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약으로 써주세요.” 
“비싸더라도 좋은 약으로” 
“최신 약으로 써 주세요” 

“최고로 좋은 항암제를 써 주세요.”
“물론 최고로 좋은 항암제를 쓰겠지만, 효과는 써봐야 알 수있어요” 의사의 지당한 말씀이다. 
애석하게도 항암제를 써도 암은 줄지 않았다. 
“물론 당연히  더 좋은 항암제가 있겠지요 ? “    
아무리 새로운 항암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온다 한들 , 그렇게 금방이야 나오겠는가 ? 그리고 더 좋은 약을 놔두고 덜좋은  약을 먼저 사용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다른 약으로 써보지요,  아마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의사도 모른다는 얘기를,  그래도 듣기 좋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과연 좋은 약이란 무었일까 ? 

지난 10여년간 당뇨병 치료의 최강자였던 아반디어 (rosiglitazone) 이 더이상 발매되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2000년 초반 획기적인 당뇨 치료제로 전세계적인 각광을 받아서  천문학적인 매상고를 올려주다가, 2006 경 부터는 심장병을 유발 시키고, 심장발작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하여, 무수한 논란과, 재심사와,  수많은 법정 소송에 시달리고, 판매 금지와 판매 재개를 거듭하다가, 이제는 특허도 끝나고, 새로운 약도 나왔으니, 그만 판매하는 모양이다. 

과연 아반디어는 당뇨병 치료제로서, 좋은약이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심장발작으로 너무 많은 생명을 앚아간, 나쁜 약이었을까? 
아직도 수많은 법정소송이 미국에서 이루어지고있으것으로 보아 아직도 미해결과제이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있겠지만..
 
언제까지라도, 아무리 많은 조사와 판정이 나오더라도, 누구나 수긍하는 결과와 판단이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확실한것은 .. 
아반디어가 당뇨병에 걸린 누군가에게는 일시적으로는 좋은 약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당뇨병 치료하려다가, 어처구니없이 심장발작을 이르키거나, 생명을 위협한 무서운 약이 되었을 것다. 

그러나, 약을 판매한 제약사에겐, 엄청난 이득을 올려준 효자약 .. 아무리 소송비용과 배상액이 크더라도 그걸 제하고라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반디어는 어떤 사람에겐 좋은 약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는 그 반대였을 것이다. 

“항암제엔 좋은 약은 없어요, 암이 무서우니 할 수없이 않좋지만 쓰는 것이지요”
“그래도 좋은 약으로 써 주세요.” 

등이 가려우면 날카로운 손톱으로 팍팍 긁어대면 시원해진다. 
사실은 가려움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피부를 긁어서 오는 아픔땜에 가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약이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치료하는 동안 고통을 가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프랑스에서 진통제 임상시험중 건강한 청년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다섯명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럿다는 소식을 전하고있다. ( France clinical trial : One person brain-dead and five in hospital after drug testing. 16 Jan 2016, Independent) 

그래도 등이 가려우면 긁어야 하고, 아프면 약도 먹어야 하고, 암에 걸리면, 항암제도 써야 한다.
 
그러나 꽁짜는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다. 약값말고도 지불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약을 쓴 환자는 두가지로부터 회복해야 한다. 먼저 병으로부터, 그 다음에는 약으로부터.” ( The person who takes medicine must recover twice, once from the disease and once from the medicine.  William Osler MD) 
 
“더 많은 치료가 항상 더 좋은 치료를 의미하지는않는다.” 존 아브람슨 (More care doesn’t  necessarily mean better care. John Abramson MD)


의학은 자연이 병을  치료하는 동안 환자를  즐겁게 해주는 예술이다.. 볼테르 (The art of medicine consist of amusing the patients while nature cures the disease . Volt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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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세가 넘은 카터 대통령의 뇌에 까지 전이된 암이 완치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새로운 면역 암 치료제 이름이 뉴스에 나왔다고 한다. 

"무슨 약이 90세가 넘은 노인의 뇌까지 전이된 암을 치료한단 말인가 ?"
"요즘 면역 치료제는 부작용이 거의없다던데.. "

“최근 나온 면역 치료제 임상시험을 받으려고 지방에서 올라왔어요.”
라고 말하며, 신문에 난 신약이름을 – 발음하기도 어려운 약이름,  “:~~~무맙” - 을 쉽게 발음해가면서 의사를 찾아온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물으니.. 
암 환자들이 많이 모이는 인터넷 동회회에서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웬만한 의사 뺨치는, 아니 암 전문의조차 혀를 내두르게 하는 보호자가 수두룩 하다.

폐암 3기 아빠가 걱정되어 찾아온 딸은 
“폐암 3기에는 수술 성적이 더 좋은데, 왜 아빠는 수술을 안하고 항암치료를 하느냐?” 고 따지듯이 묻는다. 

