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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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9.다이너마이트 니체-고병권

1.

나는 왜 니체에게 끌리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책의 갈피갈피마다 새겨진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지속했는데, 글 속에서 해답이 보였다. 답은 문학이라는 두 글자에 있었다. 나에게 니체는 문학적인 철학자, 철학적인 문필가 느낌이었다. 사상도 사상이지만, 니체 글의 매력이 나로 하여금 니체에게 끌리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묘한 매력이.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니체 철학에 입문시킨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고병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고병권을 거친 니체에게 끌렸다는 말인데, 내가 진짜로 끌린 건 누구지? 고병권이 해석한 니체? 아니면 고병권화한 글을 뚫고 나온 진짜 니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두통 끝에 나는 결론에 도달했다. 뭐가 됐든 니체를 좋아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2.

고병권의 <선악의 저편> 강독록인 이 책은 미래에 다가올 철학자를 기다리는 삶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니체가 제시한 그 삶의 모습은, 미래에 다가올 철학자를 기다리면서, 기다리는 본인 자신이 미래의 철학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기다리면서 기다리는 사람 스스로가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능동적인 과정으로서의 삶. 거기서 중요한 건 응축이다. 깊고 깊게 응축할 수록 나중에 폭발할 파괴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고병권은 그걸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미래에 자신의 삶을 깨부수고 해체하면서 미래의 철학자가 되는 삶의 힘을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로 표현하면서, 그것의 강력함과 폭발력을 고병권은 잘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다이너마이트로 깨부수는 건, 니체가 표현하는 현대의 문제적인 삶이다. 니체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가, 다수의 무리도덕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표현하고 있다. 니체는 다수가 추구하고 바라는 평균적인 삶의 모습에 모두를 끼워 맞추면서 무언가 뛰어나고 특출난 것을 경계하고 억압하면서 그걸 '도덕'으로 포장하는 현대인들을 비판한다. 뛰어나고 특출나고 독특한 것이 비도덕적이고 문제적인 것으로 되는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평균의 굴레에 갉힌 채 불안과 허무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면서. 그러면서 그가 내세우는 인물이 미래의 철학자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현대인들의 무리도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현대인들의 무리도덕과 다른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서 그는 새로운 위계질서를 만든다.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위계질서로 무장한 그는 현대인들의 무리도덕을 뒤집으면서, 노예의 도덕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삶을 새롭게 만든다. 고병권은 그걸 말하며, 미래의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들도 미래의 철학자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선악의 저편>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미래의 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미래의 철학자가 될 가능성은 자기 자신안에 있다. 미래의 철학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지금과 다른, 변화한 미래의 나가 미래의 철학자인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를 기다린다는 건, 내가 나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기다리며 다른 나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리는 책. 그게 고병권이 말하는 <선악의 저편>이다.

3.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고병권의 해석이다. 해석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의 방향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 방향에 끌리고 매력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고, 이 책에서 말하는 니체가 좋다. 이 책의 문장이 좋고, 책에 담긴 니체의 글이 좋다. 그게 니체든, 고병권이든, 고병권화한 니체든. 나는 다 좋다. 좋기 때문에 믿는다. 언젠가 내가, 니체가 말하는, 니체의 글을 빌려 고병권이 말하는, 다이너마이트로 내 삶을 깨부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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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6 - 법률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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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8.법률-플라톤

<국가>가 플라톤식 이상 국가의 모델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였다면,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으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법률>은 그 모델화된 이상 국가를 어떻게 현실화 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당연하게도, 현실화 과정이기에 이상은 현실에 맞게 수정되었고, 훨씬 데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죄를 지을 때 형량은 얼마이고 벌금은 얼마이고 같은 식으로. 하지만 읽다 보니 엘리트 중심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며, 반란이나 저항,비판을 거부하며 개인보다는 전체를, 현상이나 상황보다는 진리를 개인보다는 전체를, 현상이나 상황보다는 진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역시 <법률>도 어쩔 수 없이 고대의 한계에 갇힌 책임을 실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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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너무 멀어졌다... 이제는 글을 쓰겠다는 욕망마저 사라졌다...

그래도 읽고 아무것도 너무 아까워서 작은 글이라도 조금씩 꾸준히 남기는 방식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근데... 과연 잘 될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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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위대함 교부문헌총서 28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역주 / 분도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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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0.영혼의 위대함-아우구스티누스

'내가 보기에 영혼이란 신체를 다스르기에 적합한, 이성을 갖춘 어떤 실체일세.'(105)

쓸데없는 말.

제가 분도출판사의 책을 읽을 날이 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기독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에 큰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중세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기독교 관련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분도출판사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더군요. 앞으로도 중세철학 관련 책을 계속 읽게 된다면, 분도출판사의 책들을 종종 읽게 될 거 같습니다. 이게 좋은 일인지 좋은 일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저 눈앞에 닥친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영혼.

