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드뷔시 전주곡 - 휠체어 탐정의 사건 파일, <안녕, 드뷔시> 외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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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8.안녕, 드뷔시 전주곡-나카야마 시치리

'탐정 흉내라도 낼 생각이세요?'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것이 있다지. 현장에는 한걸음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 그렇지, 휠체어 탐정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47~48)

거북이 걸음으로 제가 읽은 책들을 따라잡는 서평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속도는, 제가 쓰는 서평과는 달리 엄청 앞서고 달려나가고 있지만, 글은 느릿느릿 써지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잡는 건 힘드네요.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써나가겠습니다. 일단 이 '의지의 다짐'으로 글을 시작할께요.

그 다음은 지금 쓰고 있는 리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백록, 순수이성비판, 대학, 자본론, 박학한 무지...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읽은 책들 제목입니다. 숨이 턱 막히네요.^^;; 이중에 원전은 아니고 해설서나 강의 책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이 가진 힘이 책들에 배여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읽는 게, 뇌에 무리가 가는 건 사실입니다. 뇌에 압력이 계속해서 가해지면 저도 힘들기 때문에, 한번 쉬어가는 타임으로 소설을 읽었습니다.

<안녕, 드뷔시 전주곡>은 최근 새롭게 일본에서 주목받는 스토리텔러 나카야마 시치리의 데뷔작이자, 그 자신에게 소설가로서 성공을 안겨다 준 <안녕, 드뷔시> 앞의 이야기를 다루는, 스핀오프 소설입니다. <안녕, 드뷔시> 앞의 이야기인만큼, <안녕, 드뷔시>의 주인공인 하루카의 할아버지인 고즈키 겐타로가 주인공입니다. 근데 이 인물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나이는 할아버지급이 맞는데 활동량이나 에너지는 젊은 사람을 능가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젊은 사람을 능가하는 노인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더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고즈키 겐타로가 휠체어를 타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휠체어를 탔다는 건, 행동에 제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즈키 겐타로는 휠체어를 탔다는 현실의 제약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행동을 이어나갑니다. 앉아서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을 패러디한 휠체어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부와 권력, 엄청난 에너지와 실행력, 추리력을 가진 고즈키 겐타로 앞에서 '노화'와 '휠체어'로 대변되는 장애라는 이중의 제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이중의 제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기 눈앞에 닥친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자신을 돕는 이들과 함께.

노화와 장애라는 이중의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안녕, 드뷔시>에서 고즈키 겐타로의 손녀 하루카가 겪게 될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스핀오프라는 뜻 그대로, <안녕, 드뷔시>의 주인공의 위기 극복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미리 보여주는 식으로. 소설은 그렇게 마지막 에피소드로 이어지고, 거기서 <안녕, 드뷔시>의 핵심적인 등장인물이자 나카야마 시치리의 유명한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는 미사키 요스케가 등장합니다. 요스케의 등장은 이 소설 이후에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는, <안녕, 드뷔시>에서 시작하는 피아니스트 탐정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이 시리즈는 음악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음악과 관련된 미스터리가 함께하는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에너지 넘지고 고집이 센 휠체어 탐정 고즈키 겐타로가 주축이 되는 작품입니다. 거기서 고즈키 겐타로는 <안녕, 드뷔시 전주곡>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에 따라서 사건들을 해결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흐름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아니면 둘 모두를 선택하든, 그것은 독자가 알아서 할 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엄청나게 다작을 하고 있는 스토리텔러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이 그려내는 이야기 흐름 속에 포함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을 읽는다는 건, 그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접촉한다는 말과 다름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흐름 속에 계속 접속할지 아닐지를 선택하는 것 정도일 겁니다. 저는 다행히도, 나카야마 시치리의 이야기 흐름에 계속 접속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한테 그 세계가 즐겁고 재미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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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한 무지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673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지음, 조규홍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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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7.박학한 무지-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우리의 무지가 분명해질수록 그만큼 '진리'에 보다 더 가까워진다(11)