수술 성적이 더 좋으면 왜 다른 치료 치료를 하겠어요.. 
그러나 수술 성적이 좋은 이유는 “ 머리좋은 학생이 어떻게 지도해도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것과도 비슷하지요”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암 치료제가 나오고 있다. 
명색이 암 전문가라고 할 지라도.. 이 모든 약의 특성을 .. 아니 이름마저도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이다. 

수년전만해도  그래도, 의학 교과서가 기준역할을 했었는데, 이젠 2-3년 마다 한번씩 개정되는 의학 교과서는 이미 치료의 기준으로서 그 기능을 다한지 오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뉴잉글랜드저널이니, 란셋이니 하는 최고 권위의 의학잡지을 신뢰하는 사람도 아직 있는 듯하지만.., 이들이 지난 10여년간 해온 여러가지를 말도안되는 일들을..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이지만..  고려하면..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기도 쉽지않다. 오죽하면, 뉴잉글랜드 저널의 전임 편집장들이 현직 편집장을 비난하는 글을 다른 의학 잡지에 기고하겠는가? 

최고 권위의 편집장들끼리의 서로 손가락질하는 논쟁을 지켜보면, 역시 이곳도 인간들의 세상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는 것이, 사실상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건거만, 새삼 확실하게 느껴진다. 

하루만, 지나도 수백개의 새로운 논문이, 아니 사실상 논문도... 이미 새소식이 아닌,   구소식인, 나오는 세상이되었다. 인젠 논문검색보다  오히려 구글에서 뉴스를 검색하는게 하는 게  더 낫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다음달이면 이것도 어떻게 변할 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인터넷이 가져온 새상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과연 믿을 수있는 정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 

과연 인테넷은 세상에 도움을 주는 가?  아니면 해악일 뿐인가 ? 

아빠를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폐암 3기 에대한 방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따님도, 막상 설명을 위해 화면에 때운 아빠의 폐 CT  사진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왜 고등학교 교과과정에는 인체 해부학이 없는 것일까? 왜 바느질과 자동차 구조는 학교에서 가르키는데, 기초의학, 인체 해보, 생리학은 안 가르키는 것일까 ? 
의학 지식을  더이상 의료인이 독점하는 시대가 지난지 않았을까 ? 
차리리 체계적으로 의학을 정규 교육 과정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 


임상 시험은 새로운 항마제로 환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인가 ? 
아니면, 
그저 제약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환자를 이용하는 것인가 ? 

난소암에 걸려 여러 임상시험 치료를 받아온  수잔 가버 교수 (인디애나 대학) 는 뉴욕 타임즈 기고에서 ,  환자들은 임상시험에 기대를 걸고 충실하게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으나, 제약사들은 임상 시험결과를 공표하는데, 인색하다고 말한다. ( Living with Cancer : A Brocken Covenant with Patients : NYTIMES Jan 15, 2016)
임상 시험을 믿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환자의 괴로움이 느껴질 듯 하다. 

인테넷의 시대에 모든 지식은 이제 손끝에 달려있으니, 누구라도 알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너무 많은 지식은, 더구나 옥석을 가릴 능력이 없는 지식은,  사실상 있으나 마나한, 혹은 없으니만도 못한,  지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지 않겠는가? 

임상시험이 너무도 많아진 지금, 임상 시험이 제약사의 이익을 위해 있는 것임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수천억을 투자하여 임상시험을 하는  제약사가 
수십억 노벨 의학상 상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그러나, 임상시험의 새로운 신약에 대한 기대,  더 낳은 치료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기도  쉽지 않다.  

문제는 , 
이 정보의 홍수와, 온갖 새로운 약제의 홍수, 인테넷 정보, 너무나 늦어버린 의학 교솨서,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한 의학 전문잡지,  제약사의 손, 아니 돈에 놀아나는 정부기관들,  사이에서,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것은, 환자와 보호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연 인테넷과 임상시험은, 악인가 선인가 ? 

이제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혼란의 시대가 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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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멍청한 것일까 ?

 

최전방 비무장 지대 철책 선을 지키는 부대의 전봇대에 붙어있는 커다란 표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경례를 생활화하자.”

 

1450 ~1750 년 사이에, 유럽 전역과 북미 지역에서 만, 35,000~100,000 명이 마녀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2000년부터 2012년 사이에 인도에서는 약 2,100 여명의 주로 여성들이 마녀로 의심 받아서 살해되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장군은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이 신뢰하는 의사를 시켜서 사혈 치료 (죽은피를 빼내는 치료법 )를 받았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더 많은 피를 뽑도록 독려하였고, 결국 다음날 과다 출혈로 숨졌다. 사혈 치료는 약 200 여 년간 최신 치료로 각광을 받았다.

