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가 필요한 인생 - 일, 육아, 살림에 부대끼는 여성을 위한 일상 재정비 프로젝트
루스 수컵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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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정리가 필요한 인생-루스 수컵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지혜로운 이들에게 존경받고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거짓 친구의 배반을 견디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의 최선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건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건, 사회를 개선하건,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이다.-랠프 월도 에머슨'

'모든 TV 광고, 광고판, 잡지 속에는 우리를 조롱하고, 유혹하고, 빨아들이는 근원적인 속삭임이 있다.

집을 이렇게 꾸미고 살면, 당신은 만족할 거예요.
이 차를 몰면, 당신은 성공할 거예요.
이 화장품을 쓰면, 당신은 아름다워질 거예요.
이 옷을 입으면, 당신은 선망의 대상이 될 거예요.
이 태블릿을 쓰면, 당신의 삶이 좀 더 정돈될 거예요.
이 음식을 먹으면, 당신은 날씬해질 거예여.
이 장난감을 가지면, 아이는 만족할 거예요.
이게 바로 당신의 삶을 바꾸어줄 그것이에요.
이게 바로 당신을 채워줄 그것이에요.
...
주위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 더 예쁜 것, 더 좋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더 큰 집을 원하고, 더 좋은 차를 원하고, 신형 휴대전화를 원하고, 더 많은 액세서리와 옷과 구두와 장난감과 전자제품을 포함하여 우리를 멋진 삶으로 안내해줄 거라 믿는 모든 것을 원한다.'(20~21)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소비 사회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더 많은 물건을 사라고. 더 많은 물건을 소비하라고. 더 많은 물건을 가지라고. 그 속삭임들은 더 많은 물건을 사고, 소비하고, 가진다면 우리가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한다. 유혹에 이끌린 불쌍한 우리의 영혼은 더 많은 물건을 사고 소비하고 가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문제는 이 욕망의 수레바퀴가 끝이 없다는 점. 물건을 한 번 산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비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욕망의 무서운 점이다. 마치 소비 사회의 소비 욕망 자체가 소비의 순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한한 소비의 수레바퀴 속에서 헤매다 생을 마감한다. 영원히 만족하지 못한 채로.

이 욕망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허약한 자아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오직 소비를 통해서만 자아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소비사회의 허약한 자아가. 소비 사회의 욕망은, 우리가 오직 소비를 통해서만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더 많이 사고, 소비하고,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아가 못난 존재가 되는 듯이 강요하는 이 욕망은, 우리가 비싼 상품을 사면 우리 자신이 그 상품이 되게 만든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비싼 상품과 한번 일체가 되는 듯한 경험을 해본 이들은 계속해서 비싼 상품들을 사게 된다. 그 경험을 계속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감정의 만족을 위한 소비는 그렇게 계속된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상품을 사도 일시적인 만족 외에는 우리의 자아는 채워지지 않는다. 자아의 불안감과 허전함을 소비로는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기의 자아를 오롯이 바라보는 일이다. 왜 자아는 불만족을 느끼며 불안해할까? 왜 자아는 허전함을 느끼는 걸까? 자아를 들여다보며 자아를 진정시키다 보면 소비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내 자아와 만나고 대화하는 일이 소비보다 중요하니까.

자기자신의 자아와 만나고 대화하는 일에 있어서 정리는 큰 도움이 된다. 자신이 가진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자신의 소비 성향을 알게 되고 소비욕망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소비 욕망을 진정시키는 것에만 소비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서 정리는 충분히 도움이 된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되돌아보면, 삶에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차분히 생각할 수 있다. 여유와 차분함. 정리가 가져다주는 이 미덕들 앞에서 소비 욕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올 수만 있다면 가능한 얘기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올수만 있다면 소비의 욕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삶을 오직 소비에만 저당잡히는 저주 받은 인생과는 멀어질 것이다. 나는 <정리가 필요한 인생>을 이런 방식으로서의 실용서로 바라봤다. 그 이상의 디테일한 조언과 충고는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실용서란 오직 내가 필요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 버린 채 나는 <정리가 필요한 인생>을 소비 사회의 소비 욕망과 멀어지게 만드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되는 책으로만 이해하고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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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7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정리를 잘 하려면 먼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정리를 미루려는 나를 설득하거나 말려야 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1-27 21:29   좋아요 0 | URL
네,맞습니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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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의 하루 2017년 11월 23일 편

*'짜라의 하루 2017년 11월 23편'이라 명명된 이 글은 서평도 아니고 북리뷰도 아니다. 비평은 더더군다나 될 수 없다.(나는 비평을 할 능력이 안 된다) 나는 그저 내가 겪은 하루의 기록을 내 생각대로 솔직하게 써 볼 생각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2017년 11월 23일 전부에 걸쳐서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간에만 겪은 일들에 대한 솔직한 기록.

