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기록하다 -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차가운 물'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노란 리본'으로, 

얼마나 쉬운 이미지로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혹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구호를 말하는 것만으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이미지와 말은 기억에 가벼운 포를 떠낸 것 뿐이다. 그 포에서는 잔인한 실상까지 떠지지 않는다. 무거우니까, 무거운 것을 견디며 말해야 하고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의 무게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가져가기 쉬운 지옥만을 진짜인 듯 간직하며 그 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사고 이후에는 죽은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 번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지 못했습니다. (...)

처음으로 사우나에 가서 뜨거운 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학생들이 차가운 물에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해서

손발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배 위치를 잘 알기 때문에

끝까지 그곳에 남아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면, 이 길로 나오라고 말만 하였다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 죽을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화물 기사 김동수]

(선원 재판 5, 증인 신문, 2014.7.23)

 



사람들은 차가운 물 속에 가라 앉았고, 삶 속으로,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나 나는 씻는 것이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씻는 것이 아프다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씻을 때 아이들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손 발이 찢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구체적인 고통을 읽는다. 실제로 직접 고통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그 연원이 무엇일지 미루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건이든 이야기는 점점 투박해지고 기억은 흐려진다. 이것 보아라. 배가 침몰했고, 구조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배라는 것, 증개축에서 30톤 정도 좌현이 무거워졌고 콘베이스가 없는 D데크, E데크에도 평소 컨테이너를 실었으며, 화물을 많이 싣기 위해 정상적인 고박을 하지 못하게 한 청해진 해운은 알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배에 탄 아이들. "저는 법을 잘 모르지만 그것은 (울먹이며) 정말 어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원고 신우혁 학생)의 목소리를 들었던가. 이러한 정황은 사정없이 시간이란 못을 내려친다. 기억에 붙들리고 박히고 만다


"더 구하지 못해서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다시 읽는다. 그 역시 침몰하는 배에 있었다. 먼저 탈출할 수 있었으나 배가 잠기기 직전까지 구조 활동을 하다가 탈출했다. 이어지는 다른 문단의 글을 보자. "문제없이 잘 되고, 규정을 잘 모르는 상황", "갑을 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었던 관행", "책임은 상대방에게 있으며" 라는 말이 내내 이어지는 책 속이다.

 

<세월호를 기록하다>150여일 동안 이어진 재판을 기록을 묶었다. 이것으로 법정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되었다. 물과 배에 대해서 알지 못하더라도 다음장에서 알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것은 어떤 '이름'이 말한 사실이며 그것끼리 아귀가 잘 맞는다. 그런 일들이 세월호를 움직였다. 죄가 무수히 쪼개져 원래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조각났다. 지난 시간은 조각을 맞추는 것은 고사하고 버리는데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7시간의 행방과 1주기 되는 4월 16일- 그 먼나라로 떠나는 이유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세월호를 기록하다>를 읽고 이미지를 더 또렷이 가져갈 것, 구호를 더 말하기 어렵게 가져갈 것. 해서 떠올리는 것과 발화하는 것에서 아픔을 느끼게 될 것. 노란 리본은 '노란색'이 수식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수심이 차오르는 중 고통스러운 사람을 떠올리는 표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구호는 자본과 관행에 위협 받는 나의 판단, 나의 일에서 밀려나지 않고 ''가 있겠다는 다짐으로 읽고 싶다.

 

"책임을 져야 할 결과에 기여한 이들이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하여 정치적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에서 일말의 책임도 없이 배상과 보상으로 마무리하려는 이들의 분투만 떠올려서는 안된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치적 책임은 국회에만 있지 않다. 광화문을 가득 채우는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그것을 규명해야 하는 책임을 스스로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선택 받은 것 아니며, 이러한 책임은 누군가가 내려 주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시민을 구하지 않은 사건에서 -'시민'인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인 책임'을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책임에 관하여>, 아이리스 영.

본문 3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여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좌판이, 검은 색 그늘막이 상시 걸리는 시장이 있다. 


