 미래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자신의 주관적인 역사관이 불러올 논쟁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감정적 정치적 공방으로 확산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그러니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자세다그는 본문으로 나가는 책장에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라고 썼다동시대를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일부를 이해받는다는 느낌 들지 않을까.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성석제 역시 짤막하게나마 뒤편 작가의 말로 소회를 대신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함께 느끼고 있다고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나는 두 개의 말이 매우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만수와 만수의 가족은 근현대사의 어떤 시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 첫째 형과 큰누나의 삶둘째 형과 둘째 누나의 삶막내여동생과 막내의 삶을 다 그려낸다. 이들은 한 골에서 태어나 자랐으되 개운리를 벗어나면서 휘어지는 가지항렬성별특기에 따라 사방팔방 뻗어나간 가지와 같다. 여기에 현대사는 채 자라지도 않거나, 이파리를 키우기 전이나, 특히 열매를 맺을 때마다 이들의 삶을 후려치며 들어온다. 적나라하게 작용한다. 성석제는 자신의 내적인 상황과 외부에서 온 움직임으로 흔들리고 붙잡히던 인생을 하나하나 짚는다. "그저 사람 구실하도록 살려만 주소서하며 가족이 빌었던 '만수'가 그 중에 단연 믿을만한 가지로 장성한 것은 이 소설(?)을 읽는 의외의 기쁨 중에 하나다한 삶 한 삶의 참함과 그릇됨과 옹이모질게 분 바람에 부러진 가지를 손으로 훑다 보면 삶 참 쉽지 않다뜻대로 되지 않아 한숨이다. <투명인간>이라는 제목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이렇게 속이 비치듯 나의 아버지 삼촌 고모그리고 지금의 중 고등학생의 삶을 간극 없이 그려낸 점에서도 이 제목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작가의 눈에 있어야 할 렌즈가 보이지 않는다너무나도 삶그 뿐이다.


왜 지금인가

남은 질문은 돌아와 이것뿐이다그렇다면 이 두 권의 책은 왜 지금인가왜 거의 동시에 출간되어 의도 없었을 '두 손 맞잡는 모양'으로 읽히는 것인가다시 이 둘의 현재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만수와 유시민과 성석제는 현재 오십대 중후반이다오십대 중반은 현재 개인과 사회적으로 가장 큰 부침을 겪는 곳 중 하나다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은 창창한데 사회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작은 수가 남아 있지만 사회는 그 마저도 보호할 생각이 없어 1순위로 내보내려는 나이그렇다면 사회의 모짐으로 물러나는 이들은 자신 이후 세대에게 자리를 보전해주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자식뻘일 이삼십대는 아직 자신이 서 있을 땅도 점찍질 못했고 가족 내에서 한창인 아버지와 외부에서 고사 직전인 허약한 중년의 모습, '모순'에 손을 벌린다.


만수萬數만큼 많은 김만수(55세)들에게 

그러나 더 힘든 세상에서 일가를 이루고 다른 입을 먹이고 반세기가 지났다. 어제를 돌아보면 지금은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이 생긴다) 두 권의 책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쓰인 오십대 중반의 모두에게 바치는 위로와 추억이다유시민은 자신의 삶과 시야가 어떤 역사에서 있었는지 가능한 객관적이며 정연하게 정리했고 성석제는 성석제 아니면 되살아나지 못할 목소리로 그때의 풍경과 목소리를 복원했다내가 살아 온 날은 그냥 날들이 아니어라. 주석이 필요할 정도에 뭐 하나 빠트리기 좋은 시간이다모르고 겪었던 부침이 많았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모두 설명하기에는 힘이 든다정리가 필요했다. 당신의 삶은 마땅히 그럴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그때에게 너무 멀리 지나온 나의 친구들에게사회적으로 존재가 희미해져가지만 누구보다 궤적 분명한 무엇보다 당신, 만수萬數만큼 많은 오십대 중후반 모든 만수들에게 알린다. 자신을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수 있도록 썼다. 그들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미래의 오십대에게 쓴다. 그러니까 당신과의 소통과 다른 세대와의 호흡을 위해 추천한다. 두 권은 많으니 한 권으로 줄여 드린다. <만수의 한국현대 삶>, 붙인 제목이 변변치 않으나 같이 두고 보시기를, 거듭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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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8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08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09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놀랍게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스티븐 킹.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리고 몹시 용기다. 두 권의 분량, 장르는 호러,

선정이 안되길 바라면서 추천.