<박학학 무지>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책들을 읽고 있는가?'. <순수이성비판1>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 읽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읽어냅니다. 자기 자신을 독려하며. 독려를 계속 하다보면 깨닫게 됩니다. 독려가 고문이라는 사실을. 무지를 감추고, 이해못한다는 고통을 겪다보면 따라오는 '독서의 무의미성'을 무마시키는 고문. 때로는 무지가 생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지가 생의 무의미성을 불러오는데, 그 모든 것들을 독려는 무시하고 독서를 강행시킵니다. 독려의 의도에 따르면, 계속 읽다보면 적응도 되고, 독서의 굳은 살이 박힌다는 거죠. 그런데 아직 저한테는 그게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읽어도 잘 적응이 안 되고 잘 안 읽히네요. 다행인 건, 읽어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가 계속되니 이 '무지의 상태'에는 익숙해진 거 같습니다. '무지의 상태'에 익숙해지니, 몰라도 읽고, 안 읽혀도 읽습니다. 읽다보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책 한 권은 일단 다 읽게 되니까요. 그걸 얼마나 이해하는지와는 별도로.

그렇다고 해서 <박학한 무지>가 <순수이성비판1>처럼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해설이 아닌, 본문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무지의 세계'로 저를 인도한 <순수이성비판1>은, 지속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책을 덮을때 쯤에는 저를 순수한 '멘탈붕괴'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분명히 다 읽었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정신이 무너져버리게 만드는 그 세계로. <박학한 무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박학한 무지>가 어려운 건, 지금은 쓰지 않는 순수한 논리적 증명이 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됨에서 비롯하는 하나 됨의 낳음은 하나 됨의 유일한 반복으로서 단 한 번(태어난) 하나 됨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두 번 혹은 세 번 혹은 그 이상 여러 번 하나 됨을 반복한 것이라면, 이미 그 하나 됨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것을 낳은 것이 될 것이다. 그로써 두 배 혹은 세 배 혹은 그 이상의 배수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 반복된 하나 됨은 '하나 됨이 하나 됨을 낳는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이해될 수 없는, 그런 하나 됨의 동등성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낳음은 분명 영원하다.'(58) 라거나 '그렇지만 먼저 있음이 영원성 안에서 [마치] 나중 있음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파악될 만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와 다른 식으로는 먼저 있음과 나중 있음이 무한한 것 및 영원한 것 안에서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성부(아버지)는 성자(아들)보다 앞서거나 성자보다 뒤에 계시지 않고, 다만 성자가 뒤에 있지 않는 차원에서 성부가 앞서 계신다. 그렇게 성부는 첫 번째 위격으로 말하되, 성자가 그로 인해 그(성부) 뒤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포한다. 하지만 마치 성부가 먼저 있음과 무관하게 첫 번째 위력인 것처럼, 그렇듯 성자 역시 나중 있음과 무관하게 두 번째 위격이요, 성령 역시 같은 형식으로 세 번째 위격인 셈이다. 이 설명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80~81)라는 말이나 글을 지금 누가 쓰겠습니까? 중세 철학의 영향이 배여 있는 15세기 유럽에서야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당대 성직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야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 시대는 이미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을 과거의 했었던 일로 여기고, 그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박학한 무지>에는, 그 사실이,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지금 너무나 중요하다는 듯이, 생명력을 가진 채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마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고전이 어려운 겁니다. 지금과 너무 다른, 과거의 삶과 지식과 생각과 사고가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요. 현재의 삶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고전에 살아 숨쉬는 과거의 삶과 지식과 생각과 사고가 낯설고 다가가기 어려우니까요.