부대끼는 것 아니고 폭신한 조끼와 얄팍한 등산 점퍼의 아주머니들을 살갑게 지나는 거다. 어느새 한적한 대로다. 큰 길에 나오면 건너편으로 끝 모르고 이어진 담장이 잘 보인다. 그 담장은 사적을 정비하며  세운 것으로. 예전 아이들이 '사방팔방'을 하기 위해 땅바닥에 선을 그리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여 기-우리가 약속한 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금. 땅바닥에 공들여 선을 긋는 일과. 수천년 자신을 지켜온 저 사적에 담장을 두르는 일은  무엇이 다른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아이들의 놀이라고 해도 금이 그어진 이상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공들여 길게 자리한 담장을 보면 금이 흐릿해질 때마다 힘주어 눌러 그은 돌맹이의 감촉 같은게 가끔 떠올랐다.


대대로 이곳에 살아 지낸 이들에게 그런건 번잡하고 거충장스러운 치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외지에서 오는 이들에게는 벌써부터 고조, 긴장을 불러모으는 표시였다. 나는 아주 멀리에서부터 그런 담장을 기다려왔고. 그 주변을 오래 걸어 만나게 되는 석탑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석탑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생각치 않는 이곳, 주민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곳에 가면 오층으로 단정한 어깨가 있다. 석탑은 한층 한층 하늘에 닿는 높이가 달라 보여주는 풍경 또한 달랐으며. 나는 눈으로 처마 선을 따라 그리는 것을 인사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조금 비스듬한 고개가 되었고, 점잖고 단정한 이가 작은 탈선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석탑은 점심을 풍기며, 그것이 닭곰탕이나 청국장이라도 가리지 않고 만나주었고 굳이 그를 보러 가지 않아도 얼굴을 보여주었다. 움직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때 나는 석탑을 너무 자주 보지 말자 라는 이상한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곳에 사는 이들 아무도 석탑을 부러,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미뤄두고 싶다. '그 앞에서 자연스러운 눈을 하고 싶다' 시간이 지나 석탑과 나 사이를 그럴듯 하게 터 놓을 수 있었다. 나를 그 옆에 바로 세워두지 않아도 '언제나' 눈가로 석탑의 처마가 떠오를 때. 그 선을 따라 도착한 저녁이 궁금할 때, 나는 최선을 다해 달려갈 수 있었으며, 언제라도 그곳에 석탑이 있다는 사실이 약속 같은 것으로 믿어질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일하는 중에도 웃음이 잘 났으며, 


수천년 굳은 어깨를 아무도 없는 밤중에 으쓱거릴거라는 생각을 낳기도 했다. 그길은 조 금 걸을까요. 라는 말을 하기 좋았고 그건 누구의 물음 없이도- 스스로에게 건네도 좋았다. 석탑이라는 말에 고즈넉한 곳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낮의 정림사지는 실은 재재했다. 바로 옆에 부여 중학교가 있기 때문인데 '부여 중학교', 부여를 떼고 보면 그냥 '중학교'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교실에 다금다금한 아이들의 소리가 석탑 가까이 있었다. 담장 밖에는 바스라져 뜻을 알 수 없는 음만 들렸는데. 석탑의 가까이 가면 복도의 발소리, 계단을 뛰내리는 소리, 아이들의 목소리가 잘 들릴 것이었다. 부여에 있은지 오래 되어 나는 사적지에 들어가 관광객처럼 석탑 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 밖 담장에 기대 한 점심 앉아 있다 오는 일이 석탑을 보는 거였다. 그 밑에서 나는 이달의 우표를 삼월, 사월, 오월을 한꺼번에 꺼내보았고. 편지의 대부분은 부치지 않았으며, 봉한 편지들 중 대부분도 서랍에 두는 것으로 계절을 보냈다.

 

석탑의 키와 나의 키를 더한 이만큼을 남겨두는게 좋았다. 등을 맞댄 거라고 생각했다. 편지가 잘 보였을 것이다.




+

제주도의 '돼지'처럼 아고리는 엄청 힘을 내고 있어요. 참기 힘든 괴로움 가운데서도 믿을 수 없을만큼 강령하게 욕구가 일어나 작품을 마구 그려내고 자신감이 넘쳐....넘쳐....터질 것만 같은 이 아고리, 성실하고 훌륭한 남덕 씨를, 나의 유일한 현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 같은 거라오. 

