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단어들이 층층으로 들어가 있는 이 주소는 무슨 연도나 기도문 같은 느낌을 주지 않소?

 

[프라하, 1920년 8월 31]

화요일

 

프란츠 카프카, <밀레나에게 쓴 편지>

 

 




비둘기의 집을 본 적 없다비둘기가 자는 일도 본 적 없다그러나 비둘기는 출퇴근길을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었으며보도블럭이 끝나고 다리가 시작되는 곡률을 함께 돌아서 또 걸었으며내 발목치에서 머리와 발을 분주히 놀리는 그들을 지난 적은 많다내가 기억하는 바비둘기는 걷는 존재였다나 역시 비둘기에게 그럴 것이다비둘기가 나의 잠을 모르듯 나 또한 그들의 잠을 알지 못했다저 많은 비둘기들은 어디서 잠을 자나.

 

신호가 제법 길었다평소처럼 다니는 길이었으나 그날은 유독 횡단보도 건너편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별 관심없던 낡은, 4층짜리 건물이다. 1층에야 작은 가게들이 제법 활기를 띄며 있지마는 역 출구에 가까운 2층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3층 사무실로, 4층의 중국 식료품점으로 사용되는 건물이었다가로등이 죽죽 건물 앞을 무슨 문양처럼 긋고 있었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빛이 조금씩 접히고 있다오래된 건물은 간판에서 엿볼 수 있다가로의 문늬로 빛나는 네온은 연식이 있다그 빛나는 간판 아래는 바깥으로 돌출된 구옥의 창문이다그때 눈에 띈 것은 뭐였을까이제까지 보지 못했던그러나 틀림없이 간판 위를 걸어다니는 동그란 것들비둘기였다십수마리의 비둘기가 간판의 어깨를 밟으며 종종거렸다바깥으로 내 천장이 있는 창문에서 비둘기는 둥글게 앉아있었다그것이비둘이의 집이었다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비둘기의 잠도시의 비둘기는 후미진 건물의 모퉁이에서 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마다 새소리가 들렸다내가 사는 집 역시 구옥으로베란다를 닮은 창문이 바깥을 향해 있고 안쪽으로 얼마간의 공간을 확보한다. 새소리라 함은, 혹시 청량한 아침을 생각하는지. 아니라 한 번 가다듬기 시작하면 구우-구우-구우 하는 것을 15회에서 20회까지 지속하는 굉장히 퉁명스러운 소리였다한 번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30초 이상 지속되고그 구우-구우-구우하는 소리는 사람으로 치자면 불만스러우며 불편하고누가 뭐라고 중간에 제지해도 그만둘 생각이 없는 톤이었다그것은 습관으로 만들어졌다오래도록 그 소리에만 단련된 성대였다그게 뭐라고 성대라는 말에서 잠깐 슬퍼졌고아니 습관이라는 말에서도 잠시 그랬고방충망에 걸린 십수개의 깃털을 바라보았다아침 저녁 비둘기와 같이 걸었던 나는 어느덧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후미진 건물의 모퉁이.

 