<박학한 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 증명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읽기도 어렵고, 문장도 딱딱하기 그지없죠. 그러나 그 벽을 넘을수만 있다면 새로은 그 무언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무언가 모순적이고 이상해 보이는 이 책의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요? 제가 뭐 대단한 인물도 아니라서 명확한 무언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간 그 세계를 들여다본 인물로서 제가 본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겠네요. 제목부터 드러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와 그러한 한계가 가진 유한한 인식 때문에, 절대적 존재인 신에 대해서 아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인 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 떠드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럴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고백할 수록, 그는 신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걸 '무지의 지' 아니면 '박학만 무지'라고 할 수 있겠죠. 아는 척 하지 않고, 모르면 모를수록 알아가는 역설. 신에 대한 앎은 이런 역설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을 믿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해 아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과는 다릅니다. 신에 대해 아는 건, 내가 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해도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작해야, 그나마 아는 것에 속하고, 안다고 시작하면 무지한 것입니다. 알면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게 아는 것인 신에 대한 앎의 세계. 쿠자누스의 말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도 쿠자누스를 따라 말해보겠습니다. <박학한 무지>를 읽다보니 점점 머리가 아파지고 뇌 속이 무지해지는데, 이런 '무지의 고백'이야말로 '아는 것'일까요? 그것이 <박학한 무지>에 대한 앎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저는 어쩌면 무지를 통해 '앎'의 시작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 나니 무언가 기분이 찝찝해지는 건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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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짜 넣는 노동 북클럽 자본 시리즈 5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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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6.생명을 짜 넣는 노동-고병권

살아 있는 노동이 죽어갈 때 죽은 노동은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고 죽은 것이 삽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존재.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이라고 부릅니다.(10)

1.

글을 쓴다는 것도 '운명'과 이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글은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써지지 않고, 어떤 글은 전혀 쓸 의도가 없는데도 써지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는 말입니다. 쓰고자 노력해도 써지지 않는 것과 쓰지 않으려 했는데도 써지는 것을 과연 운명이라는 말이 아니고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저는 '운명'이라는 단어의 힘을 실감합니다. 앞에 쓰려고 했던 서평은 반드시 써야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쓰지 못해 지워버렸고, 쓸 의도가 없었고 책이미지만 덩그러니 남겨 두었던 이 책의 서평은 지금 쓰고 있는 걸 보면 진짜로 운명은 존재하나 봅니다.

이 책의 서평이 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순수이성비판1> 이후에 읽은 책들은 순서대로 써야겠다는 의지. 사실 <순수이성비판1> 이전에 읽었으나 서평을 쓰지 못했던 책들의 서평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안 써지더군요. 제가 게을러서 그런가?^^;; 게으름도 한 몫을 했겠지만, 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안 써지는 것도 사실이기에, 둘을 합치면 '안 써진다'라는 중간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안 써지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혹시라도 미래에 쓸 수 있다면, 만약 그때 그 책들의 서평이 써진다면, 그때는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써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요. 아무튼 <순수이성비판1>이 준 커다란 충격은 제 뇌를 공백 상태로 만들었고, 그 공백 상태 이후에는 안 써지더라도 반드시 써야한다는 강박이 남았습니다. 무지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여 한다는 의미에서요. 이 책도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았겠지만, 무지의 공백이 준 강박이 저로 하여금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게 만듭니다.

두번째는 제가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의 글을 보고 나서 무언가 떠올라서였습니다. 10년 넘게 다니다 떠난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들인데요, 그분들은 지금 나름의 독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읽었나 봅니다. 한분이 스터디가 끝나고 무언가 감명이 깊었는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욕구를 느껴서 계속 그 글을 쳐다보았습니. 너무 할 말이 많아서요. 욕구를 참을 수 없어 이 책의 서평이라는 형태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의 서평이냐구요? 이 책의 책표지가 바로 눈앞에 있고, 이 글을 쓰기로 했으니까요.ㅎㅎㅎㅎ

이제 본격적인 서평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앞에 잔뜩 글을 써놓고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고 하니 뭔가 이상한데요 ㅋㅋㅋㅋ,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밑에 적으려는 글이 진짜 시작이고, 그 앞에 써진 글들은 그 글을 위한 밑거름 정도이니까요. 그럼 빨리 그 글로 넘어가 볼께요.