1954. 1. 7

<이중섭 편지>



+

편지는 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는 글로, 서로를 제외하고서는 읽을 수 없어서 서로에게 활짝 열린다. '그런 편지'가 출간되는 건 쓴 사람과 읽은 사람이 지나온 거리를 다른 이들이 서성이게 두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라고 하자. 편지에 적힌 '서로'를 제외하고 남은 '우리'들은 편지의 바깥에서 그것을 읽는다. 편지에는 사이가 있고, 사이에는 서로의 키를 더한만큼의 거리가 있고, 그 거리에는 이렇게 서로를 포개놓으려 움직였던 안타까운 시간이 있다. 우리가 자주 잊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찬 편지일수록 그 밖에는 그렇게 쓰고도 전하지 못한 '자신'이 편지 바깥에 남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편지를 읽는 '우리'의 자세는 편지 속의 아름다운 '서로'가 되려는 걸 가까스로 달아나, "참기 힘든 괴로움 가운데" 남아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 아닐까.



편지와














편지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4-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천년 굳은 어깨를 아무도 없는 밤중에 으쓱거릴 석탑˝ 이런 표현은 신춘문예 당선작 같은 데서 보는 멋진 표현인데!
아름답고 끝없이 적혀서 보내지는, 편지와 편지와 편지...였어요.

봄밤 2015-04-01 15:14   좋아요 0 | URL
...부분을 계속 읽습니다.
아갈마님. 정말 봄이네요. : ) 아갈마님 서재에 마음 호강합니다. 자주 들려요. 계속 써주시기를요!

AgalmA 2015-04-0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내가 이곳에서 뭐하고 있나, 한심하게 느껴지는데, 꼭 그럴 때마다 봄밤님 같은 벗들의 마음의 편지가 당도해서 또 주저주저 하며... 저도 봄밤님의 기필코 시로 가려는 글 읽는 게 정말 좋습니다! 늘 기운 잃지 마시길 멀리서 기원합니다.

봄밤 2015-04-02 22:07   좋아요 1 | URL
몇 번을 썼다가 지웠는데요, 그 사이 그냥 있기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마도 아갈마님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이야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해주고 계시지요. 읽을 수 있는 글은 많지만 읽어야 할 글은 찾기 어려운 가운데,
고맙습니다. : )
 

 

인테리어

 

 

강성은

 

 

 

아름다운 북유럽 가구들처럼

겨울에 더 빛나는 흰 자작나무처럼

 

낡은 아파트에서 담요를 두른 맨발의

가난한 음악가처럼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 다니고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타일 위에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빛이 통과하는 물속처럼

겨울 공원 벤치처럼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지도위로 매일 눈은 내리고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예를 들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때.

속옷을 다른것으로 갈아입을 때 그 즉시는 촉각을 느끼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옷이 피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지는 경험이 있다."

 

이것은 '역치''감각의 순응'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이 설명이 끝난 후 다시 역치와, 감각의 순응을 말하고 싶고, 마지막으로 다시 역치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도위로 매일 눈이 내리고" 로 끝나는 마지막이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는 그 다음 문장을 부른다. 그 다음에 올 나의 자세, 그 다음의 날씨, 그 다음의 장소 같은 것을 말이다. 그 다음에 올 어떤 것은 "눈이 내린다"를 어쩌지 못하지만, 눈이 내린다 역시 그 다음에 올 어떤 말을 건드릴 수 없다. 그러니까 "내리고"라는 말만으로도 시인이 부르지 못한 말은 대등하게 서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날씨에 맞서있는 모습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도 옷은 여전히 옷으로, 나의 살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있다. 옷은 살이 될 수 없으므로, 나의 감각은 순응하지 않고 외부를 느껴야만 한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느낌에서 온다. 살아 있음으로 외부를 느낄 수 있는 힘을 저항의 가장 작은 형태라고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겨울밤 복도에는 발 없는 유령들이 걸어"다니며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서 나는"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그린다. 나는 "차갑게 식은 욕조 속에"있지만 가고 싶은 나라의 지도를 타일에 그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산다. 변하지 않은 채로, 정확하게 기억의 피부에 덮인 채로."


