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 7.7
성석제, 『투명인간』, 창비, 2014. 6. 30
뜻 모를 연대에 대하여
불과 일주일 차이로 나온 두 권의 책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정치를 뒤로하고 글을 업삼은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와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투명인간>이 그것이다. (너무나도 평이한 설명에 손발이 배배 꼬인 새끼줄처럼 돌아간다) 제목은 물론 분야도 다르지만 이들은 닮은 데가 많다. 각자 서로 잘하는 분야를 택했을 뿐, 글이 보여주는 방향과 여로가 친밀하다는 생각. 같은 선상에서 떠올려 본 적 없는 두 사람이고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의견을 교류한 결과도 아닐텐데. 책을 덮고 나자 그동안 끓여왔을 목소리가 한 과녁에 같은 곳을 관통한다는 느낌이 들어 몹시 놀랐다. 일종의 연대를 확인한 것 같았다. 이 '불확실한 확신'을 설명하고 싶어졌다. 두 권을 읽으면서 들었던 모종의 연대감. 그저 '촉'으로 그치는 것일지 아니면 두 권의 책에 의도 없었던 무엇이 있었는지. 두 작품의 나이부터 헤아려 보기로 했다.
만수≤유시민≥성석제
‘한국’에서 ‘나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한데로 묶는다. 한국과 나이라는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대개 시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눈이 왔고 IMF가 몰아쳤다. 교육과정이 바뀌었고 수능 배점이 달라졌고 취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유난히 늘어난 정원으로 경찰 공무원 시험은 초만원을 이뤘다. 이것은 대화나 지식으로 공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확인하기 전에 미리 알고 있을 것. 즉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투명인간의 만수는 정확하게 몇 년 생이라고 나오지는 않지만 전쟁 통에 백수가 태어난 후(1950년이후) 집안의 둘째 아들, 총합 넷째로 태어난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금희 명희와의 터울을 어림잡았을 때 만수의 나이는 백수와 여덟아홉의 차이가 있다. 유시민은 1959년생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석제가 1960년생임을 떠올리면 만수는 유시민과 동갑내기거나 한두 살 터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으로 두 책은 같은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일대기'적 성격에 유사성을 확보한다. 물론 유시민과 만수의 삶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인물이라 하더라도 통과해 온 삶의 총량과 사회의 모습이 다르진 않을테다. <투명인간>은 성석제의 자전적인 소설이 아니더라도 그때를 살아낸 경험이 바탕이 된 소설에는 분명하므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석제 표 <나의 한국현대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의 역사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저자는 단순히 자신이 태어난 해라는 이유로 '1959년'을 기점으로 근현대사를 잡는다. 독특한 행갈이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크게 역사와 개인의 위치변화이자 인식의 전환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역사서를 기술할 수 있는 '연구자'가 '제시한 통사'에 자신의 일대기를 맞춰서 이해해 왔다면, 이 관습을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것'으로 미뤄둘 수 있겠다. 첫째, 그것을 탈피하겠다는 선언이다. 둘째, 어떤 역사가 자신의 삶속으로 들어왔으며 내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이뤄올 수 있었는지 '직접 기록하고 싶은 욕구'의 출현이고 셋째 각종 통계자료를 활용해 자신의 여로를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항목은 의지와 시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유시민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모든 개인에게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문서의 접근 가능성에 가장 무게가 실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 개의 특징을 갖추고 '자신의 삶'과 '현대'가 어떤 영향을 받고 주었는지 감초 역할하며 정치, 경제, 민주화, 사회변화, 남북관계 등의 장으로 현대사를 정리한다. 믿을만하면서 세세하게 읽을 수 있는 현대사가 없는 틈을 뚫고 들어온다. 조리개, 4.19과 5.18를 한 장으로 확대해서 읽고 다시 역사 속에서 이날을 읽는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이력 때문일까. 5장은 특히 인구의 변화추이와 함께 보건복지의 변화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
