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 -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
마거릿 맥밀런 지음, 권민 옮김 / 공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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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역사 사용 설명서-마거릿 맥밀런

우리는 역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역사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6)
역사는 우리가 기분 내킬 때 바라보는 과거 속에 고분고분하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역사는 이로울 수도 있고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역사란 낙엽 더미나 먼지투성이 유물 더미가 아니라, 현재에 머물면서 시나브로 우리의 제도와 사고방식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을 형성해가는, 가끔 평온하고 대개는 격동적인 웅덩이로 보아야 한다.(7)
우리는 역사를 지금 하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한 거짓말을 꾸며내거나 단 한 가지 관점만 보여주는 역사를 기록할 때 역사를 악용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신중하게 끌어낼 수도 있고 부정하게 끌어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역사에서 이해, 지지, 도움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중히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8)
역사는 인간의 가치관, 두려움, 염원, 사랑, 미움을 형성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과거의 힘을 이해하게 된다. 심지어 사람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주로 과거에서 전범을 가져온다.(20)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이룬다. 하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환경 속에서 역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물려받아 이미 존재하는 환경 속에서 이룬다.(21)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를 도우려고 과거를 불러낸다.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오늘날의 권위자들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35)
역사는 우리의 권위다. 역사는 우리의 정당성을 입증해줄 수 있고, 우리를 심판할 수 있으며, 우리와 맞서는 자들을 응징할 수 있다.(36)
과거와 현재가 서로 따로 노는 한, 과거에 대한 지식은 현재에 별 쓸모가 없다. 하지만 과거가 현재에 살아 있다고 생각해보라. 즉 현재에 둘러싸여 언뜻 보기에 현재의 모순되고 두드러진 특징 밑에 가려졌더라도 과거거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해보라. 이럴 경우 역사가와 비역사가의 관계는 능숙한 산사람과 무지한 등산객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66~67)
너무 자주 되새겨지는 기억과,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되는 기억은 정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 원래 기억 대신 들어앉아 스스로를 희생시키며 자라는 가운데 구체화되고 완벽해지고 치장된다.(73)
집단의 과거 속 주요 상징에 관한 서로 상반된 설명들과, '과거와 집단성의 관계'가 집단의 현재를 재정의하기 위해 논의되고 협의된다.(74)
이데올로기가 역사에 기대기도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수중에서 과거는 예언이 된다.(96)
역사는 민족주의를 부채질한다. 역사는 집단기억을 형성함으로써 민족의 생성에 일조한다. 민족의 위대한 업적을 함께 찬양하고 패배를 함께 슬퍼함으로써 민족을 지탱하고 육성한다.(121)
민족이란 기존의 희비록 일부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울지라도 과거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일은 사회를 성숙시키고 다른 사회와 교통할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200)
민족이란 희생자들과 미래에 양산될 희쟁자들에 대한 감정에 의해 생성된 거대한 결속이다.(122)
민족의 자아는 민족이 기억하는 만큼만, 즉 민족이 자신의 과거 경험을 하나의 자주 독립체로 결합하는 법을 아는 만큼만 존재합니다.(133)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합니다.(187)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216)
"과거를 방문하는 것은 타국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는 똑같이 돌아가기도 하고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거기서 이른바 '고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역사를 연구하여 겸손, 회의, 자기 각성밖에 배우지 못하더라도 역사 연구는 유용한 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으추측과 남들의 추측을 조사하여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다른 설명도 가능한지 캐물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이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요컨대, 내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이것이다.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되,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라.(249)


