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그는 40대 남성으로 단정한 머리에 이마가 조금 훤하다 싶었고연갈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배경은 바람이 날아간 하늘색.

 

테두리가 흰색으로 선명한 증명사진이 지하철 바닥에 떨어져 있다건너편에 앉자마자 보였다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내가 탔을 때부터 내릴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나는 바닥에 얇게 누운 그의 인상착의를 빗눈으로 알아 보았다누가 밟을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지켜봤다당신은 그럴거면 네가 사진을 맡아두지 그랬어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이 질문에서 나는 솔직해져야 한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나는 열네 정거장을 오면서 해가 옅어지고 하늘이 무거워지는 것을 보면서 그가 날아가거나 뒤집어지는 일 없는지를 주의깊게 지켜보았다그는 과연 40대 남자답게 얼굴을 책임지고 있었다그는 자리를 뜨는 일 없이 눈도 감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았다그가 천장과 완벽한 초점을 이루고 있는 것을 조금은 어려운 각도로 지켜보고 있던 내가 있었단 걸 잊으면 안된다그는 하필이면 내리는 문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조바심이 더했다삼십센치만 움직여도 그는 지하철 밖으로 엎어질 수 있었다그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다 알면서도 왜 데려오지 않았느냐는 원성은받아들일 수 있다나는 한 겹 더 솔직해질 수 밖에.


'나는 그것을 주워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40대 남성인상은 아직 확인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을 간직하자는 것은 어려웠다그러다가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알아버리게 될지도 몰랐다책상 한켠에 그를 놓는 순간나는 그의 이름을 알 것 같았고 사는 곳과 가족과 딸의 이름그 지하철 바닥에 누워있게 된 사연을 줄줄 읊게 될 것 같았다. '나는 언제 나를 버리고 떠났나,' 는 그가 벌이는 꽁트에 관객 1,2,3으로 참여해야 했다. 정말이지 그런건 하고 싶지 않다. 아는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였다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천장을 보고 있는 그는 원래 몸뚱아리의 그 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실제 그를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잘 나왔네'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얼굴일지 모르지만 생판 모르는 이에게 묻는다면 그가 두 명으로 분리되는 일은 너무도 가능했다


그러는 와중에이런 엄살에, '응응' 적당하지만 조금은 귀찮은 대답을 하면서 당신은 말을 아낀다너는 당연히 그를 책상 모서리에도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없었거니와 언젠가언제라도그를 버릴 것이 자명했다그러니까 누군가가 밟을것은 염려한 것은 위선이었고 네가 진실로 꺼려 했던 점은 네 손으로 버리는게 점이었다이점이 그가 누워있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니 이 무슨 앵앵거리는 소린가걱정했다는 얘기는 하나마나였다흔치 않은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너였겠지만그런 걱정 그 정도의 걱정은 그 칸에 탔던 모두가 했던 것이었다그가 뒤집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 칸에 앉거나 서있던 32명의 소망이 무겁게 그를 눌렀기 때문이다여기까지 ok. 


그런데 이것을 아는가천장을 보던 남자는 네가 옅어지는 낮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을 때의자 바닥을 쳐다 보았고 네가 프로필을 밀어올리며 새로고침을 하고 있을 때고요한 무릎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네가 눈을 감고 사진 속 남자를 걱정하고 있을 때 그는 각질이 올라온 7센치 힐의 뒤꿈치를 애처로워 했다는 것을. 그러면서 네가 있는 쪽을 향해 조용히 혀를 찼다벌써 두 번째 하는 얘기하지만, 네가 하는 걱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너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리는 곳을 두 정거장 앞두고 있다. 나는 내리는 곳이 왼쪽이면 그를 주워가리라, 도박같은 약속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행인지, 그럴리 없었는지 문은 오른쪽에서 열렸다. 다행이야 라는 속삭임을 숨긴채 천장을 바라보는 40대 남성에게 빗금으로 인사를 전했다. 나는 안전한 어둠 속으로 나와 둥그런 어둠이 되었다. 누워 있는 남자는 천장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혹시라도네가 나를 주워가면 테두리 밖으로 손을 꺼내야 할지도 몰라서 나는 이마에 땀이 다 흘렀다네가 지하철을 탔던 열네 정거장 내내.'