2.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이 글을 남겼다. 그 분은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생각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읽고, 함께 공부하며 큰 감명을 받았나보다. 글 마디마디마다 그 사상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그런 사랑이 가능했던 건, 다른 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 시간을 거치며 본인의 앎과 자아가 성장했다고 걸 본인이 느끼고, 본인이 그 성장에 대해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좋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함께 했었던 시간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의 저자를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 분이 사랑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다 보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평범한 사랑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만남이 있고, 만남 뒤에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낭만화'의 과정이 있다. 저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그렇게 해서 좋다. 아니, 사실 그 사람이라서 좋다. 사랑에 빠지면 낭만화의 과정은 필연적이며,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 냉각기가 다가온다. 낭만은 사그라지고, 관계는 일상적인 삶이 된다.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미래가 결정된다. 위기를 잘 넘긴다면, 사랑은 이어질 것이고,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렇듯 사랑의 과정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위기와 그 위기를 넘어서는 관계의 힘 같은 것들도 사랑의 과정에 포함된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앞에 내가 이야기했던 분은, 내가 보기에 낭만적 사랑의 과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사랑만 하기에. 그분은 그 사상의 약점,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사상이 좋은 점만 있을 수 있겠는가.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사랑만 한다는 건, 나에게는 균형을 상실한 위태로운 걸음처럼 보인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취향의 음미가 아닌, 지적인 사상과 생각들을 대할 때는 사랑만 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맹신이나 광신의 위험성을 그분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글에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 그 분이 아직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그 사상이 가진 폭과 넓이와 깊이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사상이 나온 시대적 맥락을 자기 삶의 맥락과 일부만 연결시켰다는 말이다. 사상을 자기화했다면, 그 사상을 객관화해서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넓고 깊게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자기 시대의 삶과 폭넓게 연결했다면, 결코 좋은 말만 나올 수 없다. 좋은 말만 나온다는 건,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도 못했으며,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사상 그대로 머무른다면, 좋은 말만 해도 된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멈추어 선다면 뒤쳐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인데, 머무르기만 해서 되겠는가. 하나의 사상을 읽고 공부했다면, 그 사상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자세 아니겠는가. 굳이 청출어람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만 하는 건, 글에 사랑만 남아 있는 건, 배우는 이의 자세로 결코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함께한 이들에게 보인 글이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함께한 이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만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내 이야기가 그분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과도한 오해이고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앞으로 그분이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미래는 바뀔 수 있고, 지금의 내 생각은 헛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글만 보면, 그 분이 아직 사랑만 하고 있는 게 맞다. 그리고 사랑만 하고 있다면, 사랑만 하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충분히 나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디 그분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지 말고, 그 사상가를 폭넓게 파악해서 그 사상가를 넘어서서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하기를. 이것이 지금까지 읽고 배우며 생각해온 내 삶에서 내가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는 그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다.'

3.

써놓고 보니 마르크스 책인데, 마르크스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전혀 다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군요.^^;; 그래도 위에 글을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네요. 속이 시원해지고 싶어서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속이 시원해진다'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제 위의 글과 <생명을 짜넣는 노동>을 연결시켜서 적어보겠습니다. 위에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랑'이겠죠. 이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르크스 <자본론> 1권을 상세하고 세밀하게 해설하는 총 12권의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의 5권인 <생명을 짜넣는 노동>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자본과 사랑이 이어지느냐? 그건 '자본의속성' 및 '자본과 자본가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은 화폐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교환에서 그치고 마는 화폐에 비해, 자본은 자기 자신의 증식을 목표로 합니다. 자본을 투자해서 자본을 늘리는 무한순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늘리는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본가는 그 흐름 속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대행하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자본의 욕망을 좇아서, 자본가는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을 행합니다. 아마도 자본가는 그런 착각을 할 것입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 자기의 욕망이라고. 이걸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꿔보겠습니다. 자본가는 자본을 사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본가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자본가. 바꿔 말해도 됩니다. 자본도 자본가를 사랑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대행해주니까요. 제 생각에는 자본가가 자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자본이 자본가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욕망을 알아서 수행해주는 도구니까요. 자본주의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 사이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수행하는 실체적인 존재들인 노동자들.