불평하려고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비둘기의 구구스러움과 이 책의 주절거림이 대체로 닮았다이 책은 갈증이 난다짜증을 완곡히 표현하려고 했는데 틀켰나그런 목소리로 단련된 문장이다습관으로 만들어진 톤카프카는 밀레나에게 편지를 엄청나게 보냈다거의 매일, 거의 똑같은 도입부오늘은 편지가 안왔소무슨 일이오편지를 제 때 보내주시오..제에발...혹은 편지가 잘 도착했소. 그리고는 이 두꺼운 편지집에서 오십 몇장에 하나씩 접어둘만한 문장이 나온다이따금씩 나오는 저런 문장을 보며 내가 책을 읽는구나한다비둘기의 이 구구구 소리는 짝을 찾기 위해 내는 거라고 한다그렇다면 더욱 닮았다. 구구하는 비둘기 소리가 퉁명스러운 소리인 건 그 소리만 연습한 성대가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 역시 자신만의 구구절절을 이렇게 많이 썼다. 그런 근육을 키우는 가운데, 잘 단련된 울대에서 이따금씩 적어둘 만한 말이 나온다. 주소를 보고 연도나 기도문을 생각한다니. 이 단순하고 천진한 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이걸 받아본 이는 역시, 하고 빙긋 웃었겠지. 도시의 비둘기는 어디에서 자나. 비둘기는 우리집 창문 구석에 와 잔다. 산다. 퉁명스럽게 우는 비둘기. 날개와 다리와 눈은 비둘기를 이루는, 다른 습성으로 맺음했다. 그리고 부리는 비둘기의 그런 소리를 내도록 셀 수 없는 시간동안 내어졌다. 비둘기 소리의 문법. 내 손가락은 쉼표와 마침표를 어떻게 맺나. 나는 얼마나 한 자리에 앉아서 타자를 두드리나. 이제 그걸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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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쉽지만 죽어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랬더라면에 붙들리는 나약함은 수많은 만약들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가져와 흘려보내고, 무너지기 좋은 이유가 된다. 그건 흡사, 아파해야 하는 것을 아파하는 사람으로 보이게도 한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과거에 돌아가 현재를 바꾸는 이야기들이 불가능한 염원을 보여주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지나간 것을 후회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최선인 모습인걸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바꾸자는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아이러니에 <언노운 걸>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 내가 했던 후회의 지점을 비껴가지 않고, 고통스럽게 통과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그런다고 과거가 바뀔까?' 갸우뚱한 얼굴은 어쩌면 당연하다. 적당히 죄책감에 멀어져 지난 일로 버리고 그때와 다른 사람으로 살거나, 과거에 걸려 미끄러지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영화는 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니는 진료마감 1시간 지나서 울린 벨소리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두드린 소녀는 다음 날 죽어서 발견된다. 소녀가 죽지 않을 수 있던 수 많은 가지 수 중에 하나가 제니였으나, 제니가 소녀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제니는 자신이 미쳐 도와주지 못했던 그 한가지만 나눠갖고 조용히 아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그 병원에는 불빛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건물에 깃든 불빛은 사람의 기척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 제니는 몰랐지만, 그것을 알기도 전에 상황 자체를 저버린 데서 오는 죄책감이 제니의 삶을 흔든다. 제니는 커리어를 인정받아 곧 큰 병원으로의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제니는 소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A가 아니라고 B를 비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데, 흔히 혼동한다. 두 가지는 다른 무게로 사람의 윤리를 묻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제니가 소녀를 위해 묘지를 사도 끝나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죽음은 가족에게 알릴 수도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다. CCTV에 잡힌 얼굴이 있고, 문을 두드렸던 손과 목소리가 있었는데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니. 그녀는 이직하지 않고 병원이자 사건의 현장중 하나인 그곳에 남아 소녀의 이름을 추적해간다. 제니가 불타는 정의감이 있어서, 이름 모를 소녀의 죽음에 분노해 그 죄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고, 이 미완의 양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그저,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 이것이 제니가 가져가려고 한, 자신이 마주한 책임이었다.

 

제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도 과거로 돌아가 진료마감 1시간이 지난 벨소리에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지금과 미래에 둘 수는 있다. 그리고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다. 간절하다는 뜻은 마음 속에서만 애가 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침식당하며 소녀의 구명을 위해 사는 일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소녀의 사진을 핸드폰에 갖고 다니며, 이 병원에 들리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보여주고 물어본다. 소녀의 일화를 들려준다. 소녀의 고향이 외지임을 염두해 외국으로 전화할 수 있는 센터에도 찾아가 물어본다. 제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녀를 '물어본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은 물음은 죽은 소녀가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렇게 제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목격자도 없고, 가해자도 알 수도 없고, 신원도 알 수 없는 미상의 죽음은 이 간단한 '물음'을 통해 조금씩 밝혀진다.

 

제니가 의사라서, 똑똑해서 수사를 한다거나 추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제니의 '물음'은 그 소녀를 멀리서, 가까이서 알았던 이들에게 우연히 가닿아 그들의 양심을 묻는다. 그녀는 소녀의 이름을 물어가는 행동을 통해 과연, 한 명의 유일무이한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마침내 소녀를 죽게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죄책감에 덜덜거리며 조아리는 얼굴이지만, 제니는 죄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당신의 잘못은 내가 분노하고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니의 다문 입이 말한다. 자신의 죄에 우는 고통을 역시 인간의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인가. 자살을 시도한 이를 구하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스스로 이야기 할 것'을 말한다.

 

지금 여기 살아 있다면, 살아있는 만큼의 아픈 몫을 가져가라는 것. '제니'는 한 사람이 가져야 할, (다른 이가 보기에 너무나 큰)죄책감과 책임을 묵묵히 가져가며, 다른이의 몫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양심과 죄책감의 질량은 정량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혼자만 알고 숨죽여 우는 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소녀가 죽은 이유가 아니라, 죽은 소녀를 알려고 했던 제니의 태도는 소녀의 죽음에 연결되어 있던 몇 사람의 태도를 바꿨다. 그날, 제니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어린 한 사람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녀의 죽음에 걸린 제니의 죄책감은 몇 사람을 비로소 '살게'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 소녀가 실은 제니가 물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소녀가 하는 일을 알았고, 어떤 이는 얼굴을, 어떤 이는 이름을 알았지만 자신이 소녀를 '인간적인 관계'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녀의 죽음에 침묵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이름없이 임시 매장되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계'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아주 좁고 뜻깊은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 같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 각자의 일을 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해져 진행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은 어떤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신이 아니라, 그때 당신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다. 제니가 소녀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을 때, 제니는 자신이 계속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닿고 영화의 마지막, 제니의 소녀의 이름 찾는 일과 자신이 환자 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두 가지 모두 삶에 필요한 자세며, 어느 한 쪽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오늘은 제니가 가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마땅히 갖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있는 믿음이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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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를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없었다. 

