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로르의 노래 민음사 세계시인선 2
로트레아몽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197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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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23-34.말도로르의 노래-로트레아몽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누가 이런 책을 읽을까?’라는. 책 안 읽는 제 주변인들은 당연히 읽지 않겠죠. 그런데 제가 나가는 독서모임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언급조차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분들은 이 책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겁니다. 그나마 온라인 공간 상에 존재하는 책 읽는 분들 중에는 간혹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수를 따져보면 많지는 않겠죠.^^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아주 소수의 행위가 됩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책을 꾸준히 읽는 분들도 다수라고 보기 힘든데, 그중에서도 소수파에 속하니까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읽는 책이니까요.

 

위의 생각은 또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쩌면 이게 특권이 아닐까. 사실 특권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이는 건 이상합니다. 보통 특권이라 하면 특권층이라고 불리는 어떤 상위 계층의 특수한 권리를 의미하죠.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하지만 이 행위를 특권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말이라는 건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권을 어떤 우월성의 표현으로 말하지 않고, 다수가 행하지 않는 소수의 행동 패턴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정의하면 제가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행위도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수는 행하지 않는, 그 다수에 속하지 않는 독서층이라는 소수 중에서도 소수가 행하는, 그 소수마저도 의지를 가져야 할 수 있는 이상한 특권 행위.

 

특권이라는 말을 붙이고 나서 제 행동을 바라보니 이상한 건 맞습니다. 이 특권에는 이득이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는 게 저한테 무슨 물질적 이득이 될까요? 물질적 이득이라는 속물적인 생각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입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남는 건 정신적인 이득인데, 이 책은 그마저도 희박합니다. 어떻게? 이 책을 읽으며 저는 고통을 느꼈으니까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고통을 느꼈을까요? 그건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을 읽으면 제가 종종 느끼는 감정에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감정이나 행위를 문학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는 악마적 낭만주의나 데카당스 문학 작품 중에서 어떤 작품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탐감이 주는 쾌감을 벗어나다 못해 더욱 더 어둠이나 수렁으로 파고듭니다. 어둠이나 수렁으로 떨어지는 이 행위들을 들여다보면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왜 저렇게 하는 거지? 왜 살인을 예술이라고 하는거지? 내가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거지? 이 생각들은 결국 이런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왜 이런 책을 읽는 것일까? 독서를 하다가 독서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면 독서 행위 자체를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어집니다. 여기서 저는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로르의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말도로르라는 가상의 화자를 내세워 세상에 대한 화자의 저주와 혐오를 노래합니다.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화자는 세상에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하고 우리가 범죄라고 부르는 행위를 하고 싶어 합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부르주아 가정의 행복을 박살내고 싶어하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식의 정상적이고 안락학 삶을 부정하려 합니다. 이 노래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게 현실의 의지를 노래하는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내면 세계 속에 구축된 어떤 환상을 노래로 옮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죠.

 

그렇다면 질문이 생길 겁니다. 왜 이런 책을 읽냐는. ...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저주와 혐오를 노래하는 시이지만, 내용과 상관없이 시의 언어로만 놓고 본다면 분명 어떤 문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미의 역사>와 대비되는 <추의 역사>를 통해서 이 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제가 말한 추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는 추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가 담겨 있죠. 보들레르를 따라서 생겨난 문학 유파들은 추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들을 짓게 되고요.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내용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준 겁니다. 아름다움은 생득적인 게 아니고, 사회화 과정과 교육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겨난 겁니다. 미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사회와 국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추함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과정은 또다른 아름다움을 알아가면서, 내면에 또하나의 아름다움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 또한 책들을 읽으며 이 과정을 거쳤고, 그 결과로서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저에게 <말도로르의 노래>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저 시의 언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진짜 아름답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거죠. 여전히 저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에 물들어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 굳이 벗어날 필요를 못 느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상의 일반적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벗어날 가능성도 포기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꾸준히 이런 책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일까’, ‘이 책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라는. 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 가능성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 아마도 이게 제가 생각하는 <말도로르의 노래>를 읽으면서 떠올린 저만의 특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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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5-0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추하고 역겨운 내용들이 가득해서 아무도 안 읽는 책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해요. ^^;;

짜라투스트라 2023-05-07 19: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진짜 딱 맞는 말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