D의 주장
(앞부분 생략)
<역사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을 보니 역사를 '사용론'의 관점에서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사용론의 관점에서 말한다는 건, '역사'를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등장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서인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사용가치라는 말이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첫번째로 저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서 '역사'를 '사용론'의 관점에서 말해보겠습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화폐 얘기를 먼저 해보죠. 마르크스는 '화폐'를 그 자체로 사용가치는 없지만 교환가치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망치 같은 물건은 그 자체로 못을 박거나 건축 현장에 사용되는 공구로서 망치 자체의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사용가치가 있는 물건들과 비교하여 화폐의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화폐'가 그 자체로는 어디에서도 사용되기 힘든, 사용가치가 없는 물건이고, 다른 물건들과 교환되는 역할만 담당하는, 사용가치 없이 교환가치만 있는 물건이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화폐를 사용가치가 없고 교환가치가 있다고 정의합시다. '역사'는 반대입니다. 역사는 다른 무엇과 교환되지 않으므로 교환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 자체로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과거를 교훈이나 본보기로 삼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근대 국민 국가의 형성에서 비균질적인 한 국가의 구성원들을 균질적인 '국민'이라는 가상의 개념으로 묶기 위해 사용하는 것 같은. 교환가치는 없고 사용가치만 있기 때문에 역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역사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를 생각하다 보니 정체성과 역사의 사용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두번째 지점이 정체성과 역사가 연관되는 부분에 관련이 있습니다.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저는 인간 개개인이 자기 심리의 영역에서 좋은 부분만 인식하고 나쁜 부분을 무시하거나 없는 것처럼 한다면, 조금 더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정체성의 문제를 더 확장해서, 공동체,사회,국가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동체가,사회가,국가가 자신들의 멋지고 뛰어나고 좋은 역사만 기억하고, 잘못됐거나 실패했거나 나쁜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조금 더 건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다면서. 역사가 건강하지 않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면 악용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역사 사용설명서>를 보면 역사가 악용된 무수한 사례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세번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사의 악용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거의 대부분 '과잉된 민족주의'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위대하고 뛰어나며 잘못이나 실수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과잉된 민족주의'는 민족을 이상화, 우상화하고 한 공동체와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무수한 사건들이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수 없이 무조건적으로 위대하고 뛰어난 민족이 있을 수 있나요? 그게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요? 인간으로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게 옳은 일인가요? 여기에서 민족주의가 어떻고 그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잉된 민족주의가 이룩한 이상화,우상화는 결국 한 사회와 공동체의 현실을 그 자체로 파악하는 걸 가로막고, 그 사회와 공동체에 소속된 구성원들의 정체성의 문제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는 겁니다. 인종주의를 주장하며 소수자,약자,생각이 다른 자,인종적으로 다른 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죽인 독일 나치들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잉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것을 현실 속에서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하느냐가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 역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책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와도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책을 읽고 어떤 대답을 스스로 할지 기대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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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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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네 인생의 이야기-테드 창

그들의 언어는, 언어로서 완성된 하나의 범용 그래픽 언어라고 생각해요.(180)
너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움직이는 목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아. 너는 언제나 내 예상보다 앞서 나가 있을 거야.(188)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201)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207)
물질 우주는 완벽하게 양의적인 문법을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에 해당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212~213)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니다. 헵타포드의 의식 양태를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그들의 행위가 역사상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 또한 역사의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해내고, 연대기를 실연해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217)
헵타포드의 경우 모든 언어는 수행문이었다. 정보 전달을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대신, 그들은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 그렇다. 어떤 대화가 됐든 헵타포드들은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219)
나의 의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간 선을 따라 기어가듯이 전진하는 기다란 담뱃불이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억의 재가 뒤뿐만 아니라 앞쪽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진짜로 타오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점하면서 일별의 순간이 올 때,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 나의 의식은 시간 밖에서 타다 남은 반세기 길이의 잿불이 된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나는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다. 이것은 나의 남은 생애와 너의 모든 생애를 포함하는 기간이다.(223)

*이 글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한편인 '네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리뷰입니다.

