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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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는 누구인가. ‘미지라고 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그냥 시인의 오류로 태어난 이다희지는 저녁이 오면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희지의 세계」 부분이 싱거운 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희지가 목장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그는 미주를 부르고’ 미주는 양들을 이끄는데 이때 희지는 미주와 닿지 않는다그를 끌거나 손잡지 않는다이들 사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소리소리는 형체 없이 존재했다가 사라진다는 점에서 영혼을 닮았다.

 

영혼은 나중에 온다진흙에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는 숭고가 말하듯이. 그러나 시인은 순서를 바꾼다. 소리가 갖은 곳에서 별 뜻 없이 머무는 것처럼 무심하게 영혼을 '먼저' 놓는다. 시인이 말하는 영혼은 몸이 나종내 지닐 수 있는 고귀함이나 여러 날 수양해야 할 이상이 아니다오히려 말한다. 진짜 ’은 얼마나 어려운가진짜 다치고진짜 아프고진짜 사랑하는 몸. 이런 감당에는 나의 몸이 필요하다. 위험하다. 바친다는 말이 어울리겠다. 그래서 여기는 몸 없이 말이나 소리에 물든 '마음'이 먼저 온다. 깊은 의중없이 아이들 장난, 또는 노래처럼 뜻 없기를 바랐던 목소리에 더해 시인은 실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한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또 보자고 한다

(중략)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실존하는 기쁨」 부분.

 

''는 '그'와 '어두운 물'을 내 연인으로 또 금속으로 의심한다. 연인 '같다'는 의심은 그가 연인이 아니라는 정적을 부르고 금속 '같다'는 추궁은 금속이 아니라는 다행을 부른다. 그러나 '나'의 의심과 달리 실제로 그가 ''의 연인이고 어두운 물이 정말 물이라면? '나'는 금새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에 손을 담그는 건 너무 쉽고물이거나 물 아니게 될 판단도 금새 올 테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쉬운 확인을 하지 않는다. 화자는 감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주변을 새삼스럽게 불편해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감각하던 것, 당연하게 존재하는 평온을 비튼다. 그런 위태로운 생각 끝에 만나는 것은 나의 판단으로 바뀔 '그' 혹은 '연인 같은 그'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다시인은 이를 "실존"이라고 제목하며, 그것을 기쁨이라고 수식했다.

 


다른 아이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아무것

도 하지 않는 너 몰래 사온 빵과 음료를 먹고 있는 너 그

런 너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 작은 물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혼을 얻을 때까지

 

어떤 혼은 돌아오지 않고 어떤 혼은 깃들지 않는 교실

안에서 시간이 자꾸 흘러 애들이 죽고살아 있던 내가 만

든 작은 물건을 믿을 수 없게 커져 버린 그 피조물을

 

죽어 버린 나 자신이 보고 있었다

 

조물부분.


 