모 독서모임에서 짜라가 <로봇의 부상>에 뒤이어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추천한 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히틀러 얘기라는 과거 얘기를 하고 나서 이제는 미래로 눈을 돌려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을 가진 짜라는, <로봇의 부상>을 통해 미래에 다가올 수 있는 어떤 특정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로봇의 부상>이 끝나는 지점인 '기본소득'에서 시작하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통해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책을 추천했다. 짜라의 추천계획은 독서모임을 이끄는 분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1월은 짜라가 이끄는 계획대로 흘러갔다.

11월 23일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짜라는 긴장했다. 어떤 말이 오고가고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혹시라도 이 자리가 싸움과 투쟁의 자리가 되지 않을까. 그 모든 생각들을 뒤로하고 독서모임은 시작되었다. 짜라가 예상과는 달리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늦게 오신 분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짜라는 지겨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 익숙한 이야기를 또 만나게 되어 느껴지는 지겨움을.

1.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가만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하나의 선언이 이어졌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공산당 선언도 있고, 미래파 선언도 있는 것처럼, 세상에 무수한 선언이 있다. 그 무수한 선언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외치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언된다. 그것은 사실의 명명이 아니고, 현상에 대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더 나아가서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가장해서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주장'이나 '견해'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강력히 통하는 설득력을 얻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진짜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일이 불가능해야한다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담긴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진짜로 불가능하기에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일어나면 큰일이 난다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겨움을 느낀 짜라는 끼어들어 외쳤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이 분의 견해이자 주장이라고. 짜라가 계속 견해와 주장을 강조하자 당황한 그분은 자신의 전문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짜라는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계속 강조했다. 이건 견해이자 주장이라고. 다른 분이 끼어들여 따지기 시작하자 그분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것이지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고, 어떤 특정 영역에서는 지금도 가능하다고. 그 말은 자신이 처음했던 불가능하다는 말이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어떤 특정 영역에서 가능하고,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처음에 했던 불가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런 일들이 지겹다. 프로파간다를 프로파간다라고 말하며 따지는 일들이.

2.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
20세기 말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주장해왔다. 거시담론은 틀렸다고. 아~~ 이 익숙하고 익숙하고 말들을 또 들을 줄이야. 그 다음 레퍼토리는 구소련과 중국의 얘기들이겠지. 예상대로 구소련과 중국 얘기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건 '킬링필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 정도랄까. 그런데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 자체도 거시담론이라는 사실을.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는 거시담론을 펼친 그들은 거시담론 대신에 미시담론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간 다음에 광활하게 펼쳐진 거시담론의 영역을 내팽개쳐 버리고 외친다. '거시담론은 없다'고. 그 다음에는 정치적 중립이 어떻고 떠들며 가치판단을 해야하는 영역이나 상황에서도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발언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분위기가 이어진다. 다원주의가 이어지고, 이제 다름의 존재론이 나온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 다양할수록 좋다고. 짜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외치는 이 말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말들이 미시담론과 개인적 정체성에 집중할 때 광활히 펼쳐진 거시담론의 영역을 상당부분 차지하는 이들이 있다. 국가의 문제를 단일요인에 상당 부분 떠넘기는 트럼프 같은 선동가들이나 극우 집단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손쉬운 답을 제시하여 인기를 얻고 거시담론의 영역에서 큰 힘을 얻는다. 거시담론의 영역을 이들에게 상당부분 빼앗긴 정체성의 정치를 외치는 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자신들이 거시담론을 내팽개쳐 버렸다는 사실을 잊은 그들은 그제서야 정치적 공론장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은 다시 거시담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그들이 잊어버린 사실은 사람들이 거시담론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담론 못지않게 사람들은 거대하고 큰 담론과 서사를 원한다. 더 나아가서 거대하고 큰 담론은 사회에서 분명히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의 첫구절에서 말한 '별빛의 비유'처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역할을. 무조건 거시담론이 나쁘고 미시담론만 말하자거나 미시담론은 무조건 틀렸으니 거시담론만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을 적절하게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거나 틀렸다는 말처럼 극단적인 말 대신에.

여기까지 쓰고 나니 피곤하다. 그때의 지겨움이 되살아나서. 지겨움은 짜라게 글을 쓰지 말라고 강요한다. 알았다. 여기까지 쓰고 그만둬야 겠다. 확실한 건 위의 두 가지 지겨운 말에 대항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점이다. 짜라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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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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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이기주

책 속에서 글들의 숲을 자유로이 거닐 수 있었을 때는 책이, 글이, 책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소중한 것을 몰랐다. 손쉽게 책을 통해 글을 읽고, 읽은 것들을 생각하며 보낸 시간들이 언제나 내 옆에 존재할 것이라 여겼다. 최근의 책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아름다운 선물'인지 몰랐던 나는, 책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떠나가도 다시 별탈없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쉽게 책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 나는 심각한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책을, 글을 읽고 생각하고 싶다는 금단증상을.