C의 주장
(앞부분 생략)
테드 창은 설계에 뛰어난 작가입니다. 그가 소설을 쓸 때, 먼저 소설의 세계관이나 틀을 철저하게 설계를 하고 들어갑니다. 철저한 사전조서와 지식의 습득을 바탕으로 하나의 소설에 맞는 세계관과 틀을 철저하게 짜맞추고 나서, 테드 창은 그 틀에 맞게 소설을 써내려갑니다. 결국 소설은 틀에 맞춰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소설의 틀에 쓰여진,틀에 맞춰서 형성된 소설을 읽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이 소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간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근대적 시간관이란, 직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거쳐 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이 시간관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고 이야기됩니다. 거기에 더해 근대적인 사고는 과거를 거쳐 현재,미래로 이어지면 우리는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 근대적 시간관을 주입받고 젖어 지내온 우리는 이 근대적 시간관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근대적 시간관은 지극히 근대적인 사고에 불과합니다. 유럽의 중세를 바라볼까요? 농업과 기독교를 중심에 두고 있던 유럽의 중세에서 가장 중요한 건 '1년'이라는 시간입니다. 씨를 뿌려 작물이 자라게 하고 작물을 거두고 겨울을 견디는 것은 유럽 사회 경제의 핵심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은 1년의 순환에 중심을 두지 전체적인 틀로서의 시간이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늙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신의 섭리'로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수용할 뿐이었습니다. 굳이 큰 틀의 시간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죠.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헵타포드의 시간관은 근대적 시간관이나 유럽 중세의 시간관과는 다릅니다. 외계인인 이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한 번에 인식합니다. 근대적 시간관처럼 시간을 인과관계가 이어지는 선처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한꺼번에 뭉쳐져 있는 '점'처럼 인식하고 동시에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저도 그 말을 이해합니다. 우리 시대의 시간에 관한 인식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어서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본다라는 것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 자신도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본다'라는 것을 머리로는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테드 창이 열어보인 전혀 새로운 시간관에 대한 가능성의 문을 통해 잠시 그 시간관을 엿보고 가능성을 탐색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탐색하는 헵타포드의 시간관은 우리의 시간관이나 인식으로는 알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범위를 넘어서는 시간관을, 세계상을 인식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결국 우리의 인식을,시야를,세계관을 넓히게 될 것입니다. 테드 창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중심이 되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게 만듭니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인간이라는 가능성을 넘어서는 기회를 가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테드 창이 '네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시간관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그건 '신'입니다.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 없는 신이라는 존재가, 만약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인 신은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헵타포드의 시간관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신의 시간'에 가까운 시간관일 겁니다. 사실 저는 '네 인생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책 전체에 걸쳐 신의 그림자를 느낍니다. 첫 작품인 '바빌론의 탑'이 성경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옥은 신의 부재'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독교적인 부조리함의 느낌까지, 이 책은 신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어쩌면 테드 창은 신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SF소설을 통해서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테드 창의 문학세계가 어느 방식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테드 창이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며 어떤 방식의 탐구를 할지 기대가 됩니다. 어찌 되었든, 인간이 만든 소설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서 신의 세계를 엿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네 인생의 이야기'가 올해 제가 읽은 소설 중에 최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요, 인간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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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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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우리가 고아였을 때-가즈오 이시구로

늙은이가 조롱하는 건 너무 쉽지.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요, 젊은 친구. 아마도 우리는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는 걸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는지도 모르겠소.(29~30)
그 애는 일어나 앉더니 한쪽 창에 늘어진 가느다란 발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우리 아이들은 저 발의 가느다란 조각을 한데 묶어 놓은 실과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 일본의 승려가 그 애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지만 우리 아이들은 단지 한 가족을 결합시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한데 묶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발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108)
나는 너 같은 소년들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112)
아무튼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사태가 나빠져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됐으니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게 중요해. 우리를 좀 봐, 아키라.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결국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369~370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야.(370~371)
이제 세상의 실상을 알겠니? ... 네 어머니는 네가 영원히 그 마술 같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그런 세상은 산산조각 나게 마련이야. 네게 있어서 그 세상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건 기적이야.(414)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441)
책을 덮으면서 어쩌면 고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부모를 여의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 낙원을 잃은 이후 인간은 모두 고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시구로가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인 이유다.(449)

책을 덮고 난뒤에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파악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려는 저의 욕망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어떤 범주로 분류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장소설로 봐야할까? 아니면 가즈오 이시구로식 탐정소설?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소설로 할까? 고민 끝에 저 나름의 답을 내려봅니다. 이 소설은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쓸 수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고.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 팟캐스트 방송에서도 말했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기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갑니다. 근데 쓰다보니 SF가 되었다가(<너를 보내지마>), 판타지가 되었다가(<파묻힌 거인>), 역사물이 되었다가(<남아 있는 나날>), 탐정 소설이(<우리가 고아였을 때>) 됩니다. 쓰고 싶은 대로 흘러가다가 특정한 장르물이 되는 거지 자신이 장르물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은 장르물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장르물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특정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으며 장르물이라기보다는 '소설' 혹은 '문학'의 범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나직하게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을 듣다보면 그의 소설들이 장르물이지만 장르물이 아닌 오직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하게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도 추리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범죄와 연관된 듯한 주인공 부모의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즈오 이시구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동화 같은, 우화 소설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 독자를 현실인데 현실 아닌 혼란스런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안내하더니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리는 진실을 알려주며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보르헤스가 말한 세상의 혼란을 일으킨 사건을 탐정이 해결하고 다시 질서 잡힌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추리소설의 보수적인 기본공식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결국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이 감내할 것은 질서 잡힌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삶의 리사이클이 아니라, 삶의 혼란을 혼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다 무너져내리고 더 이상의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아니게 될 때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용기. 탐정이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지만, 전쟁 같은 세상의 큰 사건을 해결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과거 삶의 혼란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한다는 용기.