정리하자. 의심하며 '나'를 '다시' 만나는 것에서 '실존'이 있다. 그렇다면 실존과 영혼은 어떻게 만날까. 시인은 과정을 '기다림'이라고 믿는다초등학교 미술시간,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순간인 교실이다혼이 나가 있는 존재와(선생님혼을 기다리는 존재(화자가 만드는 찰흙)와 아직 혼이 없는(찰흙)이 함께 있는 시간을 포착했다. '그/ 런 너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 작은 물건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혼을 얻을 때까지'조물부분. 찰흙이 영혼을 얻는 것은 기다림으로 인한다. 네가 이 찰흙을 봐주는 것, 너의 눈이 이 찰흙에와 박히는 것, 네 온도가 찰흙에 머무는 것. 그런 것으로 이 찱흙은 무엇처럼 생긴 '것'에서 너의 '것'으로 변한다. '나'는 그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역시 그 찰흙과 다르지 않다. 찰흙이 영혼을 얻는 것과 내가 영혼을 얻게 되는 과정이 다르지 않다. '조물'이라는 제목에서는 나의 탄생을 엿보는 시선까지 이어진다. 작은 교실에서 무한한 반복으로 일어날 시간이 아니다. 조형에 지나지 않을 찰흙같은 사람들 칠흙같은 밤을 지나 사람이 되거나, 여전히 사람 같은 것으로 남기를 반복한다. 영혼을 얻는 일에는 '타인'이라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시인은 실존이라는 몸이 기다려 영혼을 얻는 '사건'을 그렸다사건은 시간을 가져서 오해가 많다. '우리'라는 사건에서 오해와 거짓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시간을 걷어낼 수 있다면불가능하므로 시간을 잘게 쪼개본다. 그것은 충분한 표정이 아닐 것이다. 못알아 볼지도 모른다. 시간을 쪼갠 면에서 존재할 단 하나의 정직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단 몇 분의 대화에서도, 일렁이는 혼동을 ''는 분간하고 싶다"우리는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게 될 거야"/ 그건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중략우리는 걷는다여름밤 주택가에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조율」 부분나와 너는 몇 개의 행동을 하는데나는 그 대화를 일어났던 일과 일어나는 일 그리고 일어날 일로 분간한다나에 의하면 적어도 세 가지로 분간되는 이야기였다. 너는 여름밤을 걷는 '순간다 말해 버렸다. 게다가 시간을 쪼개 정직한 순간을 만나고 싶은 의 노력은 다시 시간에 매인 '나'로 인해 늘 원점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우리의 장면을 판단할 수 있는 '시선'이 있다면. 이런 순간에 는 백 개의 시선을 생각한다. '네가 나의 가슴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면 나는 울며 사력을 다해 너를 밀곤 했는데 (중략그것은 어느 평일 저녁만 있는 삶에 대한 것// 공중에 백 마리의 새가 있다면 백 개의 시선이 이곳을보겠지 공증부분백개의 시선은 '공중에 새가 있다면'으로 가정할 수 있는 시선이다처음에는 백 마리나 되는 새를 상상하기도 했을 것이다이윽고 단순한 형태가 되는 것하나의 무엇이 되는 것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공평무사한 시선일 것이다.

 

한숨처럼 뱉는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건축」 부분. 를 마지막으로 살피고 싶다. '건축'이라는 제목에 깃든 멋진 비유지만 다음 같은 시와 함께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잠깐만 죽을게수학자의 아침」* 부분작은 충격을 주었던 독백에서 이제 마음이 죽을 수도’ 없는 처참한 상태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 같다이런 토로 중에 황인찬은 칭송에 쌓인 '과거의 시'에 마음을 입히는 작업이 눈에 띈다김수영의 절망을 멍하면 멍’으로의 다 날려버린 변용은 미지가 희지가 된 사연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김수영의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마음보다 몸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진짜 몸을 내보일 수 없는 세대가 유희로 절망을 넘기려는 노오오오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비장의 몫은 더 이상 예전의 전유가 아닐 것이다. 정지용의 '유리에게 차고 슬픈 것이 어려 있다'를 바꿔서는 유리의 마음에 대해서 써내린다. '유리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있다'고유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다가 뜻 없는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려 절망을 토하는 식으로. ''


강건한 몸에서 비롯된 언어는 '본질'을 모두 받아낸 양 머릿속 가장 높은데서 아름답다. 그와 비교되는 __의 세계』. 저녁이 되면 __는 집으로 얼마나 훌륭하게 돌아가는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지도 않고 저 멀리까지 전해질 넷상을 따라 움직인다. 몸이 감당하거나, 몸을 감당할 속내가 아닌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단순하게 영혼만 챙겨나온 이들은 지금과-옛날을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만 말하면 잘 모르니까 옛날 노래를 변주하며 마음을 실었다. 실은 열심히 살고 있읍니다. 존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오라는 대답으로 듣는다면 기쁘겠다. 그러니까 

