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가토 신로 지음, 장윤선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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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2.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가토 신로

주여,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크게 찬미받으실 만합니다.( Magnus es, Domine, et laudabilis valde,33P)

확실한 믿음의 세계

앞에 적었던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이라는 책 속의 세계는 세상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가득한 세계, 누구에게도 구원은 기대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속 세계는 정반대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한 믿음이 가득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신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기독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 <고백록>의 저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의 첫 구절부터 자신의 확실한 믿을을 과시합니다. '주여,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크게 찬미받으실 만합니다.' 라고 외치며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면서. '<고백록> 강의'를 진행하는 가토 신로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분들이 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강의를 진행합니다. 물론 그 자신도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죠. 저는 그게 너무 기이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고 당연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저 자신이 이상한 인물처럼 여겨졌거든요.^^;;

<고백록>,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과정

'<고백록> 강의'를 통해 가토 신로 교수는, <고백론>이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첫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믿음과 신앙을 열렬하게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기독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나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여성에 대한 애욕으로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으로서. 가토 신로 교수의 말을 따르자면, <고백록>의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거죠. 마치 책의 구성 자체가 '예정조화설'을 구현한 것처럼.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하고, 그 조화에 맞춰서 자신의 삶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고백한 책이 <고백록>이라는 것처럼.

구원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길과 '장소론'

가토 신로 교수의 글로 쓰여 있는 강의를 읽다보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잠깐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너무 신비하고 낯설어서, 이상한 기분마저 듭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제 삶은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속 세상의 사람들과 비슷했나 봅니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불안에 쉽게 휩싸이고, 불신의 늪이 깊은.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강한 확신과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뭘 믿고 저렇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지? 마치 신이라는 자석에서 잠시 떨어졌나갔다 다시 끌려들어가는 것과 같은 삶을 산 저 인물은, 어떻게 저렇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지금의 저로서는 그들의 믿음과 삶의 태도를 알 수 없겠죠. 앞으로 기독교와 저의 인연이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어설프게 무언가 느껴지기는 합니다. 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니까 저럴 수 있다는 식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다가 책 후반부의 '장소론' 이야기가 흥미로워집니다. 사실 기독교 신학에서 기본적으로 '장소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이니까요. 절대적이고 완벽한데 무슨 장소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가토 신로 교수는 굳이 자신만의 '장소론'을 언급합니다. 신과 만나고 대화하며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자기 내면의 장소를. 읽다 보니 이해가 됩니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능력을 가진 건 신이고, 인간은 그런 능력이 없죠.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과 달리 신과 만나는 저마다의 장소를 내면에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과 만나는 내면의 장소를 '장소론'이라는 학문적 틀에 집어놓고 이론화 하는 건, 중세철학 전공자로서 충분히 가능하고 의미가 있겠죠.

그런데, 다른 길은 없나...

책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너무 낯설고 다르고 이상하고 신비해서 재밌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읽다보니 이번에는 너무 확고하고 확실해서 다른 생각이 듭니다.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만의 세상에 있다보니 숨쉬기가 힘들다고 해야하나. 이 세계 사람들이 가진 확고한 믿음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요? 자신들의 믿음과 사고방식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건, 그 확신과 다른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저같이 낯선 세계에서 온 인간은 거기에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만큼의 확신도 없고, 다른 삶의 방식도 경험해봤으니까요. 자, 책을 덮고 다른 방식의 믿음과 연관된 책을 한번 살펴봅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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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마스다 타다노리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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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96.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그럼 당신은 뭘 했는데? 그 사람을 말리려고 했나?"