이건 성장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주인공이 아이나 성숙하지 못한 존재에서 어른이나 성숙한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성장소설의 틀을. 하지만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구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우화나 동화 같은 비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얻는 것이 내가 아는 나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더 이상의 예전의 세상과 삶이 아니라는, 내 불확실한 기억과 불완전한 언어와 말로 표현되는 나의 정체성이란 불확실하고 부조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우리는 시대와 삶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무력한 존재로서 무력하고 미숙한 존재이지만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지나치게 쓰디써서 가슴이 아픈 시큼한 문학적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란 누구인가'를 묻다 나가 무참히 무너져내려 나란 누구인가를 질문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다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무너져내려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삶을 묵묵히 느낄 수밖에 없게 된 어느 가상의 철학자 같은 경험. 그걸 '성숙'으로 볼 수도 있겠죠. 삶을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됐으니까요. 근데 그건 성숙이 아닌, 삶의 진실 중 하나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진실 중 하나?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말해질 수 없는 삶을 말하고 표현하기 위해 문학은 불완전한 언어와 불확실한 기억의 틀로 주조된 삶과 유사한 문학적 삶을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영국식 언어가 품격을 갖추고 펼쳐지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소설이 직접 말하는 부분과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말해지는 삶의 진실들에 귀기울이니, 삶의 서글픔에,쓰디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삶이란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것이라는. 모든 것을 말로 할 수 없고, 우리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하면서도 힘겨운지를.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삶이 슬프고 쓰디쓰더라도 우리는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진실이자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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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22 1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힘들어도 포기하지말고 살아가야 하는데 인간에게 그 의지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일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22 19:18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7-12-2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저는 이 책을 ( 나루토 그림자분신술에서 이름을 가져와봅니다) 분신 소설이라고 말이죠 . ^^

짜라투스트라 2017-12-22 21:58   좋아요 1 | URL
분신소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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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강상중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일을 그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18)
현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의 의지에 기초해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라 생각합니다.(25)
인문 지식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며, 내면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60)
원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다시 있는 그대로의 타자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사회는 본래 그러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호 자유롭게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축되었던 창조성의 문 또한 열릴 것입니다.(63)
지금은 불우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시간을 믿고 기다릴 것, 그저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열심히 살면서 그때를 기다릴 것.(96)
선택과 집중의 배후에 실은 더욱 근원적이며 쓸모없는 것을 포함한 중층적인 부분이 넓게 퍼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99)
일이 인생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개인의 긴 인생 안에 자리매김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냈으면 합니다.(124)
우리 대부분은 인류 전체에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다고, 인류 전체의 흐름에 무언가를 더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187)
인간 사회는 단순히 영리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회성을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경제 시스템 자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218)
결국 타자와 사회와의 만남은 내가 몰랐던 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4)

1독 1서평 원칙을 가지고 글을 쓰면서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뒤에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은 글을 쓰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같은 경우는 서평을 쓰려고 하는데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아 글을 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책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책의 일부분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판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그 비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저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비판의 목소리에 굴복하여 이렇게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아마도 이 편지를 일본에 계신 책의 작가분은 보지 못하겠지요. 저도 작가분이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할말이 있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원래라면 책을 쓴 저자와 독자는 독서라는 과정을 통해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독서가 끝나면 둘의 내밀한 대화는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저라는 독자는 '독서의 끝'이라는 대화의 끝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독서의 경우에는 내밀한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더군요. 머릿속에 할말이 계속 메아리쳤기 때문입니다. 할말이 있다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 대화를 끝낼 수가 없어, 이렇게 서평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써봅니다. 내 마음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 제가 할말을 해야겠네요. 사실은 책에서 읽은 이 말 때문에, 제 마음 속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습니다. '신문 읽기를 해라'는 말. 저는 책에서 나오는 책의 작가분의 말 대다수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제가 할말을 하기 위해, 책에 나온 작가의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통하지 않는, 일자리를 위시한 대다수의 것들이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한 시대에, 이 책의 작가는 사람들은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아로새기면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책의 작가는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아로새길 때 인문교양이 필요하다며, 인문교양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책과 신문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인문교양을 키우는데 책이 도움이 된다는 건 이해가 갑니다. 책을 읽으면 언어감각을 키우고, 저자와의 내밀한 대화를 지속하면서 자신만의 생각하는 법을 익히고, 삶의 거시적 비전이나 폭넓은 시야를 얻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조금 더 균형잡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니까요. 저 자신도 오래된 문자매체인 책의 힘을 경험을 통해 강력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문 얘기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네요.