 

1930 년대에 방사선이 발견된 이후, 1960 년대 까지 방사선 치료는 후두염, 기관지염을 비롯한 각종 염증 치료 뿐 아니라, 정신병 치료에도 이용되는 등 만병통치하는 치료로 각광 받았다. 이후 1970부터, 방사선 치료로 인하여 발생한 암 환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1970년 이후로 방사선 치료는 암 치료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악성 림프종 치료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던 CHOP 치료법을 개량하여 더 좋은 치료법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후로 거의 20 년간 더욱 강력한 항암제를 추가한 새로운 치료법들이 계속 개발되었다. 결과적으로 악성 림프종 치료율은 계속 상승하였다. 그러나 1993 년에 과거의 치료법이던 CHOP 치료법과 이후 개발된 강력한 치료법들을 비교한 임상 시험 결과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처음 시도된 CHOP 치료법이 부작용이 더 적고 치료효과는 이후 개발된 다른 강력한 치료법과 비슷하였다. 따라서 20 년 간 새로운 치료법 개발은 수많은 환자들만 고생시킨 셈이 되었다.

 

1971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Human Genom Project”를 통하여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여 암을 정복한다는 암과의 전쟁” ( War on Cancer ) 에 서명하였다. 이후 지난 40년간 암환자와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대체의학 암 치료의사, 곤잘레스 박사는 커피 관장과 췌장 효장 효소를 이용하여, 말기 환자 수천 명을 완치시켰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곤잘레스 치료법을 받으러 멕시코로 갔고, 그들 중에는 중피암 투병하던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도 있었다. 스티브 멕퀸은 치료 과정에서 멕시코에서 숨졌다. 1994 미국 암 협회지 (JCO) 에는 곤잘레스 치료법과 기존의 치료법을 비교한 임상 연구가 발표되었고, 곤잘레스 치료법을 받은 환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4.3 개월이었고, 항암치료법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14 개월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잘레스 치료법은 아직도 성업중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의 암과의전쟁 선포이후 매 10년주기로 미국에서는 암을 퇴치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이 발표된다고 한다.

 

2015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암으로부터 확실하게 구하겠다. ( Cures cancer once an for all) 고 장담했고, 장남을 뇌종양으로 잃은 바이든 부통령이 수장으로 암 치료를 위한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으나, 이 계획에 초청된 암 연구자들은 암은 그렇게 간단한 질병이 아닌데,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 “We had no idea what was coming !”) 뉴욕 타임즈는 바이든 부통령의 원대한 계획은 낡은 지식에 기댄 잘못된 계획이라고 꼬집었다. ‘ Moonshot’  to cure cancer, to be led by Biden, relies on outmoded view of disease (NYTIMES 12 Jan, 2016)

 

 

2016년 미국에서 발표된 음식 섭취 가이드라인에서는 1960년대부터  콜레스테롤을 올린다는 이유로  적게 먹어야 한다고 했던 계란을 이제는 많이 먹어도 된다고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채식주의자 존 맥두걸 박사는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Dr. John McDougall joins lawsuit against new ferderal dietary guideline )

 

인간의 멍청함은 우주의 무한함을 초월한다. 알버트 아인 슈타인

 

 

멍청이의 기본 법칙 5가지 

( Basic  Laws of Human Stupidity by Carlo Maria Cipolla )

 

1. 항상 언제, 어디서나 멍청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2. 멍청이 일 가능성은 그인간의 다른 인간적 특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3. 다른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  자신에게 까지 피해를 끼친다. 

4. 멍청이의 해악을 과소 평가할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멍청이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곧잘 잊어버린다. 

5. 모든 인간중에서 멍청이가 가장 위험한 인간이다.

 

 

멍청이의 제 6 법칙에 대하여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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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정황과 외신을 종합하면..

 

데이빗 보위는 3년 전 비교적 초기 간암 진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암과 용감하게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수술과 항암 치료를 비롯한 다양한 치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8 개월 전쯤에 전이가 생겼고,

 

이때 완치가 불가능 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보위는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죽음 자체는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삶에만 치열하게 집중하는 방식이다.

 

,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투병에 대한 사실을 거의 알리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죽음은 충격으로 받아드렸으며,

일부는 사기라고 까지 할 정도로..

 

대신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활동을 전혀 미루지 않았다.

불과 2 개월 전 서둘러 신곡 비디오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인사를 담았고, (Lazarus : Look up I’,m in heaven)

 

죽기 바로 이틀 전에 마지막 앨범 (Blackstar) 을 내놓았고,

역시 마지막 메시지를 담았다. ( 자신의 사진대신 검은 별)

 

삶의 마지막 순간까치 치열하게 활동하였던 반면..