유시민은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거듭 말하며 서문을 쓴다. "과거를 회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고 싶어서" 집필 동기를 분명하게 말한다. "아직 인생을 회고할 나이가 아니고 아직은 과거보다 미래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주관적인 역사관이 불러올 논쟁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감정적 정치적 공방으로 확산되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기꺼이 뛰어들겠다는 자세다. 그는 본문으로 나가는 책장에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라고 썼다. 동시대를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일부를 이해받는다는 느낌 들지 않을까.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성석제 역시 짤막하게나마 뒤편 작가의 말로 소회를 대신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나는 두 개의 말이 매우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수와 만수의 가족은 근현대사의 어떤 시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 첫째 형과 큰누나의 삶, 둘째 형과 둘째 누나의 삶, 막내여동생과 막내의 삶을 다 그려낸다. 이들은 한 골에서 태어나 자랐으되 개운리를 벗어나면서 휘어지는 가지, 항렬, 성별, 특기에 따라 사방팔방 뻗어나간 가지와 같다. 여기에 현대사는 채 자라지도 않거나, 이파리를 키우기 전이나, 특히 열매를 맺을 때마다 이들의 삶을 후려치며 들어온다. 적나라하게 작용한다. 성석제는 자신의 내적인 상황과 외부에서 온 움직임으로 흔들리고 붙잡히던 인생을 하나하나 짚는다. "그저 사람 구실하도록 살려만 주소서" 하며 가족이 빌었던 '만수'가 그 중에 단연 믿을만한 가지로 장성한 것은 이 소설(?)을 읽는 의외의 기쁨 중에 하나다. 한 삶 한 삶의 참함과 그릇됨과 옹이, 모질게 분 바람에 부러진 가지를 손으로 훑다 보면 삶 참 쉽지 않다. 뜻대로 되지 않아 한숨이다. <투명인간>이라는 제목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이렇게 속이 비치듯 나의 아버지 삼촌 고모, 그리고 지금의 중 고등학생의 삶을 간극 없이 그려낸 점에서도 이 제목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눈에 있어야 할 렌즈가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도 삶, 그 뿐이다.
왜 지금인가
남은 질문은 돌아와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이 두 권의 책은 왜 지금인가. 왜 거의 동시에 출간되어 의도 없었을 '두 손 맞잡는 모양'으로 읽히는 것인가. 다시 이 둘의 현재의 나이를 가늠해 본다. 만수와 유시민과 성석제는 현재 오십대 중후반이다. 오십대 중반은 현재 개인과 사회적으로 가장 큰 부침을 겪는 곳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은 창창한데 사회적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이, 작은 수가 남아 있지만 사회는 그 마저도 보호할 생각이 없어 1순위로 내보내려는 나이. 그렇다면 사회의 모짐으로 물러나는 이들은 자신 이후 세대에게 자리를 보전해주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자식뻘일 이삼십대는 아직 자신이 서 있을 땅도 점찍질 못했고 가족 내에서 한창인 아버지와 외부에서 고사 직전인 허약한 중년의 모습, '모순'에 손을 벌린다.
만수萬數만큼 많은 김만수(55세)들에게
그러나 더 힘든 세상에서 일가를 이루고 다른 입을 먹이고 반세기가 지났다. 어제를 돌아보면 지금은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이 생긴다) 두 권의 책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쓰인 오십대 중반의 모두에게 바치는 위로와 추억이다. 유시민은 자신의 삶과 시야가 어떤 역사에서 있었는지 가능한 객관적이며 정연하게 정리했고 성석제는 성석제 아니면 되살아나지 못할 목소리로 그때의 풍경과 목소리를 복원했다. 내가 살아 온 날은 그냥 날들이 아니어라. 주석이 필요할 정도에 뭐 하나 빠트리기 좋은 시간이다. 모르고 겪었던 부침이 많았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모두 설명하기에는 힘이 든다. 정리가 필요했다. 당신의 삶은 마땅히 그럴 의미가 있다.
그래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때에게 너무 멀리 지나온 나의 친구들에게, 사회적으로 존재가 희미해져가지만 누구보다 궤적 분명한 무엇보다 당신, 만수萬數만큼 많은 오십대 중후반 모든 만수들에게 알린다. 자신을 돌아보고 앞을 바라볼 수 있도록 썼다. 그들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미래의 오십대에게 쓴다. 그러니까 당신과의 소통과 다른 세대와의 호흡을 위해 추천한다. 두 권은 많으니 한 권으로 줄여 드린다. <만수의 한국현대 삶>, 붙인 제목이 변변치 않으나 같이 두고 보시기를, 거듭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