 


밤 아홉시, 외선순환열차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4-07-09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10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 1009호 2014. 5. 5.






아침도 점심도 없이 두시 넘어서 도착했다여느 때보다 붐비는 터미널그 넓은 공간의 가장 구석에 있는 '편의'점에 가 삼각 김밥을 골랐다전자레인지에 이십 삼초를 돌린 후 통로에 서서 먹는 몇 명을 피해 나오다가 나는 무엇에 가로막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사람이 없는 영정사진검은색 테두리만 있는 빈 곳이 매대에 서너 권 꽂혀 있었다편의점에는 서 있을 공간이 없어 휘청거리며 곧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다나는 사람이 많은 대합실의 한쪽 아무 곳 구두를 벗고 걸터앉아 삼각 김밥을 먹었다세입인가 네입인가맛은 생각나지 않고 어느새 삼각형 모양의 비닐봉지만 남아있었다비닐 안쪽에 빨간 양념이 김가루가 표정 없이 묻어있다오늘 첫 끼였고 마지막 끼였다물을 사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 먹고 나서야 했다비닐은 투명하고 가벼웠다바람이 없는 곳에서 파르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앞뒤로 물집 잡힌 발을 다시 구두에 집어넣었다트렁크를 끌고 고향으로 혹은 여행지로 떠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불이 환한 편의점누가 죽었는지 모르는 얼굴 없는 영정사진이 매대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세어지지 않는 사람들셀 수 없는 사람들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것은 세월호의 안과 밖에 있는 이 모두에게 해당된다박근혜와 정부는 똑똑히 확인시켜주었다이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입을 열거나 닫을 것이다. ''를 보여준다압도하는 숫자를저 빈 영정에는 누구의 얼굴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그 얼굴들이 영정 밖으로 나와 노란 깃발로 거리를 걷는다. 지옥은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얼굴과 산 얼굴이 뒤섞여 거리를 뒤덮을 것이다.




2014.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언어의 탄생과 죽음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원시언어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반면, 음악적 측면은 사실상 무시되고 있다. 음악을 다룬 연구들도 음악을 언어의 부산물쯤으로 치부한다. (‥음악과 언어가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이 둘이 인간의 마음, 몸, 사회의 진화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이 책은 취향이 바흐건 블루스건 브리트니 스피어스건 우리가 왜 음악을 즐기는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23~25 /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인간의 선조는 어떻게 말하는 법을 배웠을까? 왜 이 세상 모든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이처럼 복잡한 언어를 만들어냈을까?(‥) 네안데르탈인이나 다른 선조를 찾아 인류의 원시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은 아쉽게도 불가능하다(물리학이 타임머신이라는 걸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큰 희망을 걸 수 없는 실정이다). 006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을까


언어의 죽음은 인류의 전 역사에 걸쳐 빚어져 온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전 세계 6000개 혹은 그 이상의 언어들 사이에서 언어 소멸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금세기 말이면 6000개 언어의 반이 사라질 것이다. 최상의 추정을 한다 해도, 두 주 마다 세계 어딘가에서 쇠미해가는 언어의 마지막 화자가 죽음을 맞는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과거 선조들이 열었던 사색의 길을 걸을 수 없다. 26~27 /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우리 무엇일까?

고고학인류학언어학적인 관점의 교집으로 쓰여진 이 책들은 모두 '우리'의 근원을 묻는다각기 조금씩 다른 입장에서 우리즉 '', '언어'에 대해 곰곰하는 것이다이 중에<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언어의 발달과 함께 사실상 무시되고 있었던 '음악적 측면'에 관심을 쏟는다. '언어와 음악이 뇌의 연산과정을 얼마나 공유하느냐에 대한 문제'라는 저자의 물음은 '호모 사피엔스에 언어능력과 음악능력을 제공한 육체적심리적 성향의 진화'에 대한 답으로 연결된다음악 능력의 진화는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로 진화한 것과 연관있다는 주장이다.