진짜 ’은 얼마나 어려운가진짜 다치고진짜 아프고진짜 사랑하는 몸. 이런 감당에는 단 하나의 몸이 필요하다. 전화와 메신져와 화상이라는 수십개의 기기 뒤에서 수십으로 존재하며 나누는 마음의 형태는 얼마든지 번창할 것이다. 그러한 창이 하나씩 더 뜰때마다 나는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롭게 늘어난다. 그때마다 다를 영혼은 그만 두고 최종내 '나' 대체 불가능한 단 한개 몸을 꺼내 비로소 '실존'하고 싶다는 마음을 읽는다. 쪼갤 수 없는 사건에 엉망으로 묶인 시간을 감당하면서, 너의 눈과 목소리가 내 몸에 박히게 되는 순간으로, 한 순간에 한 곳에서 한 명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너'라는 '기다림'을 통과해서 말이다. 그것은 수십개의 창을 통과해도 되지 못했던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수난이다. 왜 그런 노래를 했던가.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우리 지금 만나」**부분. 그러니까 언젠가 안전하지 않고, 진짜 다치고 진짜 아프기 위해서. '멍하면 멍하고' 대답할 목소리는 아주 가까워서 소리보다 숨이 먼저 닿을 것이다. 




*김소연

**장기하




시집의 중간쯤 은유라는 시는 시집의 안내자처럼 친절하다동시에 희지의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해제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는 정확하게 제목 '은유'를 통과한다'그 장면은 기억과 다르다' 단정한 매음새에서 '장면이 모이면 저녁이 되고기억이 모이면 겨울이 된다'는 설명은 다시 '겨울이 저녁을 깨문다'는 시구와 맞물린다. 이 세계는 장면들이 기억을 깨무는 곳이다. 어떤 것을 실제라고 보존할 수 있을까? ''는 고민에 처한다. 어떤 실제도 기억에 의존해 버티는 실제일 뿐이다. '장면에 대한 기억'이 꼬리를 물며 뜯기는 추격을 오래 벌일 것이다. 다시 백 마리의 새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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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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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존재한다. 나 같은 이가 한 둘이겠나는 긍정, 허수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네 생각일 뿐이고, 페이스북은 몇 개의 대도시, 몇 개의 나라처럼 살아 있다. 나는 그 도시에 살지 않는 것일 뿐. 블로거형 인간과 페이스북-트위터의 인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면, (페북과 트위터형의 인간이 또 다르겠으나) 나는 명백히 블로거형 인간이다. 짧은 글을 올리고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전'이 언제나 늘 '더 나은'이라는 긍정을 감내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가 '발전'하는 통에도 나는 고릿적 커뮤니케이션을 고수한다. 세대차이는 이제 연령 불문하고 일어나는 것이고. 급기야 이런 책이 나왔다. 그곳에 기쁨과 아픔이 있으니, 페이스북의 영향과 주가와 그밖에 다른 것을 말하기 전에 그곳에 머문 사람들의 심리를  '공부'해야 할 참에 도착한 것은 긍정적이다.


이것은 인터넷과는 다르다.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생활은 부정할 수 없이 뜻하지 않은 수갈래의 방향으로 구현되고, 그것을 아우르는 세계를 구현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정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라고 느낀건 요새의 일이다. 특히 6장 <십대와 패거리 문화 클릭질>을 감명깊게(!) 읽었다. 


나는 왜 사람들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 일부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교장선생님에게 말했을 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페이스북을 탈퇴하렴. 전혀 문제 될 것 없어." 선생님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페이스북을 탈퇴할 수가 없다. 친구들 모두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말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나를 보호해줄 수 있겠는가? 나는 교장선생님이 뭔가 조치를 취하기를 바랐지만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교장선생님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장선생님은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고 절대 나를 보호해줄 수 없을 것이다.

160쪽


시카고 일리노이 주에 사는 16살 마를린의 말이다. 


이것은 페이스북을 차치하고 16살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나오는 것이다. 그만두라는 조언이 조언인가. 괴롭지만 그곳에서 내가 있었고, 그곳에서 문제가 일어났기 때문에 해결 역시 '그곳'에서 해야 한다.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기 때문에 무슨 지혜나 위엄이 깃들어 있을 것 같나. 심각한 오해다.


최근에 나는 '카카오톡 스토리'와 '애니팡'을 그리고 '트위터'와 '카카오 프렌즈'를 깔았다. 게임이나 소셜을 하지 않는 심심한 인간으로서 모두 불필요한 앱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내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채널을 경유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모바일 작은 화면을 밤마다 반짝이며 일주일에 하나 올라올까 말까한 짧은 글줄을 읽고 또 읽는다. 애니팡에 접속해 하트를 선물하는 것. 아직 비공개인 그의 트위터를 알기 위해 프로필 사진을 고심해 갈아 끼우는 것. 카카오 프렌즈의 코인을 선물하며, 내가 모르는 그들이 어떤 세계에서 쉼을 가꾸는지 안부를 전한다.  