어느 순간인가 저는 영혼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제 주변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고 교회나 성당에 다닌다면, 그래도 많이 들을 수 있었을텐데. 제가 기독교인도 아니고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제 주변에 교회나 성당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영혼이라는 말을 쓰는 이가 거의 없거든요. 분명히 사전에는 존재하는데 제 주변에서 들을 수 없고, 저 자신도 쓰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단어는 저한테 '사어'처럼 느껴집니다. 존재하지만 죽은 단어. 사전에만 존재하고 생명력 없이 사전에 박제된 단어. 영혼은 저한테 그런 단어입니다.

이상한 경험.

영혼이라는 단어가 저한테 분명히 죽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영혼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 기분이 묘합니다. 저한테는 생명력이 없고 죽은 단어인데, 중세철학을 다룬 책에서는 생생히 살아 있는 단어로 나와서. 이게 참 이상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고 저도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제가 읽는 책에서는 생생히 살아 숨쉬며 계속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니까요. 현실의 존재감 없음과 책 속의 생명력이 보여주는 괴리감. 이걸 이상한 경험이 아니라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책.

현실에서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이든 아니든, 현실과 책의 괴리감을 느끼든 아니든, 저는 제 자유의지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영혼론 삼부작 중의 하나로, <독백>과 <영혼불멸>에 이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구성은 영혼론 삼부작의 다룬 두 편과 마찬가지로, 대화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인 에보디우스가 대화의 상대방으로 나오고, 대화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보디우스를 깨우치며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켜나갑니다. 뭐가 떠오르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도 당연히 떠오르고요.

영혼의 위대함.

책은 '영혼이 얼마나 큰가요?'라는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영혼의 크기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서 시작한 둘의 대화는 영혼이 물질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영혼을 물질로 파악하려는 유물론적 시각을 논파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비물질적 실체라고 주장합니다. 자, 비물질적 실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이 말을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비물질적 실체라는 말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이지만 실체가 있다는 말이겠죠. 물질이 아닌 비물질인데 실체가 있다라... 그게 무슨 말이죠?^^;; 현대를 살아가는 저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영육이원론이 일반화된 중세인들은 이 말을 잘 이해할 겁니다. 중세인들의 세계관에서는 형이하의 세계에 속하는 물질과 형이상의 세계에 속하는 정신은 구분됩니다. 물질의 세계는 의미 없고 실체 없는 것들이 가득한 평범한 감각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신이 창조하긴 했지만 신과의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반대로 형이상의 세계에 속하는 정신과 영혼은, 그 자체로 물질의 세계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물질보다 신에게로 향하는 길에서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영혼은 위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육체를 다스리는 것으로,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같은 물질이 아니지만,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비물질적인 실체입니다. 영혼은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이성을 가지고 신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신을 믿고 사랑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신이 창조한 세계의 진리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힘과 능력을 지닌, 이성이 위대하지 않다면 뭐가 위대하겠습니까? 중세철학의 큰 틀을 형성하는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위대함> 같은 책으로 중세인들의 시각을 대표하면서 그것을 더욱 더 강화해나갑니다.

글을 마치며.

현대인인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관념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중세철학 책들은 현대인인 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중요하지 않고, 정신이 더 중요하며, 영혼은 더욱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어쩌면 제가 중세철학 책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낯설어서 일 것입니다. 너무 낯설어서 매력적이라는 말이죠. 제 독서의 흐름이 고대철학을 거쳐 중세철학에 머무르는 한, 이 낯선 매력을 마음껏 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낯선만큼 무언가 다른 가르침과 의미를 주는 것이 있겠죠. 그걸 믿으며 두려움없이 중세철학의 숲 속으로 다시 떠나보겠습니다. <영혼의 위대함>을 읽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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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지진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8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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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9.사상적 지진-가라타니 고진

'한신의 지진에서 내가 감지한 것은 탈구축이라기 보다는 파괴가 더 근저적인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건축은 무엇보다 자연에 의한 파괴에 대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좀 더 말하자면, 저는 형이상학의 탈구축보다도 그 비판적 재구축, 체계적인 건축을 지향해야 한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새로이 칸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15)

<사상적 지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 번째 강연집입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했던 강연 중에서, 중요하고 남겨둘만하다고 여겨진 강연들을 기록하고 모은 책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1995년이라는 해입니다.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의 사린 가스 지하철 테러 사건이 있었던 해. 무라카미 하루키도 1995년에 있었던 오움진리교 사건에 충격을 받아 <언더그라운드>라는 논픽션을 짓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상을 탐구했죠. 가라타니 고진도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 사건의 영향으로, 자신의 사상에 지진을 겪고 사상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변화냐면, 바로 문학평론가에서 철학자로의 변화입니다.