 















신간평가단 선정은 도서 판매량과 상관이 있을까?

1)         2)


더 나은 도서 생태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1)         2) 


유명한 작품은 굳이 나까지 안 읽어도 된다

1)         2)


모두 틀렸다. 깡패같은 날씨고 선정을 안할 수가 없다.

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이젠 모르겠다...신중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 

단편이라 더 좋다. 표지 디자인 왜 이리 좋나.















이것저것 랜덤으로 다양하게 내는 출판사에서 

이창래의 전작이 나오는 것 같다.

<척하는 삶>도 궁금하다.

 














이름 떼고 붙자. 독자 역시 익명이니까.

이제 쌤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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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14-08-01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닥터 슬립과 대성당, 신중한 사람 응원합니다 ^^

봄밤 2014-08-03 12:5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윤스리님, ㅎㅎ익숙한 이름이에요. 셋 중에 둘이라면 어느라도 좋겠어요.^^

rendevous 2014-08-16 21:41   좋아요 0 | URL
하진 작가 자유로운 삶 읽고 나니 김연수 작가가 번역한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 정영문 작가가 번역한 작품도 하나하나 읽어보고 싶은데 워낙 많아서 ㅜㅜ
 
엄마의 도쿄
김민정 글.사진 / 효형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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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한 템포, 무난한 질감, 무난한, 평화 가운데 바둑을 두는 풍경이 있다.


'나'는 바둑돌 같은 작은 사물을 하나씩 호명하며 엄마 없는 자리에 놓는다. 엄마와 딸이 함께 한 도쿄살이. 엄마가 '있다'가 '없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담담하다. '담담하다'는 슬프다의 작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유머가 잔잔하다는 쪽으로 담담의 추를 옮기자. 이곳의 유머는 몸 어디에도 '웃음'의 징후를 주지 않아서 중요하다. 사실은 실소도 못할 것들이다. 이것은 웃음의 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웃음의 내재율에 대한 문제일 것 같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재미'라는 말에 플랫 두개를 내려 '재미있다'고 소리 낸다.


무수한 바둑돌 가운데 꽈배기를 집었다. 나카노의 생제르맹에서 꽈배기를 먹으며 엄마가 찹쌀을 추측했던 기억. 과연 차진 식감이었고 엄마가 '찹쌀을 썼을거야' 라고 했기 때문에 옆에서 그녀도 그런가 한다. 장면이 바뀌어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가게에 들리는데.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가게 주인에게 건네며 말을 붙인다. "저희 엄마가 여기 꽈배기 도넛 팬이에요" 그러냐, 고맙다, 너무 맛있다, 등의 대화에서 그녀는 찹쌀을 쓰느냐 묻는다. 이에 '친절한' 가게 주인은 "프랑스산 통밀"이라고 답하는데. 그녀는 "통밀의 종은 너무나 길고 우아해 차마 외우지 못했다"고 말을 잇는다. 당신의 무언가 징, 하고 떨린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웃음의 내재율이 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 잠이 늘었어 

빵은 여전히 맛있고 그래서 서운했다는 이야기.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을 땐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사랑과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그 '무엇'이 중요해진다. 특별할게 없었던 물건의 소소에 눈을 기울인다. 찹쌀 혹은 통밀. 이런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명보다 뉘앙스라며 얼버무리지만 당신은 이 머뭇거림에서 마음을 '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 가능하면 밥은 거르지 않으려 해

조규찬의 <잠이 늘었어>는 그저 ‘잠이 늘었다’는 가사로 사분 오십초를 지난다. 없는 사랑과 사람에게 내가 점차 튼튼해지는 과정을 들려준다. “영화를 보고 싶어 졌어 /친구가 보고 싶어 졌어” 아무렇지 않은 말로 당신이 없는 빈자리를 정돈한다. 이 노래와 <엄마의 도쿄>는 닮았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사라진다. 새삼스러워서 크게 아픈가. 그녀는 엄마의 작은 것을 붙들어 <엄마의 도쿄>를 썼다. 소중한 기억을 개켜 빈자리를 지켜낸 에세이. 우리가 무엇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한 어떤 기억이 아닐까. 잠이 늘었다는 노래의 마지막은 "슬프지 않는 내 모습이 보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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