할말이 없는 전화보다 나을 때가 있다. 


부모님이 하시는 앱이다. 바뀐 프로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일년도 넘게 바뀌지 않는 내 사진이 걸린 프로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 소셜에서 시작해 마음으로 도착한다. '페이스북 망해라'는 말대신 그곳에 적힌 사유를 우리의 대화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공기가 섞이는 대화로 가져오기, 소셜을 포함할 수 있는 대화가 진정 소셜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작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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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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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 프레임의 책상은 산 지 오년 쯤 되었다. 오른쪽에 책장이 역시 철제로 가늘다. 시원하게 트이면서도 책을 넉넉히 수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는 당시 막혀 있는 것에 대단한 강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산 책장과 책상은 모두 뒤가 오픈되어 있다. 철제 프레임으로 폭을 만들고 책을 올릴 수 있는 상판만을 갖춘 구조다. 흔히 떠올리는 책장처럼 뒤가 막혀 있는 구조는 내겐 불안하다. 뒤편의 보이지 않는 무엇을 상상하게 한다. 그것은 하찮치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세계라서 괴롭다. 보지 못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주 피곤한 일이었다. 아주 좁은 틈에 빛이라고는 들지 않는 뒤편을 거느리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내가 이야기 할 수 있는 불안은 이정도다. 불안이 없는게 아니다. 그것을 다 쓸 수 없을 뿐이다. 불안이 없는 내가 나일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불안은 중요하지만 불안을 말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창피하며 부끄럽다. (한숨) 그만하기로 하자.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의 정직한 제목의 책이 있다.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저자는 불안에 패대기쳐지거나 울고 싶었던 날을 유머러스하게 적어 '나 이러고 산다'며 보여준다. 2살때부터 불안과 함께한 이력이 여간하지 않다. 적당히 불안에 대해서 쓴 서술이 아니라서 허리를 꼿꼿히 펴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일대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붙들게 된다. 불안이 엄습했던 상황과 불안으로 나타난 심경과 신체의 변화를 상세히 적어서 자신을 관찰한 성실한 일지로 생각해도 좋다. 저자는 자신에게서 시작된 뜻모를 불안에 대한 물음에 꼬리를 이어 '불안'의 역사와 문화를 탐사하고 '불안'을 쓴 문학이나 '불안'을 생각하는 과학 저변을 돈다. 오백페이지에 가까운 책이 되었다. 그 여정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이라는 부제가 얼마나 겸손한 말이었는지. 1부를 키르케고르와 프로이트의 '불안'에 대한 문장으로 '배치'하고 곧바로 자신의 결혼식에 불안으로 거의 죽을 뻔한 일을 상세히 적는다. 결혼식만 망쳤나, 자신의 생에서 셀 수도 없이 수치스럽고 겁났던 일과 많은 것들을 버리거나 망쳐왔는지 이야기한다. 이쯤되면 아, 위로할 말도 마땅찮다. 그가 이렇게 긴 책을 쓰는 '불안'에 대해 생각하면 '승리'라는 단어가 슬몃 생각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불안의 역사와 문화를 거슬러 살핀다. 경험이 아니라면 이런 쓰기는 가능치 않았을 텐데 어떤 연구를 소개하면서 그에 따른 자신의 증상을 함께 엮어 더 깊은 이해를 구한다.


종내에는 불안은 하나의 선물일 수도 있다(!)며 이야기 하는 저자의 글을 마지막으로 둔다. 인생을 못살게군 불안에 대해 이성적으로 내리는 최대의 찬사일 것. 눈물겨운 불안에 대한 이해여.


적어도 내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동전의 뒷면일 것이다. 어쩌면, 부족하나마 나에게 어떤 도덕감이 있다면 그것이 불안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따금 걱정으로 나를 미칠 지경으로 몰고 가는 상상력이 내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비해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하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 

(...)