 

인류의 진화를 축으로 삼았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던 '리듬의 발생'. 때문에 동작과 말과 함께 발달했을 제스처에 대한 논의도 잊지 않는다몸동작의 리듬과 조화를 이해하는 것이 음악의 기원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설명,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음악은 듣는 제스처'라는 설명이와 함께 '호미니드의 의사소통 체계가 유인원과 원숭이의 의사소통 체계와 달라질 수 있었던 점을 음악 같은 발성의 증가'200 로 보고 있다이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저자는 초기 호미니드의 의사소통 체계를 Hmmmm으로 부르며유인원과 가장 크게 구별되는 호미니드의 인지력은 마음읽기 능력이라고 명명한다때문에뇌가 비교적 크다는 것은 마음읽기 능력도 향상되었다는 뜻이라고 부연한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한 단계 뛰어오른 것은 집단이 커지고 이에 따라 사회생활이 복잡해졌기 때문'186 이라는 추측에 이른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앞의 책이 인간의 진화학의 관점에서 언어와 음악을 이해했다면,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게 되었을까>는 언어학적인 관심을 중심으로 언어의 발생을 들여다본다. '늑대 소년비화는 언어가 문화일까생물학적인 것인지 묻는다. 사회와 격리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인간은 언어를 타고나지 않는 것일까유인원은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등등 다양한 물음을 통해 언어의 형성과 발달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을 살핀다.

 

우리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면 언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지금도 사라지고 있을 언어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도'라는나 자신마저 포함하기 때문에 슬픈 지칭으로 언어의 죽음을 따라간다귀이울이지 않는 언어의 부고저자는 카야르딜드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언어를 사용하면서 카야르딜드어를 쓰는 호주의 원주민과 교류한다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장장 오백페이지에 이르는 탐사 보고서를 기록했다그는 '언어가 죽을 때 우리가 잃게 되는 것 전반에 대해그리고 언어의 죽음이 왜 문제가 되는지인간의 앎의 방식이 서서히 붕괴되는 이 상황에 대응하는 최선의 질문과 과학기술이 무엇인지' 다룬다. '사라져가는 언어는 인간의 사고그리고 자신들의 말을 돌이나 양피지에 남기지 않은 채 쾌활히 세상을 누볐던 사람들의 잊힌 역사에 대한 거대 서사'28 라는 말이 남는다

 

어디서 왔는가우리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 쓴 페인트 통에 나무를 채워 불을 떼고 있었다면마다 찍어 구멍을 낸다바람이 통하고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나무는 죽는 소리마저 기분을 좋게 하는구나... 가까이 가면 머리를 씻기는 듯한 향기도 있다나무는 죽는 모습도 아름답구나이양웅 어르신은 저 쪽에 옮겨 심으러 뽑아 놓은 나무를 가리켜 말씀하셨다저렇게 말고 있는건 소나무여방석뿌리라고 하제참나무는 곧장 뿌리가 들어가참나무는 탈 때 결이 갈라져 이것봐숯으로 쓰는게 이 나무여.


 

몇 번을 곱씹어 옮겨 적었다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도 알지 못할 지식이 어른신 한쪽으로 칡을 씹으시며 나오고 있었다물론 참나무와 소나무를 구별 할 수 있는 지혜/지식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그러나 평생을 가도 영영 모를 수도 있던 것이 불을 쬐는 5분간아무렇지 않게 흘러오고 있던 그때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알고 있는 것은 자꾸 좁아져 간다인터넷이라는, 모든 것을 알 수 도 있을 것 같은 백과사전 앞에서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가 궁금해 했던 것 뿐 아니었는지 묻는다궁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누가 알려줄 수 있을까기억하지 못하는 옛날나에게까지 살아서 온 말들과내게 오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져간 말들을 떠올린다공중에 흩어지는 말 속엔 '방석뿌리'같이 말아진 깊은 시간이 있다보이지 않는 뿌리 위에는 나무의 단단한 등이 있어 작은 것들이 스친다다시그것을 보고 무어라 ''했을 눈빛이 우리의 말 속에 실려 있다그러니까 당신 또한 어떤 말을 남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물어볼 이유너무나 충분하지 않나.