"아니요, 저는 참견 안 했습니다. 자살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요."(28)

반드시 써야 할 서평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머릿속으로 계속 어떤 글들을 써야할지 생각했습니다.(저는 책을 읽고 나면 자연적으로 머릿속으로 서평이 떠오릅니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서평을 머리속으로 계속 써왔다고 해야 하나. 그 중에서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서평은 반드시 적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으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쓰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안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마음 속 강박이 떠미는 대로, 제 머릿 속에 들어 있는 가상의 서평을 현실화시켜 보겠습니다.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


어린 시절에 저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드래곤볼>,<슬램덩크>부터 시작한 제 일본 만화 유랑은 <원피스>,<헌터헌터>,<나루토> 같은 책을 거치며 절정에 달했죠. 나이 들어 일본 만화를 예전만큼 보지 않게 되면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저는 그때 그 만화들에 빠져 살았을까요?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만화들을 즐겁게 보게 했을까요? 곰곰히 여러모로 생각해봤습니다. <원피스>로 대변되는 그 만화들이 가진 매력을. 생각 끝에 어떤 것이 떠오르더군요. 일단 기본적으로 그 만화들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에는 꿈과 희망, 사랑, 우정, 연대, 모험심, 용기 같이 저를 불타오르게 하고 긍정적인 힘으로 인도하는 감정들이 섞여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이 만화의 재미와 더불어 저를 만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게 아닐까요? 힘없는 한 십대 소년이 다른 세상을 꿈꾸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그 만화들이 저를 이끈 게 아닐까요? 여기서 제 생각은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일본 만화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모든 걸 시대와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해도, 저는 그때의 일본 만화는 그 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 고도 성장으로 선진국이 된 일본은 1980년대에 버블 경제로 성장의 끝을 찍습니다. <드래곤볼> 같은 1980년대 만화들은 그 성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마찬가지로 버블이 꺼지며 '잃어버린 경제'의 기원이 됐던 1990년대에 시작된 만화들도, 성장이 꺼졌지만 과거의 영향에서 벋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은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중산층 신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집도 가지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노년에는 연금 받고 산다는 그 신화. 1990년대 초반이나 중반까지는 그 신화가 아직 신화가 아니었죠.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니까요. 저는 <원피스> 같은 모험 만화가 일본 전후의 고도 성장과 199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고도 성장의 영향에서 태어난 만화처럼 보여집니다. 노력하면 가능했던 시대의 영향, 꿈과 희망을 품으면 어느 정도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던 시대의 영향.

시간이 흘러 저는 만화에 관심없이 2010년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게 됐죠.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 만화를 읽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인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한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 <진격의 거인>은 제가 생각하는 일본 만화와 너무 달랐습니다. 꿈과 희망은 없고, 오직 생존 또 생존밖에 없는 만화의 분위기에 놀란 것이죠. 어떻게 이런 만화가 인기를 얻을 수 있지? 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 끝에 <원피스> 때와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이 만화의 탄생과 인기도 그 시대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는. 2010년대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경제의 불황이 만성화되어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30년으로 간다는 소리가 일본내에서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도 초반의 일본 경제는, 제로 금리에 가까운 초저금리에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도, 경제 자체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태에서 저성장이 지속되는 불황의 늪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저성장, 무너져가는 중산층, 심각해지는 양극화, 사라져가는 평생 고용의 신화, 늘어만가는 임시직, 청년 취업의 어려움... 이런 일본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중산층 신화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죠.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일본인들이 과거와 같은 꿈과 희망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테고요. 당시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건 꿈과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현실에서의 생존이었습니다. <진격의 거인>과 시대의 연결점이 보이지 않나요?^^ 결국 그 시대에 인기 있는 문화 컨텐츠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만 봐도 그게 증명이 됩니다. <진격의 거인>을 읽고 떠올린 이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진격의 거인>처럼 그 시대의 삶이 반영된 문학은 없는가?'라는.