불안은 낫지 않는 상처처럼 가끔은 나의 삶을 막아서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힘의 원천이자 은총이기도 하다.

421~422


불안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 추천한다. (남의 불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이 책은 무엇보다 재미있다. 저자의 따뜻한 인성이 자신의 삶을, 그리고 이 책을 집어든 불안에 고통받고 있을 사람을 시종 유머로 토닥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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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5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6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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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에 대해서 무얼 알겠느냐만
<의례와 놀이> <문학에서의 시간모델들>
<아름다운 것과 위험한 가상> 같은 소제목들은 참 
궁금한 챕터 아니겠습니까.














표지가 마음에 듭니다. 애처로운 얼굴이로군요.
'불안과 함께'
사는 것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공통 분모 아닐까요













9월 뿐만이겠습니까. 
9개월, 아니 9년을 두고도 읽을 수 있을 두께로군요.
사실 이 책이 신간도서로 선정될 일도 없거니와(라고 추측)
선정되도 이 책으로 하여금 무언갈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선정되지 않기를 바라며 추천하고 있는 이상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한 시기를 
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시선이 놀랍습니다.
동등한 한 표씩 다섯 권을 담은 것 같지만
실제로 세 표는 이 책의 지분입니다.














고종석과 언어는 이제 함께 연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궁금하네요. 불순한 언어가 아름답다니.

오늘 날씨 보셨어요?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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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비오는 날 종로에서 <논픽션 다이어리>를 봤다저녁은 없었고 약간 지쳐서 나왔다영화가 끝나고 고향 동생과 꽤 오래 전화 했던 기억이 있다종로의 낮은 지붕의 술집이 늘어선 거리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며 내내였다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다그때 나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준비'라는 허울의 어떤 교육에 동원되었는데그 결과 그 시간을 조금도 지치지 않고 혐오할 수 있었다나는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몰랐으며-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조금 더 고백하자면 어떤 옷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해야겠다보도블럭의 구역 반쯤까지 플라스틱 의자를 드밀어 술을 먹는 이들 덕분에 종종 도로에 나와 걸어야 했다도로에는 차가 느리거나 없었다아스팔트에 저 멀리서부터 쬐는 노란색 조명은 어딘가 너무 촌스러웠고그럴 때마다 가게 유리문에는 어깨가 좁은 실루엣이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을 보며 언젠가 등교길의 수고를 줄이기 위해 달리던 논두렁을 기억할 수 있었다교복 스커트짧은 숨을 몰아쉬며 차부에 도착했을 때 종아리마다 차갑게 묻어났던 아침 이슬에 양말 언저리가 동글동글 젖었던 느낌도 함께몇 개의 제자리 뜀으로 이슬을 털어냈던 순간도 지나갔다그때 나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차부의 지져분한 유리 새로 나를 보았던 모양인데. 후에 그 유리간에는 내가 잘 보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것은 내가 졸업 후 수년이 흘러 도서관 한쪽에 다른 이들의 원고지와 함께 쌓여 있었으며, 버리기 위해 종이류로 분류되던 중 동생이 내 것임을 알아보고 가져왔다. 원고지라는 고전적인 공간에 얼마간의 분량과 연필을 든 행위가 중요했던 고등학교 시절 흔한 과제였다. 

 