 

 

 



 

*폴 고갱의 작품 제목.

원제 :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우리는 누구인가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로운 읽기-논문을 잡지처 '보고읽기


글항아리-아케이드 프로젝트 001, 002, 계속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


오늘날 인문학 출판사들은 갈수록 어려운 글을 기피하는 대중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고 흥미롭게 파헤치는 책은 내기 힘들어지고,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관점의 글을 단순하게 묶어서 낼 수밖에 없는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학술 출판에 대한 대중의 외면과 출판인들 스스로의 자괴감은 깊어지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인문학 출판사들은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통해 존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는 번역서에 대한 심화된 의존과 몇몇 유명 저자에 대한 쏠림 현장을 빚고 있다. 


(…)






논문은 드물다

그것의 유통은 어떤 학회지에 한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반적인 독자를 영영 갖지 못할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은 탄생하는 시간이 터무니 없이 많이 드는 것 중에 하나다. 드물게 쓰이며, 그만큼 드물게 읽힌다. 논문에 쓰인 글자만큼 비싼 글자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생년월일처럼 이름, 제목, 년도로 표시되는 표tag를 갖는다. 태그로 이곳저곳 많이 불리는 것이 논문의 1차적인 목표다. 쓰는 사람들은 한 편에 그쳐서는 안된다. 모아야 책이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누구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편을 쓸 수 있는 용자 누구던가?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논문을 쓸 수 있는 연구자와 일단 논문을 지금 현상할 수 있는 연구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쓸 수 있는 (상황의)사람만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열 개가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지 못하면 한 개의 논문은 다른 논문의 꼬리표로 살기 쉽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만 게 된다. 최종에는 개수로 남는다. 누구, 몇 편 썼더라. 내용은? 모른다. 


가시의 탄생

이 무쓸모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대중은 더이상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집부의 말에서처럼 '양질의 인문서를 집필할 시간이 없는 저자들'의 처지와 같다. 읽을 시간이 없다. 시간을 내서, 어려운 책을 읽고, 그것을 음미해서 지知의 기쁨이나 새로운 창을 내는 즐거움을 가질 여유가 없다. 가시적인 계발(어학, 컴퓨터, 그 밖에 넘처나는 자격증)을 하기도 바쁜데 알아주지도 않는 '영혼'의 걸음을 위해 책을 읽고 머리를 싸매라니, 가시가 가득 핀 이유다. 가시는 아름다움을 (지키기)위해서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아름다움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장미가 피는 것은 한 철이지만 가시는 일년을 난다. 가시는 잠재적인 장미를 현상하고, 사회는 가시의 날카로움을 사랑한다. 가시를 보고 꽃이라고 말하고 장미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 장미가 필 시간이 어디있겠나. 하루빨리 가시를 더 돋아야지. 때 맞춰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있다.