물론 작가의 생각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서도 인문교양을 익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신문도 문자매체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을 익히고, 하루하루의 뉴스를 통해 그날그날 일어나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삶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가는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문의 '즉물성'입니다. '즉물성이라고?'이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즉물성' 맞습니다. 신문이라는 매체는 그때그때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는 '즉물적' 매체입니다. 칼럼이나 사설을 통해서 조금 더 거시적인 듯 보이는 글들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이나 사설들조차도 신물의 '즉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쓴 작가도 '신문은 매일 매일의 피부호흡과도 같습니다. 매일 신진대사를 하는 것이 신문만의 매력이지요.(111)' 라며 신문의 '즉물성'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제부터 제가 할말을 해보겠습니다. 신문이 즉물적 성격을 가진 매체라면, 과연 신문의 즉물설이 지금에도 과거처럼 유효한 것일까요? 먼저 속도라는 측면을 봅시다. 과거라면 신문이 뉴스 정보를 얻는데 가장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매체나 SNS나 심지어 1인 미디어까지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신문이 가장 빠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즉물성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인 속도에서 신문은 느린 매체가 됐죠. 그렇다고 신문이 큰 틀에서의 거시적인 사고를 우리에게 보여주나요? 과거의 칼럼이나 사설들을 시간이 지나서 바라보면 어처구니없거나 지나치게 즉물적이라 폭넓은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는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외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통하는 사설이나 칼럼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문 자체가 거시적인 큰 틀에서는 책에 비해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책처럼 거시적인 큰 틀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이 신문의 현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신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정쩡한 상황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데 인문교양을 쌓기 위한 매일매일의 언어적인 피부호흡을 위해 신문을 읽자는 작가의 말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작가가 말하는 언어적인 매일매일의 피부호흡의 방법으로서의 신문 읽기는 낡은 피부호흡 방법이 되어버렸습니다. 느리고, 거시적인 틀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낡은 언어적인 피부호흡 방법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요? 지금의 시대에 맞춰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꾸면 안되나요?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꾼다고 큰 잘못인가요? 신문을 읽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문을 읽고 싶은 사람은 읽으면 됩니다. 저는 신문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문이 낡고 느린 매체가 된 현실에서 지금 이 시대의 인문교양을 쌓는 방법으로서 신문읽기가 효율적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긴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책과 짧은 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신문을 통해서 미시적인 시각과 거시적인 시각의 균형을 통해 인문교양을 쌓자는 저자의 주장은, 짧은 호흡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차라리 인터넷이나 SNS의 뉴스를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신문을 압도하는 속도감을 보여주는, 인터넷과 SNS의 다양한 뉴스들을 모아놓고 바라보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바라보면서 제가 '뉴스의 성좌'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의 성좌' 바라보면 뉴스들이 어떤 시대상의 밑그림을 그린다고 여겨지니까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토대로 자기 나름의 '뉴스의 성좌'를 그려나가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더 이 시대에 맞는 인문교양을 쌓는 짧은 호흡의 방법이 아닐까요?  이게 정답은 아닐 겁니다. 다만 신문이 과거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시대에 맞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맞습니다.

작가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비판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영웅전처럼 자신이 높은 평가를 하는 인물들을 서술하는 부분은 비판할 수밖에 없더군요. 저는 자신이 생각하는 긍적적인 인물들을 얘기하며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점 없는 영웅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스티브 잡스를 말하는 부분에서 '영웅전' 같은 느낌이 특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론 소킨이 시나리오를 쓰고 대니 보일이 연출한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 잡스는 작가님이 말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스타일로 주변인들을 힘들게 만드는 지독한 인간으로 나옵니다. 스티브 잡스를 '영웅'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인물로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은 다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너무 좋은 면으로만 몰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다면적인 인간으로 보는 게 더 인문학적인 것 아닌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적어놓고 보니 비판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사실 저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책에 나오는 작가님의 의견 대부분은 동의하는데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아 미안하군요. 그러나 애정이 있으니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중간에 있는 책으로, 책에서 말하는 비즈니스 퍼슨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군요. 저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퍼슨식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정적인 말들이 튀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어떤 책을 쓰느냐에 따라서 또 저의 생각도 변하겠죠. 꾸준히 계속해서 책을 써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편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몸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음 책에서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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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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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399.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직선이나 곡선처럼, 인생이 하나의 선으로 쭉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착각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5)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
인간은 변할 수 있어. 그뿐 아니라 행복해질 수도 있지.(13~14)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3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54)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81)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A만 아니면 나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셈이지.(97)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아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105)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107)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133~134)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206)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235)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261)