사실 책을 보면 1990년대 초부터 가라타니 고진은,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문학, 특히 문학 중에서 소설의 쇠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걸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진행이 되지 않기에 조금 더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주의가 탄생하고, 근대적 국가가 민족주의에 힘입어 유럽에서 탄생하던 시절부터, 문학, 특히 문학 중에서 소설은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에서 보듯이, 근대 국가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중심이 됐던 것이 언어입니다. 지역마다 정서가 다르고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 상황에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던 것이 '표준어'로 불리는 '언어의 통일'이었던 것입니다. 표준어로 쓰여진 문학들이 근대 국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소설이 가장 큰 역할을 했죠. 하나의 서사를 통해 정서적 연대를 쉽게 이끌어내는 소설은, 근대 국민 국가의 탄생에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역의 주민들을 하나로 손쉽게 묶어내는 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그 이후 소설이 중심이 된 근대 문학은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소설의 기원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에는 다양한 소설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실험적이고 독특한 양상들을 보여줬고, 대문호의 시대라 불렸던 19세기에 이르면 소설의 황금시대가 열립니다. 영국의 찰스 디킨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러시아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같은, 이름만 들어도 빛나는 소설의 거장들이 19세기에는 가득했죠. 20세기는 실험적인 모더니즘과 2차 대전 이후의 더욱 더 실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가 힘을 발휘하면서 소설의 전성기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영상 매체의 발달로 인해 소설은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문학비평가로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가라타니 고진은 그 미묘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이들이 지배하고 있던 1960년대에 문학비평가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가라타니 고진은 1980년대를 거치며 문학의 힘이 줄든다는 걸 느꼈고, 1990년대에 이르자 더 이상 문학이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을 실감합니다. 거기에 1995년의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 사건은 그의 무너져 가고 있던 사상의 궤적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이걸 책에서는 사상적 지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탈구축과 해체의 포스트모던한 문학비평 대신 새로운 사상적 구축을 통해서 자신만의 이론과 사상을 창조하며 철학자로 나아갑니다. 칸트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자신의 사상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낸 것이죠. 흥미로운 건, 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당시에 가라타니 고진이 깊이 파고든 철학자가 칸트와 마르크스 였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칸트와 그 칸트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사상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묘한 동일시가 저에게는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칸트의 사상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인물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가라타니 고진이 칸트의 사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죠. 사상적 지진을 겪고 사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위해서.

<사상적 지진>은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 전환이라는 큰 틀의 주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가라타니 고진이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주제에 관한 가라타니 고진만의 독특한 사유와 철학이 담긴 글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흥미롭고 지적인 사유의 궤적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런 글들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글들은 한 철학자의 사상적 궤적의 변화에 첨가된 작은 음악들처럼 느껴집니다. 큰 연주가 있고, 잠깐잠깐 다른 형태의 음악들이 들리는 식으로. 어찌보면 저야말로 '사상적 지진'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집착하는, 아직도 저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 인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그걸 이루어낸 사람의 사상을 들여다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미완이기에 어느 정도 사상적인 완성을 이룬 이의 지적인 궤적을 바라보는 게 재미있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이 제가 이 책에서 재미를 느낀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그 주위를 다른 행성들이 돈다는 '천동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양이 중심에 있고 그 중심을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의 변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에 빗대어 말하는 이 변화는 실로 경천동지할만한 변화입니다. 칸트는 이런 변화를 철학에서 이끌어냅니다. 중세까지 철학의 중심은 신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신이 창조한 자연과 우주를 탐구하며 신의 신비와 위험을 밝혀내기만 하면 됐죠. 여기서 신은 주체이고 인간은 객체였습니다. 하지만 중세가 무너지면 더 이상 중세와 같은 사상은 가능하지 않게 됐습니다. 니체가 말한대로, 신 중심의 사회는 무너져 갔고,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계몽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철학이 등장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칸트가 등장합니다. 칸트의 철학적 인식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 외부의 사물이나 자연은 인간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관심을 가지고 파악해야 그것이 의미가 있고 인간 삶에 관여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무언가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칸트에 이르러서야 철학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됩니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에 들지 못하는 것들은 철학적 객체가 되고요. 이 변화는 정말 큽니다. 이제 인간보다 우위에 있던 신이 창조한 자연은,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의미를 가지는 존재로 쪼그라듭니다.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쓰는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을 도구로 보고 개발하고 쓰는 근대적 인간의 출현의 기원에 칸트의 철학적 인식론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칸트가 말한 대로 칸트의 철학은 진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신에서 인간으로 철학의 주체를 변화시켰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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