고성장 신화가 무너진 시대의 불안을 먹고 자란, 추리 소설 작가 소네 게이스케

당연히 그 시대의 삶을 반영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작가는 '소네 게이스케' 였습니다. 제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불안의 심리' 였습니다. 2000년도 후반에 출현한 이 작가는, 만성화된 저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 과거의 고성장 신화가 파괴된 시대상을 작품에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저성장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사회도 그에 따라 변화해갑니다. 자산 규모는 줄어들고, 고용의 안정성은 떨어지고, 미래의 모습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 꿈과 희망이 있을까요? 꿈과 희망이 없어진 자리는, 순간순간의 생존에 대한 욕망이 차지합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남을 신경쓸 필요가 있나요? 이타적 행위, 이상, 공공선에 대한 믿음이 뭐가 중요한가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당연히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불신은 당연한 게 되고, 불신 때문에 불안은 가중됩니다. 소네 게이스케가 그리는 소설 속 세계가 그렇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누구도 안심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건들의 세계. 그 어두움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이 이 작가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의 힘의 근원입니다. 그게 즐거울까 싶기도 하겠지만, 읽다보면 그 어두움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의 힘과 나름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을 읽다보니, 소네 게이스케 소설들이 떠오르더군요.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세계',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계'의 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물론 이 소설은 소네 게이스케의 소설과 다릅니다. 소네 게이스케 만큼의 극단성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소설은 차근차근 상황을 전개시키는 방식으로 충격의 강도를 더해나갑니다. 근데 그게 소네 게이스케 만큼의 극단성은 아닐지라도 충분치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친구들과 술마시고 나와 홧김에 외친 발언으로 자살자의 죽음을 초래한 한 평범한 가장의 비극, 대입에 실패하고 파트 타임 공장일을 하다 묻지마 범죄의 범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청년의 비극, 과거의 범죄가 저지른 삶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파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연의 우연 때문에 범죄에 연관되는 여인의 이야기가 그려진 이 소설집은 충격의 연속입니다. 마치 작은 충격들을 쌓고 쌓아 하나의 미스터리한 삶을 구성하는 느낌이랄까. 이 충격의 근원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세상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사회에 대한 이상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고 해도 '떨어지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인간간의 신뢰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파트 타임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레기, 버러지 취급을 하며 증거도 없는데 범죄자로 몰아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회라도 예외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세계에서는 그게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세계의 사건이 벌어지고 비극이 벌어집니다. 예외가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벌어지는 범죄와 비극이 이 소설의 메인테마입니다. 근데 이게 소설 속 세계만의 일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금의 우연성과 극단성을 뺀다면.

조금 다른 상상, 신이 있었다면...,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다, 갑자기 다른 상상으로 넘어갑니다. 제가 의도한 건 아니고(^^;;), 머릿속에서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한다는 건,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일 수도 있잖아? 사회에 대한 믿음의 부족, 미래의 꿈과 희망에 대한 믿음의 부족... 그런 믿을을 채워주는데 신만큼 강력한 존재가 없잖아? 기독교도도 아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긴데 ㅋㅋㅋ 웃긴만큼이나 뭔가 말도 안되는 설득력이 저한테 느껴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은 신을 믿지도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신의 영향력이 1도 없는 세계의 소설입니다. 그건 구원 없는 삶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기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집어넣어 버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저는 다른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추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이 서평을 씀으로서 속이 뻥 뚫린 기분입니다. 무언가 막힌 부분이 뚫린 느낌. 보르헤스의 단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 생각납니다. 이 서평을 쓴 게 저 단편 제목에 나오는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것처럼 느껴지네요. 끝없이 이어지는 책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무한한 서평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추신 제목에 원래 단편 제목에는 없던 '끝없이'라는 말을 덧붙여 봤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불가능하더라도 한 번 꿈은 꿔보겠습니다. 무한 서평의 꿈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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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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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7.국가-플라톤

상인 계급과 보조자 계급과 수호자 계급이 제 할 일을 함으로써 나라 안에서 제 구실을 하게 하는 능력, 이것이 정의일 것이며, 이것이 나라를 올바로 만들어주겠지?(238)

드디어 <국가>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겠다고 5년 전부터 말해왔는데(5년 전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읽고 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읽는다고, 읽는다고 말만 하고, 무시하고 놔둔 책을, 현실적으로 읽었다는 '행위' 자체가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 않고 놔두면 사라질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의 기쁨이라고 할까요? 제가 다시 고전 읽기에 몰두하면서, 인문서들을 함께 읽으면서 두꺼운 책 읽기에 익숙해진 것도 이 책 읽기에 도움이 됐습니다. 1000페이지 넘는 책부터, 900페이지,800페이지,700페이지 책들을 읽다 보니 592페이지의 <국가> 읽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얇아 보였다고 한다면 오버인가요?^^;;;;;

