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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짜라의 하루 2017년 11월 23일 편
*'짜라의 하루 2017년 11월 23편'이라 명명된 이 글은 서평도 아니고 북리뷰도 아니다. 비평은 더더군다나 될 수 없다.(나는 비평을 할 능력이 안 된다) 나는 그저 내가 겪은 하루의 기록을 내 생각대로 솔직하게 써 볼 생각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2017년 11월 23일 전부에 걸쳐서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간에만 겪은 일들에 대한 솔직한 기록.
모 독서모임에서 짜라가 <로봇의 부상>에 뒤이어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추천한 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히틀러 얘기라는 과거 얘기를 하고 나서 이제는 미래로 눈을 돌려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을 가진 짜라는, <로봇의 부상>을 통해 미래에 다가올 수 있는 어떤 특정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로봇의 부상>이 끝나는 지점인 '기본소득'에서 시작하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통해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얘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책을 추천했다. 짜라의 추천계획은 독서모임을 이끄는 분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1월은 짜라가 이끄는 계획대로 흘러갔다.
11월 23일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짜라는 긴장했다. 어떤 말이 오고가고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혹시라도 이 자리가 싸움과 투쟁의 자리가 되지 않을까. 그 모든 생각들을 뒤로하고 독서모임은 시작되었다. 짜라가 예상과는 달리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늦게 오신 분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짜라는 지겨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 익숙한 이야기를 또 만나게 되어 느껴지는 지겨움을.
1.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가만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하나의 선언이 이어졌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공산당 선언도 있고, 미래파 선언도 있는 것처럼, 세상에 무수한 선언이 있다. 그 무수한 선언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외치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언된다. 그것은 사실의 명명이 아니고, 현상에 대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더 나아가서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사실을 가장해서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 것은 자신의 주장이 '주장'이나 '견해'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강력히 통하는 설득력을 얻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진짜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일이 불가능해야한다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담긴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진짜로 불가능하기에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일어나면 큰일이 난다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겨움을 느낀 짜라는 끼어들어 외쳤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이 분의 견해이자 주장이라고. 짜라가 계속 견해와 주장을 강조하자 당황한 그분은 자신의 전문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짜라는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계속 강조했다. 이건 견해이자 주장이라고. 다른 분이 끼어들여 따지기 시작하자 그분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것이지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고, 어떤 특정 영역에서는 지금도 가능하다고. 그 말은 자신이 처음했던 불가능하다는 말이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어떤 특정 영역에서 가능하고, 꾸준히 계속하다 보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라면, 처음에 했던 불가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이런 일들이 지겹다. 프로파간다를 프로파간다라고 말하며 따지는 일들이.
2.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
20세기 말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주장해왔다. 거시담론은 틀렸다고. 아~~ 이 익숙하고 익숙하고 말들을 또 들을 줄이야. 그 다음 레퍼토리는 구소련과 중국의 얘기들이겠지. 예상대로 구소련과 중국 얘기가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건 '킬링필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 정도랄까. 그런데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 자체도 거시담론이라는 사실을.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는 거시담론을 펼친 그들은 거시담론 대신에 미시담론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간 다음에 광활하게 펼쳐진 거시담론의 영역을 내팽개쳐 버리고 외친다. '거시담론은 없다'고. 그 다음에는 정치적 중립이 어떻고 떠들며 가치판단을 해야하는 영역이나 상황에서도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발언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분위기가 이어진다. 다원주의가 이어지고, 이제 다름의 존재론이 나온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 다양할수록 좋다고. 짜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외치는 이 말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말들이 미시담론과 개인적 정체성에 집중할 때 광활히 펼쳐진 거시담론의 영역을 상당부분 차지하는 이들이 있다. 국가의 문제를 단일요인에 상당 부분 떠넘기는 트럼프 같은 선동가들이나 극우 집단들이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손쉬운 답을 제시하여 인기를 얻고 거시담론의 영역에서 큰 힘을 얻는다. 거시담론의 영역을 이들에게 상당부분 빼앗긴 정체성의 정치를 외치는 이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자신들이 거시담론을 내팽개쳐 버렸다는 사실을 잊은 그들은 그제서야 정치적 공론장의 영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은 다시 거시담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그들이 잊어버린 사실은 사람들이 거시담론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담론 못지않게 사람들은 거대하고 큰 담론과 서사를 원한다. 더 나아가서 거대하고 큰 담론은 사회에서 분명히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의 첫구절에서 말한 '별빛의 비유'처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역할을. 무조건 거시담론이 나쁘고 미시담론만 말하자거나 미시담론은 무조건 틀렸으니 거시담론만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거시담론과 미시담론을 적절하게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거시담론은 가능하지 않다거나 틀렸다는 말처럼 극단적인 말 대신에.
여기까지 쓰고 나니 피곤하다. 그때의 지겨움이 되살아나서. 지겨움은 짜라게 글을 쓰지 말라고 강요한다. 알았다. 여기까지 쓰고 그만둬야 겠다. 확실한 건 위의 두 가지 지겨운 말에 대항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점이다. 짜라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