살구에서 시작되어 어머니로 이어져 가슴 무너지고.

쓰는 이는 몇 번 무너진 후에야 완성되었을 글.

이렇게 멀리 왔다. 더 읽고 싶다.  
















뜨는. 동네 라는 제목이 마음에 안들지만 어쩌겠나. 

뜨는 동네인 것을.

그렇다면 지는 동네도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어디쯤에서 살고 있다. 

동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테고,

뜨는 동네에 사는 이들과 

그 반대편에 살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뤄야 할 것이다.















하워드 진의 책을 읽어본 적 없으므로

부끄러움을 기억하겠다는 마음으로 올린다.
















정말 유쾌한 제목이다. 

그들을 백수라고 지칭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마따나 백수가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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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을 열심히 봤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왕좌의 게임을 기다리며 겨울을 나고 있다. 그냥 볼 뿐의 의미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의 이유를 알고 싶다. 그건 나를 아는 일이기도 하고, 

또 이런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한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왜 그런것을 사회가 욕망할까?
















전 3권. 1권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모네와 클림트로 대표되는 20세기 초 인상주의와 상징주의까지 담았다. 

미술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새롭게 쓰이는 미술사. 고루했던 교재를 넘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보도자료의 수식이 너무 번잡해서 (모험과 호기심으로 점철된 중단 없는 삶의 열정)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천착했는지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가령 '존재의 연약함에서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라는 말 등은 너무 화려지만



다만 

'진짜 문제'를 지닌 '진짜 사람'을 만나 그려졌다는데서 멈추고, 그의 일대기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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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맥주를 먹다가 반쯤 쏟았습니다. 자는 곳 경계를 짓는 책담 일부가 젖었고, 아끼는 것을 곁에 두었기 때문에 순서 없이 읽는 책들이 공평하게 젖었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도 있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가장 밑에 층에 놓았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일까, 두 손으로 펼쳐 놓았고 지금은 가장 윗층으로 피해 있습니다. 펼쳐 들었던 곳은 시편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무릎으로 맥주를 닦느라 휴지를 많이 썼고, 늦게 들어온 동생은 수북한 휴지를 보며 혹시 감기가 걸린 것 아니냐 걱정했습니다. 제가 옮긴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겠죠.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만들어 한 시간쯤 허둥거렸습니다. 


그 와중에 노트북을 신경쓰지 못했던 것은 맥주가 다행히(?) 책쪽으로 기울었던 까닭이고, 노트북에서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책상이 쓰러졌는데, 그래서 책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노트북은 그 잔잔한 노래를 계속 트는 겁니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책상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진듯 애지중이 받을었을텐데요. 지켜보고만 있는 마음의 책감에 아랑곳없이 노트북은 침착하게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바로하고 노트북을 올려놓았습니다. 맥주는 책이 먹었는데, 이미 취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왜 맥주는 쓰러졌던 걸까요? 겨울은 춥고, 내일은 월요일이고, 우울한 손가락으로 밀쳤던 것은 아닐겁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잠깐 들어서 옮기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거든요. 읽고 있는 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캉과 푸코를 읽는 책인데, 900페이지가 넘는다는 말로는 그 부피가 와닿지 않는것 같았거든요. 그것을 담으려다보니 프레임에 나의 생활이 끼지 않겠어요. 나는 치우고 싶었습니다. 다 먹은 물병과 이제 다 먹어가는 물병이 이 책의 두께 너머로 보였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는 포즈와 함께 책상이 무너졌고, 책상 아래 있던 맥주가 쓰러졌고, 주위에 책이 젖었습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아름답게 편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책을 읽고 쓰지 못해 두께를 보임으로써 읽기의 괴로움을 보이며 자랑아닌 자랑으로 지금을 면피하는 얄팍한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겠지요. '행복하여라!' 행복하려고 했을까요? 다행스럽게 책이 젖어 젖은 책들의 페이지를 한 구절씩은 보게 되었고, 그것으로 읽기를 다한 주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02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제 이름을 확인했고, 저는 그럴 수 밖에 없으므로 그렇다고 했습니다. 알라딘이라고 했습니다. <야전과 영원>도서 리뷰가 아직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전화를 드린다고 입을 뗐습니다. 신간 평가단을 혹시 그만 두실 것인지,,하고 끝을 흐렸습니다. 저는 속이 뜨끔하여 읽었으나, 아직 적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좀 더 주신다면 적을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31일까지 괜찮으시겠냐고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가능하다고 했으나 정말로 가능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을 달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오늘은 맥주를 쏟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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