사랑하는 이가 곁에서 지키고 서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사람의 소중함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책읽는 시간이 거의 없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 책을 거의 읽지 못하는 지금은 책이 그립다. 책을 쥐었을 때의 그 질감, 책을 넘기며 읽을 때의 책과 나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동감, 책이 내 뇌에 전하는 특유의 영향력, 책을 읽고 나서 얻었던 지식들과 감동의 경험들이 그립다. 영화 같은 이미지가 전하는 이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가 전해서 내 뇌에 형성시키는 문자 특유의 세계상이 그립고, 언어가 빚어내는 책 속의 세계와 나의 삶이 만나서 빚어내는 상호작용의 힘이 그립다. 저자들의 삶과 사상과 생각과 관념과 철학이 빚어내서 생겨난 책속의 생명력이 그립고, 그 영향력이 내게 전해져 변해져가는 내 모습이 그립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사실 거의 책을 읽지 못하게 되니 책을 마음대로 읽었던 시간의 모든 것이 그립다.

언어가 그립고 그리워서 누군가를 찾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언어의 온도>를 펼쳤다. 갈증이 너무 심해서 물을 한모금만 마시면 극도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통해 언어의 갈증을 잠시나마 해소했다. '말과 글에는 나름의 차가움과 따뜻함이 있다'라는 책의 표지부터 시작해서 언어를 마구 들이마시며 행복했다. 그냥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낸 부분에서는 연인에게 전화해서 말없이 '그냥 전화했다'라는 말을 계속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랑이 두 사람의 확장된 이기주의일 수 있다는 말에서는 머리를 끄덕이며 둘 만의 이기주의의 풍경들을 떠올렸다. '아름다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라고 말한 마지막 구절에서는 아직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서 내가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느꼈다.

책이 끝나고 집에 앉아서 생각해봤다. 너무 그리웠기에, 너무 갈망했기에 이 책이 좋았던 거라고. 책을 마구 평가하고 분석하는 성향의 과거 어떤 시절의 나였다면 이 책을 좋게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저 책이, 언어가, 글이 그리운 책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인간일 뿐이었다. 평가가 어떻고 분석이 어떻고 하기 전에 <언어의 온도>의 구절들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기에 나에게 이 책은 좋은 책이고 기쁨을 주는 책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처럼, 이 책은 나에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는 책이었다. 그것 외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좋았고 기뻤고 행복했다는 말 외에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 책을 읽어서 좋았고 기뻤고 행복했다는 말 외에 할 말은 없다. 그저 그뿐이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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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이라면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게 문제가 된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반면에 북플이나 알라딘 서재에서 만난 이라면 조금 생각이 다르다.

나는 그들이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들이 흔한 말,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쓴다고 해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 보다는 색다른 말, 독특한 말이 많은 글들이 좋다.

(그런 말을 하는 너도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많이 쓰면서

제가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하면서

뭔가 대단한 말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다.

흔한 말, 뻔한 말, 구태의연한 말을 하면서 뭔가 대단한 말을 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참지 못한다.

욕을 한다거나 비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글을 보기 싫어 소심한 복수를 한다.^^;;;

(복수의 내용은 공개 안하겠습니다. ㅎㅎㅎ)

 

예를 들어 전정권 때 전정권과 특정 언론들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쓰던 말들이 있다.

그때도 정치적 마녀사냥 용도 외에 왜 이런 말을 쓰지 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런 단어를 쓰며 마치 자신이 뭔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당황스러웠다.

내 눈과 그 글을 본 내 머리가 오염되는 느낌이랄까...

다시 오염되지 않기 위해 나만의 소심한 복수를 하고 난 뒤에

이렇게 소심하게 다시한번 내 생각을 적어본다.

정신적 오염은 못참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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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0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흔한 내용을 특별한 것처럼 쓰는 악습관이 있어요. 고칠려고 해도 안 고쳐져요. 제가 생각하는 ‘색다른 말‘은 다수가 공감하는 의견을 비판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북플에는 비판 의견이 ‘색다른 말‘이고, 자주 보기 어려워요.

짜라투스트라 2017-11-20 22:01   좋아요 0 | URL
아 저는 cyrus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cyrus님에게 많이 배웁니다. 이 글은 제가 지금은 글을 안보는 이들에 대해 쓴 글입니다

cyrus 2017-11-20 22:11   좋아요 2 | URL
짜라투스트라님도 그렇고, 제가 읽고 있는 이웃님들의 글은 ‘거울‘이에요. 글에 언급된 대상이 내가 아니어도 거기에 ‘나‘를 대입해요. 그러면 내 언행을 되돌아 볼 수 있어요. 독자가 글에 동화하는 것이죠. 저는 이런 글이 좋아요. ^^

짜라투스트라 2017-11-21 19: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오늘 겨우 개인책 17페이지까지 완성했다.

휴~~~ 힘들었다. 앞으로 13페이지 남았다.

어떻게든 완성해야지.

*오늘 쓴 부분은 개인의 사적인 부분이 많아 공개는 할 수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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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1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