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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평점 :
장소를 잃어버린 장소-非공간의 발견_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오늘 아침 단어>는 '오늘 아침'에 이후에 놓일 관습적인 말을 총합한다. 이를테면 식사나, 기분이나 날씨 등으로 자연스러울 '오늘 아침 ○○'을 '단어'라는 말로 축약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으로 오늘-아침은 스스로 갖는 지루한 리듬을 벗어나 '오늘 아침'에서 달아난다.
아침은, 아침이 오지 않을 때까지 일어나서 손쉽게 일상이라고 불리지만. '일상'에 순식간에 잡아 먹히기 때문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아침은 조용하고 유순한가. 아니, 아침은 당신이 당신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기록적인 시간 아닌가. 가장 가까운 어느 곳에라도 가려 할 때, 당신은 반드시 당신을 벗어나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집 앞의 슈퍼만 가려해도 그렇다. 주섬주섬 어질러진 옷을 입으면 당신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옷을 갖춘다는 '의례'는 그 뜻만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목이 '티셔츠'를 통과하는 것은 그래서 '의례(儀禮)'라고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당신은 이상한 공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시인 역시 웃옷을 갈아입으며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부분. 그곳은 아직 당신의 바깥이 아니고 당신의 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바깥은 불투명하고 그렇다고 나를 알기에는 표면에만 머물 뿐이어서 무엇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이런 공간이 있으나 어떤 고민도 없이 지나쳤기 때문에 ‘비공간’으로 존재해왔다. 이곳은 무엇보다 이름이 없어서 불리지 않았고 겨우 발견했으나 '시간'으로 치우쳐 기록될 뿐이었다.
오래 전 세일러문은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 변신했었다. 옷과 머리카락과 마술봉, 화려한 영상과 음악으로 변신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어떤 악당도 세일러문이 옷을 갈아입을 때 공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악당의 변신 역시 세일러문은 두고 볼 뿐이었다. 돌아와 생각하건데 '의례'에 대한 '윤리'였기 때문이리라. 문 파워 액션, 만화속의 일만이 아니다. 당신이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바깥은 당신을 기다려준다. 당신은 아직 나오려는 채비중일 것이고, 그 채비는 곧 끝날 것이며 당신은 티셔츠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할 것이다. 누구나 티셔츠에 머리를 드미는 순간을 지난다. 시인은 이 의례의 순간에서 '이름이 없어 없었던 장소'를 발견하고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다. 시인은 그곳에서 "가슴 바깥으로 걸린 간판을 읽으며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이제 둘 '사이'에서도 비공간을 발견한다. "둘이서 마주 않아,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 이마를, 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 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내일, 내일」, 부분. 여기서 문제는 두 사람이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마주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생각하는 것에 있다. 제 스스로(도시락의 내용)는 문제가 없으되, 우리가 함께 있는(도착한) 장소가 잘못된 것이라는 고백이다. 누가 우리를 이곳에 데려왔는가. 대답이 된다면 슬프겠지만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라는 마지막 행을 답지로 밀어 넣는다. 안온한 공간이 불시착한 난감으로 바뀌는 순간. '없었던 공간'이 우리를 쳐들어온 사건이다. 시인은 이곳을 벗어나거나 뒤집으려고 하지 않는다. "생전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 라며 다만 이곳에서 가능한 이야기를 읽어낼 뿐이다.
다시 '물건'에 집중해 조금 더 분명하게 비공간의 부조를 떠내고자 한다.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 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가로등 켜지고, 그림자 사라지고, 나는 머뭇거릴 때.” 「우산의 과정」, 부분. 시인은 우산이라는 물질이 마침내 우산으로써 활약하는 과정을 쓴다. 그리곤 마지막에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산이라는 검은 빛으로 펼쳐진 시간에는 빗속에 생긴 '새로운 공간'도 있다. 비가 아니라면 사라질 공간에서 어깨를 가까이 하며 걸었던 날을 깊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산 아래의 움직임을 '시간'으로 말하지 '장소'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 단어>의 공간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불리지 않으며 장소임엔 분명하지만 장소로써 역할하지 못하고 어떤 '때'로 표기되고 마는 이상한 곳이다. ‘곳’이 없되 ‘시간’만 있는 장소를 가 본적 있는가. 아무래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우리가 ‘기억’이나 혹은 ‘추억’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시간이 없는 장소는 다른 방법으로 반복된다. 이 반복 속에서 시가 속수무책인 까닭은 하나 ‘이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 앞에서 웃거나 강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 「맑은 날」에서는 지금과 다른 뜻밖의 장소를 만난다. 술을 진탕 먹은 ‘나’는 “짬뽕이란 단어는 어떻게 발음해도 슬퍼지지 않는”다며 몰아치는 행간을 지난다. 그리고는 문득 “내게 없는/ 아내가 식탁에 앉아 펑펑 쏟는 눈물”앞에 도착하고 “그 앞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물고/ 아내를 지켜보는 단답형 남편이”된 것 같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솔직하게 “그런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길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고백하면서, ‘내게 없는 아내’ 앞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쓴다. 내게 없는 아내는 아마도 미래에서 만날 아내 같다. 그 아내를 생각하는 ‘사이’ 자신이 앉은 식탁은 비현실적인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도저히 착해지지 않는 마음을 뒤져보아도/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글자만 가득할 뿐”이라는 자신을, 미리 틀키고 싶은 협소를 쓴다. 뜻 없는 독백을 당신은 듣고 있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공간’에서 '나'는 당신을 상상하고 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
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면목동」, 부분.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 아내는 술을 마시고 울고, 남편을 이유를 모르고 부축하는 상황이 전술되었고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간명함. 아마도 ‘내’가 ‘나’의 탄생을 ‘기억’하는 일일 것같다. 이 이야기 푸는 일을 다음 구절로 대신하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현실' 속에는 근원과 리듬이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즉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 그저께 시작된 것이기도 하며, 까마득한 옛날에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까마득한 옛날. '나'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마지막 시는 마침내 시의 제일 앞 <오늘 아침 단어>를 상기한다. 나의 한 겹 한 겹이 시간과 장소를 함께 포개며 지나왔고 그 사이 탈락 돼버린 시간과 장소가 등 뒤에 헝클어져 있다. 장소를 잃어버린 장소, 비공간의 발견.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그곳을 시인은 찾아 보통의 곳에선 소리 낼 수 없던 마음을 낸다. 세상에 시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있다면 이름이 없는 이런 '곳'들이 아닐까. 당신의 마음이 머물기를 고집 피우는 곳은 어떤 ‘장소’를 잃어버렸나. 그저 ‘그때’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으로 걸음이 기울었지만 한 번 가까워본 적 없다. 는 고백을 나도 함께 쏟는다. 작은 카페. 엎질러진 커피향이 소란스런 테이블을 바라본다. 한 때 당신의 얼굴이 가만가만 비쳤었던 빈 잔과 내가 함께 말이 없는 오후다.
*페르낭 브로델, 김홍식,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해제中, 갈라파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