4.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자본가가 자본의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실체적으로 이 욕망을 이루어내는 존재는 노동자들입니다. 원료와 재료를 합해서 상품을 만드는 존재도 노동자들이고,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바치고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이득을 선사하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을 몸으로 손으로 이루어내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사랑은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생산품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이 하는 노동 자체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기에 노동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 이중의 소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상품을 사랑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건, 노동자가 자본과 자본가 상호간의 사랑에 끼여들지 못하게 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형성해내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에 끼여들 수 없습니다. 노동자로 계속 산다면 평생 그 사랑에 끼여들 수 없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입장에서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외치는 자본가와 자본의 사랑 노래에 끼여들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랑 노래의 객체인 것입니다.

5.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동을 살펴보면, 노동자는 생명력 없는 원료들을 가공하며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이 생생히 살아 있는 상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죽은 것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노동.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마치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을 실현하고,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당연히 자본도 그 과정을 통해 생생히 살아 있게 되죠. 반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짜넣고 생명력 없는 물질들을 자본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으로 만듬으로써, 애정없이 소외된 채 죽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노동, 죽은 물질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의 탄생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자본과 자본가. 이 둘의 교차가 <생명을 짜넣는 노동>이 그려내는 모습입니다.

6.

위에 빨간색 글씨로 쓴 글을 이제 저 자신에게 돌려줄 차례입니다. 저는 아직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당연히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인물로서 마르크스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공부가 더 필요하겠죠. 공부하고 파악해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 사유할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만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겠죠. 이 때의 비판이란, 시중에 떠도는 정치적인 비판과는 결이 다를 겁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비판이니까요. 그 비판이 가능할 때 비로소 저만의 공부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겁니다. 그때까지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 하지 않고,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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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강의 - 나를 넘어서는 학문
전호근 지음 / 동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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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5.대학강의-전호근

먼저 <대학>이란 책은 다른 사람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앞서 개인의 자기 수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기 수양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통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반성하고 촉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14)

칸트의 그 막막하기 그지없는 어려운 세계를 떠나니 <대학>이라는 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네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대학>이라는 문에 적힌 글자들을 바라봅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음...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친(신)민'하며 '재지어지선'이니라.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저를 괴롭히던 알 수 없는 세계를 벗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학>의 첫 구절을 보니 너무 반갑습니다. 다시 익숙한 동네에 돌아온 기분이랄까. <대학> 첫문장이 익숙해지는 이런 날이 살다가 오기는 오는군요.^^ 책의 저자인 전호근 씨의 해석을 한번 따라가봅니다.

'<대학>의 도는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온 천하의 사람들이 최고의 선에 가서 머물게 하는 데 있다.'(25)