라 고 적었던 <아우슈비츠의 여자들>을 읽는다. 이 책은 "단지 조금"이지만 내가 있는 이곳이 끊임없이 "이상"하다고 여기는 '역치가 있어야 함을 알린다. 감각의 순응을 넘어서는 역치가 늘 필요한 이유는 나는 단지 나라는 이름의 개인인 것만 아니라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기억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역치로, 아픈 것으로, 살아 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 인테리어는


내가 조금 더 잘-살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가꾸는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내일을 그리며 잠에 드는 희망 또한 인테리어 아니었을까. 발 없는 유령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는 빼앗기고 부서졌다. 그들이 있던 날은 활자로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나아서도 그 곁에서 산다는 독백, 정확하게 기억의 피부에 덮인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독백에 나는. 그들이 머물러야 할 기억의 장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있고 싶은  장소는 "어디에도 없는/ 어디엔가 있을 것만 같은" 나같은 아무개의 머릿속, 인류라는 거대한 기억의 일부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가진 희망을 나와 다른 누군가가 함께 해줄 거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경제학 - 전2권- 7급 공무원.승진.감정평가사.공인노무사.보험계리사, 제5판
정병열 지음 / 세경 / 2014년 10월
47,000원 → 42,300원(10%할인) / 마일리지 2,350원(5% 적립)
2015년 02월 24일에 저장
구판절판
2015 김종석 행정법총론 - 전2권- 7.9급 각종국가시험 대비
김종석 지음 / 윌비스(미래와사람 한림법학원) / 2014년 7월
39,000원 → 35,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950원(5% 적립)
2015년 02월 24일에 저장
구판절판
2014 7급 써니 행정법각론
박준철 엮음 / 좋은책출판사 / 2014년 4월
26,000원 → 23,4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00원(5% 적립)
2015년 02월 24일에 저장
구판절판
보카바이블 (VOCA Bible) 3.0 (교재 + 어원북 + 미니단어장)
허민 지음 / 스텝업 / 2011년 7월
32,500원 → 29,250원(10%할인) / 마일리지 1,620원(5% 적립)
2015년 02월 24일에 저장
구판절판


4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생물학 이야기 - 다윈에서 뇌과학까지 생물학의 모든 것
김웅진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생물계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ent'존재


데본기, 캄브리아기, 4,800만년 전 같은 단어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우연에라도 마주치기 어려운 이름들. 아침, 지하철, 허기, 늦은 저녁은 데본기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황망함이라고 해야할까. 생물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이해한다는 듯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코끼리와 개미는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것 외에 서로 닮은 데라곤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전자들은 상당히 서로 비슷합니다. 154> 늦은 밤 열한 시, 생물학 이야기라는 책을 들고 개미의 몸으로 코끼리를 이해해보려는 무모함을 응원하는 말 같다. 코끼리 발등에 올라서 코끼리를 찾게 되는 우가 있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생물학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생물학을 감상한다는 기분(?)으로 시대적 순서에 따라 자유롭게(?) 쓰겠다는 말을 남기며 서문을 떠난다. 이것을 이루겠다는 듯 목차는 '생물 이야기', '진화 이야기', '생명 이야기', '생물학과 사람 이야기'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라고 붙이는데. 시종일관 높임말은 흡사 동화책 읽어주는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생물(학)이라면 중학생때 완두콩과 린네를 떠올리는 것이 다인터라 어떤 것을 이야기해도 처음 만나는 아이처럼 신기한 까닭이다.

 

' 어류의 시대'라고 불리는 데본기의 한 시점인 약3억 7,500만 년 전, 어류로부터 최초의 사지동물인 네발 달린 물고기가 나타났습니다. 당시 바다 속에는 길이가 2m~5m나 되고 강력한 이빨로 무장한 거대한포식 어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지요. 이빨과 갑주의 군비경쟁과 살벌한 포식전쟁을 피해 누군가가 육지로 탈출하는 것이 시간문제였던 겁니다. 75


이 런 대목을 읽을 때, 옆에 그림이라도 있었으면, 거기에 노련한 성우의 목소리까지 있다면 박진감 넘치는 데본기의 한 장면. 그건 것 없더라도 다큰 성인 남녀는 이 정도 깔아 줬으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지에 네발 달린 물고기가 나타난 심정을 말이다. 우글거리는 포식 어류를 피해 뭍으로 나오려는 마음을 미생으로부터 이해하자. 물에서 뭍으로 다시 공중으로 나를 살려놓고 싶은 생물 진화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주제의 책을 만날 때, 다른 언어를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보의 전달, 깊은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한 앎의 다른 구간이 있음을 알기 위함아닌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읽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별은 캄브리아기에는 아직 그 별로부터 빛이 지구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별들을 그때에는 더러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 욕지의 바위 아래나 그늘지고 습기 있는 곳에서는 조류가 이끼처럼 자라고 있지나 않았을까. 혹시 작은 연체동물들이나 절지동물들이 그 조류 속에 숨어 있지 않았을까. 87


