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도쿄
김민정 글.사진 / 효형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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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한 템포, 무난한 질감, 무난한, 평화 가운데 바둑을 두는 풍경이 있다.


'나'는 바둑돌 같은 작은 사물을 하나씩 호명하며 엄마 없는 자리에 놓는다. 엄마와 딸이 함께 한 도쿄살이. 엄마가 '있다'가 '없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담담하다. '담담하다'는 슬프다의 작은 말인가, 그렇지 않다. 유머가 잔잔하다는 쪽으로 담담의 추를 옮기자. 이곳의 유머는 몸 어디에도 '웃음'의 징후를 주지 않아서 중요하다. 사실은 실소도 못할 것들이다. 이것은 웃음의 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웃음의 내재율에 대한 문제일 것 같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재미'라는 말에 플랫 두개를 내려 '재미있다'고 소리 낸다.


무수한 바둑돌 가운데 꽈배기를 집었다. 나카노의 생제르맹에서 꽈배기를 먹으며 엄마가 찹쌀을 추측했던 기억. 과연 차진 식감이었고 엄마가 '찹쌀을 썼을거야' 라고 했기 때문에 옆에서 그녀도 그런가 한다. 장면이 바뀌어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가게에 들리는데.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가게 주인에게 건네며 말을 붙인다. "저희 엄마가 여기 꽈배기 도넛 팬이에요" 그러냐, 고맙다, 너무 맛있다, 등의 대화에서 그녀는 찹쌀을 쓰느냐 묻는다. 이에 '친절한' 가게 주인은 "프랑스산 통밀"이라고 답하는데. 그녀는 "통밀의 종은 너무나 길고 우아해 차마 외우지 못했다"고 말을 잇는다. 당신의 무언가 징, 하고 떨린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웃음의 내재율이 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 잠이 늘었어 

빵은 여전히 맛있고 그래서 서운했다는 이야기.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을 땐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사랑과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그 '무엇'이 중요해진다. 특별할게 없었던 물건의 소소에 눈을 기울인다. 찹쌀 혹은 통밀. 이런 마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명보다 뉘앙스라며 얼버무리지만 당신은 이 머뭇거림에서 마음을 '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 가능하면 밥은 거르지 않으려 해

조규찬의 <잠이 늘었어>는 그저 ‘잠이 늘었다’는 가사로 사분 오십초를 지난다. 없는 사랑과 사람에게 내가 점차 튼튼해지는 과정을 들려준다. “영화를 보고 싶어 졌어 /친구가 보고 싶어 졌어” 아무렇지 않은 말로 당신이 없는 빈자리를 정돈한다. 이 노래와 <엄마의 도쿄>는 닮았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사라진다. 새삼스러워서 크게 아픈가. 그녀는 엄마의 작은 것을 붙들어 <엄마의 도쿄>를 썼다. 소중한 기억을 개켜 빈자리를 지켜낸 에세이. 우리가 무엇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한 어떤 기억이 아닐까. 잠이 늘었다는 노래의 마지막은 "슬프지 않는 내 모습이 보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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