다시 스콜같은 비가 내리는 여기는 서울의 변두리. <논픽션 다이어리>의 내용을 적을 정도로 기억이 비상한 것이 아니지만 제목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날 마련됐었던 '감독과의 대화'를 적기 위해서다그는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산다는 것'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고 했다. <논픽션 다이어리는>1990년대 일어났었던 충격적인 사건, 지존파 살인사건을 축으로 성수대교 붕괴, 삼풍 백화점 붕괴를 다큐 형식으로 연결한다. 다큐가 지존파 살인사건에 대해 짓는 의문은 이렇다. 범죄를 저질렀던 일부 인간의 악마적인 행위의 결과였는지? 1990년대라는 격변의 시간에 대한 논의 없이 충격적인 결과에 대해 몸서리 치는 것이 과연 맞는지?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19세기라는 시간이 있다. 헌데 저 멀리 변화의 축을 감지할 수 도 없이 다리가 지어지고 건물이 올라서는 변동과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의 격차. 압구정동을 향하며, 악에라도 들려서 움직이고 싶었던 것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었던 세기의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영화에서 주요한 물음은 5명을 직접적으로 살인한 지존파의 빠른 사형과, 무수한 생명을 빼앗고 가족을 파탄시켰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처벌자 없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몰아가기 쉬운 증오와 수많은 고통에서 고통에 함몰할 뿐인 모습이다. 저이들의 얼굴은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수많은 어깨를 걸치고 있을 재앙같은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의 얼굴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영화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의구하며 전개된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쩐지 19세기와 20세기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시간의 언급에 감동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새로운 문물의 태동은 극단적으로 절멸하고 시작하지 않는점이 떠올랐다. 대부분 앞 뒤로 꼬리가 어느정도 있으며 가운데 가장 두텁게 발달하는 형상. 이를 '전함형 그래프'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 군상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두터운 공간, 중심세기에 사는 이들이 있고중심세기보다 앞서 무엇을 선도하거나 선도에 의해 괴리되는 집단이 있다그리고 저 끄트머리에는 그 반대 유형의 인물이 이름없이 살아갈 것이다. 19세기의 인물이 20세기에 살기 위해서






한 권의 책이 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유려한 제목이었다논문을 거의 그대로 실어 유연한 제목이 주는 내용의 인상은 거의 받을 수 없었다교육이 계급을 만들고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얼마나 권력화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으며어쩌면연구 결과 전에도 공공연히 알고 있던 사실을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책에서 오히려 실감났던 부분은 유학생활을 하며 느낌 어려움긍정적이었던 부분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의 문제와 유학이후 미국에 남거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인생의 비교를 인터뷰를 통해 실제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완벽한 소통을 구축하지 못해 그들의 리그, 엘리트에서 제외되었던 이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계급의 정점에 가는 모순을 확인한다. 유학이 갖는 선진국과 비교할 수 없는 인프라부터 학구열, 보장의 격차 등을 하루아침에 수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이 책도 대안을 갖는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 유학에서 느끼거나 겪게 될 일을 미리 선행하는 인터뷰집실용서로 읽는 점에 대해서 희망은 유학을 준비중이 이들이 이런 내용을 숙지 후 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바꿔야겠다는 의지를 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이 알 수 없는 지점을 시간이 흘러 확인케 된다면그것이 이 책이 가져갈 최대의 수확이 아닐런지.

 

책이 어떻게 읽히는지 책이 정할 수 있는 운명은 아니겠으나 이 책을 대하는 태도와 <논픽션 다이어리>를 마주하는 시선에는 동일한 부분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시간의 전함 가장 안전한 곳에서 타고 노는 것을 상상했던 십대가 있었다그러나 세기의 전함가늘어지고 끝내는 소멸될 끄트머리에서 언제나 부족한 시간을 터무니 없이 살아내고 있는 무명자가 바로 나임을 느낀다. 9호선을 탈 때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서 무거운 다리, 내가 미쳐 몰랐을 죄를 생각한다. 그러나 서늘하면서도 청량하게 종아리를 흐르던 아침 이슬을 기억하는 고등학생때로부터 나의 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20세기도 아니고 그대로 적기에는 촌스러운 이십일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저 끝에서 이끌려지는 시간에 못견디는 19세기의 사람들이 말이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얼굴로부터 시작한다한때는 글을 잘 썼으나 이제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아주 슬픈 사건이 벌써 수년전의 일이다매일 일기를 쓰지만 그 내용이 한 줄이나 길어야 쉼표로 구분되는 분절을 넘지 못하는 이가 있다내가 가로질러 뛰어갔던 시퍼런 논두렁, 테두리를 이루는 다각의 균절에서 자신의 시절을 다 보내야 했던이의 이야기다어떤 감정이 개입할 대상이 아니며 아무도 모르게 잊혀질 페이지도 아니다눈물과 감동회한과 아픔으로 소비되는 것은 지친다. 그들의 말이 아주 작으며, 작게 위치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것을 읽는 위상이 제목보다 더 강렬한 부제<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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