캄브리아기, 발음도 어려운 이 시기에는 별빛이 없다. 아직 그 별로부터 빛이 지구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 시간을 이렇게 당겨 돌아가면 이곳은 별빛이 없는 깜깜한 하늘이다.


만일 생물계가 강호의 무림과 같고, 생물들이 기발한 생존기수로가 싸움의 비급을 개발하고 익혀온 무예의 고수들과 같다면, 그 고수들이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하며 연마한 무예와 내공을 체계적으로 알아내는 것이 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생물들은 수많은 비밀과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생물의 외형적 다양성과 행동, 생태적 분포는 모두 생물의 기원과 과거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111


진 화를 설명하는 장에서 강호와 무림을 부른 것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라 이름 없는 무수한 개체에게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계파의 고수로서, 어느것 하나 만만치 않은 시간을 지내왔다는 역사를 부여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정도 되면 고리타분 혹은 어려움이라는 생물학의 이미지는 날아가고 없을 것 같다. 이 뒤의 설명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코드 역시 그렇다며 팔레스타인 사람을 부르고 북미 원주인들, 남북의 대치에 대해 일침한다. 평면적인 관찰로 알 수 없는 인과적 연관성이 있다고 꼬집으면서 앞면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 외 다른 수많은 면을 만나야 함을 생물학을 들어 설명한다.


생물과 무생물은 원래 하나였으니 생물학과 물리과학이 결국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만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255


이 쯤되면 거의 종교적인 통찰이다. 알고보니 다윈이 인간에 대해 통찰한 것 역시 그렇다. 다윈은 <인간이 생물계의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net'존재라고 겸손히 표현287>했다고 한다. 내려온 존재. 유달리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받아 온 것 뿐이라는 설명은 인간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어서 다시 한 번 다윈을 인용하는데. 다윈은 <"약하고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악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다윈은 진화의 방향성이나 목적성을 인정한 바 없습니다. 진화에는 그런 것들이 없기 때문이죠. 288> 진화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는 마지막은 '발전된', '더 나은'으로 오해하는 '진화'를 일축한 모양새다. 악하려고 특별히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다윈의 선언을 정면으로 맞서는 기분이다. 약하고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산다, 이곳의 하늘은  캄브리아기 때와 다른 이유로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의 생물학은 오늘의 밤하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후의 독자는 오늘의 난투전을 어떻게 읽을까. 인간이 생물계의 큰 줄기에서 '내려온descnet'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눈이 유일하게 있었던가 하면, 인간 외의 가치를 지표삼아 인간-아닌 것으로 내려다 보는 눈이 빈번하게 많다. 한낱 미물이라도 그가 이뤄온 역사는 쉽지 않았으므로 뜻밖에도, <생물학 이야기>라는 체를 통과해 마지막으로 받은 말은 '겸손'이라는 단어인데. 노력하지 않아도 악해지는 삶에서 '겸손'이라는 말을 소화할 수 없게 된 것 아닌지 걱정스럽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새해가 이틀 앞이다. 딱딱한 떡을 오래, 끓여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2-17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비노 우주만화(코스미코미케) 보고 아, 이렇게 소설을 쓸 수도 있구나 대오각성했던 제 경험;...생물과 진화론을 들여다볼 때 정말 `겸손`해질 수 밖에 없더라는....나 또한 미물인데!

봄밤 2015-02-17 09:42   좋아요 1 | URL
대오각성...(ㅋㅋ)!!
문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가 `겸손`을 이릅니다. 생물과 진화, 뿐만아니라 과학 전반에 대한 교양서는 얄팍한 인문학 책보다 단단한 읽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자주 남기지는 못하지만 잘 보고 있습니다. Agalma님 건강한 사유 응원합니다. 연휴 복되시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