논문을 잡지

 나 자신은 도덕적 의무

 면제와 책임 회피,



 즉 처음부터 나의 

책임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주창윤,『허기사회』, 47쪽. (실제 있는 페이지입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여자가 이 페이지를 편 채로 졸고 있다. 눈이 안 갈 수 없어서 누구라도 한 번씩 읽어보고 기분이 나쁘다. 글항아리는 기분 나쁘라고 이런 페이지를 곳곳에 만들어 놓았다. 논문을 잡지처럼 만들었다. 눈이 가기 쉽다고 논문 읽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 풀어쓴 생각은 색보다 깊이 들어온다. 이 똑똑하고 쉬운 논문들은 한 번 들어오면 머릿속에서 좀처럼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책을 만든 것에 대한 리뷰이다. 논문을 풀어 써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일단 두께가 얇고, 감각적인 컬러로 눈을 붙잡고, 시작이 부담없고, 읽으면서 모르는 것은 짚어준다. 게다가 중간중간 잠을 쫓는 페이지까지 마련되어 있다(위에서 소개한 페이지). 이것은 발굴이 문제다. 논문은 수두룩하다. 눈 밝은 이가 '어머, 이건 읽혀야 해'하는 논문을 모은다. 튼실하지만 젠체 않는 날렵한 책으로 만든다. 느려터진 시의 외양(가격과 두께)과 잡지의 감각(컬러)을 입혔다. 그곳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함께 모이기 좋은 공터다. 광장이다. 가볼만한 카페나 새로 나온 책, 오늘의 잇 아이템이 아니라, 그곳에서 세기말이나, 울음이나, 죽음을 혼자 읽지 말고 모이자. 나가는 문은 '시'다. 『허기사회』는 마지막에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으로 '눈부처'를 호명한다. 저자는 알고 있던 것이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결국 '시'라는 것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시대에 모든 상황은 상호존중이 아니라 상호배제이며,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만 집착하는 즉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논리만이 지배한다. 눈부처 주체는 불의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니 허기사회에서 눈부처 주체만큼 지독히도 아름다운 대안은 없을 것이다. 102쪽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정호승, 「눈부처」부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이정 시집을 훔치던 날 

 그때는 8월, 여름의 한가운데였으나 추운 겨울로 기억한다. 그 거리는 추웠고 나는 훔쳐야 했다. 추위로 훔친 것이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날씨, 혹독한 계절이었다. 나는 그것을 샀지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훔친 것이 분명했으므로 날씨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어야 했다. 몹시 추워야 했고 내게는 품에 안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얼어 죽거나 죽는 것을 모른체해야 했다. 그때 나에게 이 시집을 알려준 이는 나를 눈감아 주었으니 그도 공범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 시집이 필요한 이가 여러 명 떠올랐을 것이나, 말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마음속에 있는 이토록 욕망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왜'라고 묻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밖으로 내어봤자,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챈 그의 본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누구나 다 아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린 시내의 깔끔한 헌책방이었다. 한낮의 추위를 피해서 들어온 곳은 시원해서 땀이 다 식었다. 가지런히 꽂혀진 책들은 저마다 등을 보이며 제목을 읽게 해 주었고 언제나 그렇듯 시 코너에서 오도 가도 못할 걸음을 미진하게, 그러나 부산하게 떨고 있었을 때였다. 내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시집이 그의 눈에는 단 한 번에 띄어 뽑아 들었다.

왜 여기 있지, 그의 첫마디였다. 세상에는 자기 자리를 모르고 자리에 있는 것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이상한 자리에 있다는 거였다.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시집, 더 이상 시인이 없는 시집, 그래서 읽고 싶은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는 이 시집이, 누구나 다 아는 곳에 나와서 값어치를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집에 표기된 값어치라기보다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가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가치를 다 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오래전에 읽었던 시가 스쳐갔다. 여섯 살, 여섯 살, 중얼거렸다. 

 


어느 해거름

                             진이정

 

멍한,

 

저녁 무렵

문득

나는 여섯 살의 저녁이다

 

어눌한 

해거름이다

 

정작, 

 

여섯 살 적에도

이토록 

여섯 살이진 않았다

 

다행히 한 편이라도 알고 있어 그것을 말할 수 있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게는 이 시집을 가질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시집이라면 다른 시집도 많았다. 이것을 구하고 싶어서 발을 구르고 있을 문청이 수두룩할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시에 투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했을 간청이 외딴곳, 아무 눈에나 띄는 곳에 꽂혀 있었다. 아무 눈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밖에 설명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나는 갖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특히나 잘했고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몇 개 안되는 미덕이었다. 마음 내는 것은 대부분 갖고 싶은 것이라는 걸 알았고 필요하지 않다면 사거나 갖지 않았다. 나는 검소했으며 검소한 것이 자랑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갖고 싶은 것이었다. 

 

영화 마지막 사중주를 보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켜는 부부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는 딸에게 새로운 바이올린을 사주기 위해서 경매에 참여한다. 경매에 나온 바이올린은 아주 좋은 소리와 울림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이것을 꼭 사 가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경매는 어느덧 자신들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은 그 바이올린이 갖고 있는 가치를 넘어선 가격을 내고 있었다. 부부는 결국 바이올린을 사지 못한다. 그리고 경매장을 나오면서 마지막 가격을 불렀던 어떤 남자에게 묻는다. 

