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과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쉽지만 죽어도 이뤄지지 않는다. 그랬더라면에 붙들리는 나약함은 수많은 만약들을 현재에도, 미래에도 가져와 흘려보내고, 무너지기 좋은 이유가 된다. 그건 흡사, 아파해야 하는 것을 아파하는 사람으로 보이게도 한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과거에 돌아가 현재를 바꾸는 이야기들이 불가능한 염원을 보여주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지나간 것을 후회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최선인 모습인걸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바꾸자는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아이러니에 <언노운 걸>은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지금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단, 내가 했던 후회의 지점을 비껴가지 않고, 고통스럽게 통과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고. '그런다고 과거가 바뀔까?' 갸우뚱한 얼굴은 어쩌면 당연하다. 적당히 죄책감에 멀어져 지난 일로 버리고 그때와 다른 사람으로 살거나, 과거에 걸려 미끄러지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영화는 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제니는 진료마감 1시간 지나서 울린 벨소리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문을 두드린 소녀는 다음 날 죽어서 발견된다. 소녀가 죽지 않을 수 있던 수 많은 가지 수 중에 하나가 제니였으나, 제니가 소녀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제니는 자신이 미쳐 도와주지 못했던 그 한가지만 나눠갖고 조용히 아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그 병원에는 불빛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건물에 깃든 불빛은 사람의 기척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 제니는 몰랐지만, 그것을 알기도 전에 상황 자체를 저버린 데서 오는 죄책감이 제니의 삶을 흔든다. 제니는 커리어를 인정받아 곧 큰 병원으로의 이직을 앞두고 있었다.
제니는 소녀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A가 아니라고 B를 비껴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닌데, 흔히 혼동한다. 두 가지는 다른 무게로 사람의 윤리를 묻기 때문이다. 이 책임은 제니가 소녀를 위해 묘지를 사도 끝나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죽음은 가족에게 알릴 수도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다. CCTV에 잡힌 얼굴이 있고, 문을 두드렸던 손과 목소리가 있었는데 소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니. 그녀는 이직하지 않고 병원이자 사건의 현장중 하나인 그곳에 남아 소녀의 이름을 추적해간다. 제니가 불타는 정의감이 있어서, 이름 모를 소녀의 죽음에 분노해 그 죄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녀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고, 이 미완의 양식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 뿐이다. 그저, 소녀의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 이것이 제니가 가져가려고 한, 자신이 마주한 책임이었다.
제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도 과거로 돌아가 진료마감 1시간이 지난 벨소리에 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은 소녀의 '이름'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지금과 미래에 둘 수는 있다. 그리고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간절히 찾는다. 간절하다는 뜻은 마음 속에서만 애가 타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침식당하며 소녀의 구명을 위해 사는 일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소녀의 사진을 핸드폰에 갖고 다니며, 이 병원에 들리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보여주고 물어본다. 소녀의 일화를 들려준다. 소녀의 고향이 외지임을 염두해 외국으로 전화할 수 있는 센터에도 찾아가 물어본다. 제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녀를 '물어본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은 물음은 죽은 소녀가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이렇게 제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목격자도 없고, 가해자도 알 수도 없고, 신원도 알 수 없는 미상의 죽음은 이 간단한 '물음'을 통해 조금씩 밝혀진다.
제니가 의사라서, 똑똑해서 수사를 한다거나 추리를 했던 것은 아니다. 제니의 '물음'은 그 소녀를 멀리서, 가까이서 알았던 이들에게 우연히 가닿아 그들의 양심을 묻는다. 그녀는 소녀의 이름을 물어가는 행동을 통해 과연, 한 명의 유일무이한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마침내 소녀를 죽게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죄책감에 덜덜거리며 조아리는 얼굴이지만, 제니는 죄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당신의 잘못은 내가 분노하고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니의 다문 입이 말한다. 자신의 죄에 우는 고통을 역시 인간의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인가. 자살을 시도한 이를 구하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스스로 이야기 할 것'을 말한다.
지금 여기 살아 있다면, 살아있는 만큼의 아픈 몫을 가져가라는 것. '제니'는 한 사람이 가져야 할, (다른 이가 보기에 너무나 큰)죄책감과 책임을 묵묵히 가져가며, 다른이의 몫이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양심과 죄책감의 질량은 정량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혼자만 알고 숨죽여 우는 일로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소녀가 죽은 이유가 아니라, 죽은 소녀를 알려고 했던 제니의 태도는 소녀의 죽음에 연결되어 있던 몇 사람의 태도를 바꿨다. 그날, 제니가 문을 열어주었다면 어린 한 사람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녀의 죽음에 걸린 제니의 죄책감은 몇 사람을 비로소 '살게' 만들었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 소녀가 실은 제니가 물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소녀가 하는 일을 알았고, 어떤 이는 얼굴을, 어떤 이는 이름을 알았지만 자신이 소녀를 '인간적인 관계'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소녀의 죽음에 침묵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이름없이 임시 매장되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관계'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이 아주 좁고 뜻깊은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 같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 각자의 일을 하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더해져 진행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당신은 어떤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높은 확률로 당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신이 아니라, 그때 당신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다. 제니가 소녀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을 때, 제니는 자신이 계속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닿고 영화의 마지막, 제니의 소녀의 이름 찾는 일과 자신이 환자 보는 일이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두 가지 모두 삶에 필요한 자세며, 어느 한 쪽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담담히 보여준다.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오늘은 제니가 가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마땅히 갖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있는 믿음이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곳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