책을 펼쳐서 읽어나가는데, 소크라테스가 다른 이들과 대화 나누는 것부터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과거에 익숙했다가 시간이 지나서 잊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때 열심히 읽었던 플라톤의 '대화편'에 관한 기억이 제 머리속을 주마등처럼 지나쳤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국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 과자'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글을 쓰다가 위에 쓴 글들을 들여다봅니다. 너무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감정의 흐름'대로 마구 쓰는 경향이 있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글인만큼 내면에서 흘러넘치다 못해 분출하는 내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글이 써지니까요. 내적인 에너지의 흐름대로 쓰는 것만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글쓰기 방법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다시 <국가>로 돌아가봅시다. <국가>는 '대화편'답게 소크라테스와 다른 이의 대화로 시작합니다. 정의와 불의에서 시작한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특유의 산파술을 발휘하여 자신의 정의 개념을 다른 이에게 설득시키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설득에 불만을 품고 열정적인 반박을 하는 이를 다시 설득하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정의에 대한 논의는, 정의의 개념 정의를 넘어서서, 플라톤이 생각하는(<국가>에 나오는 화자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분신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정의가 현실적으로 구현된 것처럼 보이는 가상 국가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원래 <국가>라는 제목보다 더 정확한 번역어인 '정체'라는 말을 써보자면, <국가>에 나오는 가상국가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 시스템이 구현된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논의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 가상국가를 지키고 운영하는 수호자 계급의 교육은 어찌해야 하는지, 수호자 계급의 삶은 어찌해야 하는지, 그들의 미덕은 무엇이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계급의 미덕은 무엇인지. 소크라테스는 이 가상국가의 각 계급이 자신들의 미덕을 잘 간직한채 국가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 정의라 하며, 그렇게 된다면 국가가 잘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철학자들이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철인정치론'을 주장합니다. '철인정치론'을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다시 수호자 계급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성도 수호자가 될 수 있다 부터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적인 '처자공유제'도 그 이야기 중에 언급됩니다. 원래 여성을 남성보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아테네 성인 남성의 시각을 생각한다면, 여성도 수호자 계급이 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이야기겠죠.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수호자 계급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언급부터 '처자공유제' 이야기를 읽다보면 <국가>는 다시 제가 아는 플라톤의 책이 됩니다. 벗어난 만큼 되돌아가는 이 놀라운 회복탄력성이란. ㅎㅎㅎ 어찌 됐든 그 부분을 넘기면 소크라테스는 '선의 이데아'를 언급하면서 '이데아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유명한 '동굴의 우화' 가 나오죠. 동굴에서 벗어나면 수호자 계급을 구체적으로 어떤 과목으로 교육시켜야 하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분을 벗어나면 예술이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예술에 대한 비판 부분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사후 세계를 언급하며 선의 이데아를 추구하며 살면 죽어서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며 책이 끝납니다.