B의 주장
(생략)
<미움받을 용기>의 의의를 제 나름대로 세 가지 정도로 간추려 봤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저만의 해석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첫번째로 저는 <미움받을 용기>가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는 우리는 자신의 현재의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자신의 삶으로부터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심리적인 영역에서 과거의 가치가 강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움받을 용기>는 이런 식의 프로이트적인 원인론을 비판하며 아들러의 목적론을 말하며 과거보다는 현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현재에 어떻게 해서 어떻게 바꾸어나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에 가까웠던 제 정신적인 문제를 바꾼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저도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존재이며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저 자신이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 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움받을 용기>에서 말하는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기시미 이치로식 프로이트나 아들러 해석일 뿐이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저도 그 반론에 공감합니다. 저도 이 책에 나오는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기시미 이치로식 프로이트나 아들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과거의 극단적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미움받을 용기>에서처럼 쉽게 내버릴 수 없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재를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위에서 얘기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미움받을 용기>가 한국과 일본의 동양적인 체면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심리학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라는 책을 보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심리가 다른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양의 문화와 집단과 관계를 강조하는 동양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관계와 집단을 중시하는 동양의 문화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하여금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만든다는거죠.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만드는 문화를 '체면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체면의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의식하고, 집단과 조직이 강요하는 규율을 내면율처럼 받아들일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체면의 문화'에서 유용하다면 아마도 이 부분일 것입니다. 기지미 이치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아들러는 '자유'를 중시하면서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런 류의 발언은 자기계발서들에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너 자신을 믿어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등등등. 제가 <미움받을 용기>에 더 주목하는 부분은, 자기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말들이 심리학적인 논거를 가지고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적인 '체면의 문화'에서 벗어날 방법에 심리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고, 책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저는 <미움받을 용기>가 공동체 감각을 강조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심리학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심리 문제에 개인이 강조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심리 문제를 무조건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에서 총기난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면, 그 부모의 심리 문제는 개인의 심리문제이면서 동시에 미국이라는 사회의 총기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이걸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며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바라보는 심리학의 영역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심리학이라고 하면 개인의 심리문제를 개인의 영역이나 개인을 둘러싼 관계나 환경을 토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저는 심리학이 개인을 강조한다고 말한겁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를 말할 때도 공동체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저는 <미움받을 용기>에서 이야기한 공동체 감각을 읽어나가며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습니다. 기시미 이치로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과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 다른 것 같은데, 기시미 이치로가 자기만의 공동체감각으로 말하는 게 아니냐는. 기시미 이치로식 공동체 감각은 저에게 일본식 순응주의를 연상시켰습니다. 별다른 문제 일으키지 않고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나가는 일본 문화식 공동체 의식이 아들러식 '공동체 감각'으로 포장되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사회나 공동체의 잘못을 말하고 그걸 바꾸어나가면서 사회나 공동체를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나가는 것도 공동체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이 거세되고 오직 공동체에 헌신하고 타자를 위하는 것만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 같아서요.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아들러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중요시하며 현재에서 자신의 자유를 찾을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삶을 살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되면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돕는 일을 하며,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 감각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아들러는 더 나아가더군요. 모든 생명체와 지구에까지 기여하는 삶으로. 이런 확장이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하지만 큰 이상을 설정해놓고 노력하다보면 지금보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군데군데  반박하고 비판할 부분도 많지만, 결국은 어떻게 받아들여서 내 삶에 녹여낼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이정도로 제 말을 마치려 합니다. 기지미 이치로가 자신만의 아들러 해석을 한 것처럼 시도한 저만의 <미움받을 용기> 해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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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술에 놀아나서 저도 이책이 인기라고 해서 읽긴 했는데, 말씀대로 자기계발서 느낌이어서 별 감흥이 없었어요..깊이있는 리뷰 잘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19 14:0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cardcheri 2017-12-2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굉장한 리뷰였습니다.
느낀 게 많아서 하고싶은 말이 많지만 구구절절하고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인지라 생략하고, 덕분에 구매할 마음이 생겼다는 한 문장으로 끝내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28 20:42   좋아요 0 | URL
아, 좋게 봐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