 

저게 어떤 바이올린인지 아시오? 바이올린리스트가 되려는 장래있는 아이의 앞길을 방해했어! 당신에게 저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완전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으나 이런 내용의 화 냄이었다. 어떤 남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부부는 경매장을 완전히 빠져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당연히 부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남자가 바이올린을 가져야 했을 마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쩌면 어떤 남자도 바이올린을 켜고 있을지 모르고, 재능이 있는 어떤 이에게 선물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돈이 많아 취미나 수집으로 바이올린을 빼앗아 가는 사람이라고 그려졌고 그렇게 생각했다. 돈이라는 이유로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은 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나도 이 자리에서 마찬가지였다. 어떤 남자보다는 돈이 적었지만 충분하기도 했다. 화를 내던 이는 어떤 남자의 얼굴이 되어 부부의 비난을 듣고 있었다. 바이올린이 정말 필요한 것이오? 그에게 투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빴다. 나도 나쁜 얼굴이 되었다. 바이올린이 부부의 딸에게 갔을 이유보다 자신에게 돌아갈 필요를 증명하지 못 했다. 남자는 바이올린을 간절하게 켤 수 없었고 나는 한글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읽을 수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어떤 소용으로 데려갈 힘이 없었다. 힘이 없는 나는 나쁜 얼굴을 내려놓고 시집을 찬찬히 살폈다. 시집을 갖고 있었을 이는 시집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낙서도 접은 흔적도 없었다. 그(녀)의 필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줄이었는데 '21세기 전망 동인'이라는 진이정이 몸담았던 곳의 이름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집을 보면서 나는 이것을 내놓은 이가 시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를 버렸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알 수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시를 포기하면서 자신의 시집을 정리했다. 자신의 지인이나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책을 보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나 다 아는 곳에 책들을 보내기로 했다. 분명히 헐값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술값이기 쉬웠다.

 

시를 포기하면서 할 말 같은 게 있을까요. 당신도, 그리고 당신도, 이것을 읽기 바랍니다. 쓰여있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 한참 들여다보고 마침내 그것을 훔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침내라고 말하기에는 고민이 없었다. 보자마자 훔쳐야 했으므로 천백 원. 결코 산 것은 아니었다. 그날 헌책방을 나오면서 책을 여섯 권을 샀는데, 그중에 하나는 600 쪽에 달하는 우주에 관한 책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넉넉히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훔친 것도 모자라 은폐하려는 노력은 시집의 두께가 보이지도 않게 했다. 완벽했다. 그는 그것을 보고 '욕심'이라 말하며 들어주었다. 그 말에 조금 편해졌는지 웃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울지 않았을까. 그때 환하게 웃었던 얼굴이 천상 도둑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남는다. 정말 필요한 사람이 찾았다는 것처럼, 거짓. 그에게도 비췄을 것을 생각하니 나는 내가 조금 걱정되었다. 

 

나는 무엇으로도 이 책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계절에 영원히 봄이 오지 않는 곳에 있어 네게 그만 봄을 줄테니 달라고 해도 갖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여름으로 착각하는 뜨거움이라도 언제나 책등을 말끔하게 닦아 차갑게 놓을 것이다. 그날 나를 모른척해주었던 서가의 책들과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특히나 그에게 공범이라는 굴레는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지금도 편치는 않을 것인데,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나면 그 마음을 내가 알면서 모른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그도 시집을 보면서 이곳에 있는 연유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리에서 말로 되어 이야기할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문자로 이야기하는 것도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시집을 훔쳤으니 나는 도둑으로서의 자세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길게 남기는 이유는 하나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책들이 누군가에게 갔을까 불현듯 고민하게 되는 날 당신의 시집이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려 걱정하기를 포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고민이나 걱정이 염려로 더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또 불현듯 차서 도둑은 다리를 곧게 펴지 못하고 잔다, 구부정하게 시집을 읽는다. 

 

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