아마도 <국가>를 두고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의 역량상 많은 이야기를 할 능력도 안 되고, 글의 분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할께요. 이 이후로 서양 사상을 지배하게 되는 '본질주의'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국가>를 통해 이데아론을 읽고 책을 덮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현상 너머에 있는 이데아라는 본질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본질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플라톤의 <국가>도 이데아의 모방이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플라톤의 <국가>도 이데아의 모방입니다. 본인이 비판하는 예술처럼, 본인이 쓴 <국가>도 이데아의 모방인 것이죠. 다만, 플라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술은 이데아라는 본질을 외면하지만, 자신이 쓴 책은 본질로 향하게 만든다는 게 다른 점이죠. (여기에 관해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제 의도와는 다르니 넘어가겠습니다.) 이상적인 가상국가 이야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한다면, <국가>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 나오게 되는 많은 이상적인 가상국가 이야기들은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데아의 모방'이 만들어낸 무수히 많은 '모방의 모방'들. 무수히 많은 개념과 관념, 이야기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는 엄청난 침투력과 파급력을 가진 책입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하는 '밈'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국가>는 강한 밈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생각을 조금 더 해보니 뭔가 궁금해지네요. 이상적인 가상국가 이야기의 원조인 <국가> 자체가 모방이라면, 그 모방을 가능하게 한 사고는 어디에서 흘러나온 것인가요? 당연하게도 그건 플라톤의 머리겠죠. 플라톤의 머리에서 흘러나온게 <국가>라면, <국가>는 플라톤의 정신의 모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국가>가 '이데아의 모방'이자 '플라톤 뇌 속 사고의 모방'이 되는 가능성이 열린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다 읽고 나니 플라톤이 정말 뛰어난 픽션 작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밈: 고도의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의 구조가 생물학에서 다루는 유전자의 특성과 닮아 있다는 이론. 그리스어로 모방을 뜻하는 단어인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로, 리처드 도킨스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주장하였다. 사상, 종교, 이념, 관습 등의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유전자의 자기복제적 형태를 띤다고 이해하고 이들을 일종의 문화 유전자처럼 취급한 것이다. 도킨스는 문화 유전자의 전파는 뇌와 뇌 사이에서 이뤄진다고 언급한다.(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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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0-07-24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짜라투스트라님, 안녕하세요?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읽고 싶은데, 핑계 같지만 나귀와 노새의 삶이 그걸 허락치 않네요. ㅠㅠ

짜라투스트라 2020-07-24 21: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뭐 어찌어찌 읽어서.. 나중에 기회 되면 조금씩 조금씩 읽어보세요
 

북리뷰를 나름대로 써나가다 아감벤에게 막혀버렸다.

아감벤이라는 산을 넘어서는데 한번 막히고 나니 그 다음의 글들을 도저히 쓸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아감벤이든 지젝이든 바디우든 들뢰즈든,

무엇이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내 마음대로 쓰기로 했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이걸 핑계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언젠가 막힐 때까지 계속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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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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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9.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제임스 설터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440)

'제임스 설터'하면 떠오르는 건, '작가들의 작가'나 '스타일리스트'라는 단어들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들은 저 단어들로만 유추해보면 '제임스 설터'는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작가이자 유행에 휩쓸리지 자신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작가처럼 보입니다. 글이 쉽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측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실제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글이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글이 쉽게 읽히고,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토니 모리슨이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들처럼 혼란스럽고 뒤섞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존 밴빌처럼 문장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채우는 것도 아니고, 조르주 페렉처럼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엘 베케트처럼 부조리함 가득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지도 않습니다. 제임스 설터는 묵묵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써내려갑니다. 자신만의 문학적인 방식으로요.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작가 사후에, 작가의 아내가 발견한 상자에서 발견한 글들을 기반으로, 그 중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아서 출판한 책이라고 합니다. 형식은 인터뷰나 칼럼 같이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섞여 있고, 소재도 문학,군대,영화,스키,등반 같이 다양한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건, 이 책의 글들이 20세기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채 잊혀지고 스러져간 그 20세기의 삶의풍경들.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20세기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의 풍경, 체취, 실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키로 유명한 마을인 아스펜의 풍경, 20세기를 풍미했던 스키선수들의 모습과 그들의 열정,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노력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산을 오르는 20세기 등반가들, 작가가 사랑한 이사크 바벨 같은 20세기 문인들, 작가가 겪은 군대 시절의 모습, 프랑스에서의 경험들 까지, 이 책은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책을 읽는 독자들을 20세기의 향수에 취하게 만듭니다.

192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세상을 떠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20세기에서 보낸 작가는 '20세기의 인간'일 수밖에 없고, 20세기의 인간이 20세기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되살려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저한테 20세기의 풍경은 너무 인상적입니다. SNS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특정한 도구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은 21세기 보다 더 인간 냄새를 강하게 풍기면서 제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20세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니까요.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사라진 것들, 스러져간 것들을 글로 써서 남김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 또한 되살려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글이 가진 강력한 힘이자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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