그래도 몇번 반복해서 읽은 글이라 거부감은 없습니다.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힌다는 명명덕이나 다른 백성들내면 안의 덕을 밝혀서 새롭게 한다는 친(신)민이나(원래 '친민'인데 주희 선생께서 신민으로 고쳤다고 하네요.^^;;) 그 원리를 천하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선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지어지선이나. 모두 내면의 밝은 덕, 책에 따르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 내면의 본성에서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로잡고 그걸 바탕으로 타인인 백성들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대학>의 이 자신만만하고 가공할 정치적 비전이 가득한 프로젝트를 보니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하지만 저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건, 이 '삼강령'이 아니라 '팔조목'의 후반부입니다. 그 유명한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구절.(뭐 <대학>의 원문은 저렇게 간단하게 쓰여 있지 않지만 너무 유명해서 간편하게 줄여서 한번 써봤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항상 의심스러웠습니다. '저게 가능해?'라면서. 유학 관련 책들을 처음에 읽을 때는 순진하게 저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제가 읽은 책들이 쌓여가면서, 믿음은 사그라들고, 믿음이 사라진 차이에는 의구심이 채워졌습니다. 나를 갈고 닦으면 가족까지는 어떻게든 다스릴 수 있다고 칩시다(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국가에도 통할까요? 스케일이 너무 다른데? 사람도 많고 땅도 너무 넓고 제도랑 시스템이 너무너무 다른데, 무작정 수신의 힘으로 국가가 잘 다스려질까요? 천하로 넘어가면 더 말이 안 나옵니다. 국가도 쉽지 않은데 천하라... 사실 저는 이게 믿음에 기반한 주술이나 마법처럼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갈고 닦으면 그 힘이 가족과 국가와 천하에까지 퍼질거야. 될지 안될지 모르는데, 된다고 믿으면 되지 않을까. 주술처럼. 마법처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매직'이라는 단어 속에 밀어놓고 지내면서, 동양철학 관련 책들을 제 자신의 머리속에 더 쌓아놓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또다른 앎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저 단어가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주술이나 마법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체계이자 믿음의 체계였습니다. 봉건제라는 정치 시스템을 살아가는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수신의 원리와 제가의 원리와 치국의 원리와 평천하의 원리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스케일의 차이가 있는 거죠.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자신들의 봉건제를 지탱하는 것이고요. 공자는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잊어버린 과거 주나라의 예법과 정신을 되살리려 했던 겁니다. 그걸 통해서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평화의 시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과거를 현재에 되살려, 현재를 새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결국,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학의 정치적 비전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과거의 잊힌 정치적 가치를 되살려서 현재를 새롭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과거를 오래된 현재로서 되살려내기. 현재를 새로운 과거로서 되살려내기. 그리고 오래된 미래로서의 삶의 조직화. 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유학의 정치적 비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이 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에서 말하는 유학의 가르침은 통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익숙하면서 낯설고, 낯설면서도 익숙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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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1 대우고전총서 19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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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4.순수이성비판1-칸트

칸트의 철학은 계몽철학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러나 정점은 오르막의 끝이자 내리막의 시작이다. 계몽철학으로서 칸트의 철학은 모든 진리의 본부를 인간 이성에 두지만, 그 이성은 자기비판을 통하여 한계에 자각한 이성이다.

"계몽의 시대"는 "진정한 비판의 시대요, 모든 것은 비판에 부쳐져야 한다."(AXI) "이성은 오직, 그의 자유롭고 공명한 검토를 견뎌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꾸밈없는 존경을 허용한다."(AXI) 이것이 진실인진대, 이성은 응당 자기 자신부터 비판할 일이다. 이성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선행적 비판이 없이"(BXXXV) 하는 일은 무엇이나 그 자체가 교조적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에 칸트의 계몽철학은 이성비판에서부터 발걸음을 내딛는다.(19)

2020년 8월 7일. 오늘은 한번도 나간 적 없는 독서모임에 마음먹고 처음으로 나갔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여러 이야기를 어찌어찌 나누고, 제가 사는 동네 근처에 사시는 분과 같이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가면서 저는 <순수이성비판1>을 읽고 들었던 생각을 그 분에게 토로했습니다.^^;;;;;

솔직히 10프로도 이해 못했다.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해서 멍하니 있었다. 이게 책을 읽은 게 맞나?

저는 거기에 덧붙여서 말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이런 책을 왜 있는지 후회와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이해 안 되는 책을 다 읽는다고 붙잡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이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읽을 수 없는 단어 덩어리와 문자 덩어리로 나 자신의 정신과 두뇌를 학대하는 변태.

제 말은 또 이어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학대하고 회의감을 무수히 느끼는 결과로 <순수이성비판1>이라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고통 없이는 결실도 없는 법. 이해 안 되면 읽고 또 읽으면 되는 게 아닐까? 일단은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련다. 내가 책에 주는 별점 다섯 개도 책이 재미있어서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특해서 나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치고 주었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에게 '읽음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고전 읽기를 이어나간다면,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간신히 읽는 독서가 종종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하여 내 마음을 다잡아야 겠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는 읽을 수 없을테니까.

각오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하고 보니 이게 너무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발을 내딛었으니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요.

추신.

위에 이해 안되니까 계속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말은 했지만, 지금 심정으로 글쎄, 다시 읽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ㅎㅎ 너무 이해를 못해서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맞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뭐, 언젠가 기회되면 다시 읽는 걸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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