 

죽음 자체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장례식도 추모식도 없음은 물론이고..

 

죽고 난 후 즉시, 친구나 가족까지도 참석하지 않은 채,

비밀 장소에서 화장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고자 하는 보위 자신의 뜻 이었다고 한다.

 

“The iconic singer told his loved ones he wanted to “go without any fuss” and not have a funeral service or public memorial“ (Mirror : 14 JAN2016)

 

 

마지막 까지 삶에 집중하고,

죽음을 철저히 무시하는 보위의 방식은,

항상 실험 정신에 충만하고, 기존질서를뛰어넘었던 보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디언 지는전하고 있다.

 

“He always did what he wanted to do, and he wanted to do it his way and to do it the best way. His death was no different from his life- a work of art. (The Gurdian , 11 Ja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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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역 곡절 끝에 “존엄사법” 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제 암 환자들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신문지상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죽음을, 죽음의 방식이든, 혹은 시기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 인가 ?

에 대한 의문도 생각할 만한 일이다.

먼저,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태어난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의 출생은, 시기와 방법 , 장소까지도 거의 완전한 선택의 결과이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선택이 아니다. 다만 태어나게되었을 뿐, 장소나,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든 그반대이든, 부모, 우월한 용모와 건강한 유전인자를 갖고 로 태어나든, 혹은 선천성 기형을 갖고 태어나든, 혹은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나든, 수학 재능이 부족하여 대입시험에서 대책없는 상황이 벌어질 애로 태어나든, 가을에 태어나든 혹은 겨울이든, 정상분만이건 제왕절개이든, 어쨋든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어떤 것 하나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에서 태어나지게 될 뿐이다.

당연히 태어나고 나서야, 밥달라고 울 수도 있고, 주는 밥을 안먹겠다고 도리질을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출생 자체는 자신의 의지도, 선택도 완벽하게 외면당한체, 그야말로, 완벽한 수동적인 행위, 혹은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나름대로 선택이 가능한 것인가 ?

우선 죽음 자체는 출생과 마찬 가지로 선택의 여지가 전혀없다. 죽음을 피할 수있는 방법은 현시점에서는 없으며, 냉동인간이나 뇌의 복사를 통한 삶은 아직 현실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인정한다면, 현실적으로 인간은 모두 죽는 다는 것은, 최소한 현재로서는 피할 수없는 정해진 숙명으로 받아드려야 할 듯하다. 즉 인간은, 말할 필요도 없이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는 방법이나 시간은 최소한 선택할 수있는가 ?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원인으로 거론되는 암과, 심장병 등은 발병 자체를 현실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렵다. 담배를 피우는사람은 폐암에 걸려 죽고, 혈압이 높으면 심장병으로 사망할 확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중에서도 폐암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고, 고혈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누가 어떤 병으로 언제쯤 사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아직은 과학과 논리,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최소한 죽음 자체는 거부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어서 선택이 불가능하고, 누구에게나 이미 선택된 일이다. 즉 죽음은 이미 주어진 상황이고, 거부할 방법이 없다.

한편 사람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이한다.

문병사회에서 노화와 질병, 비행기나 자동차 등의 사고등에 의하여 , 예기치 않게 예기치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전쟁 상황이라면, 지금도 전쟁을 하는 곳이 있다, 급작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폭탄과 총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물론 예정된 죽음도있다.

예를 든다면, 사형수라면, 사실상 예정된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예정된 죽음일라고 할 수있다. 나찌가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도 사실상 예정된 죽음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한 죽음도 있다.

이시간에도 매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이 정한 장소와 시간에 자신이 결정한 방법으로 생을 마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 오랜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이미, 지구상의 여러곳에서, 네덜란드가 2002년에 합법화한 이후로,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의 형태로,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가능하도록 하고있다. 앞으로 좋든 싫든, 안락사와 의사조력 자살은 점차 확산되는 추세이다. 안락사의 합법화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판단하기는 너무 이르다.

죽음은 미루어 질 수 있는가 ?

종합병원의, 중 환자실에는 ,  의식이 없는 상태로 수개월에서 수년간혹은 수십년까지도, 인공 영양과 의료진의 도움으로 살아있는 환자들을 보게된다. 이들 중 일부는 뇌사 혹은 식물 상태이다. 이들은 뇌의 기능 상태에 따라서, 뇌사라고 판정되기도하고, 식물 상태로 판정 받기도 한다 .

이들은 죽음이 미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있는가 ?

생물학적으로는, 혹은 법적으로는, 이들은 인위적으로 죽음의 시기를 미룬 것으로 볼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삶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소위 “ 살았어도 죽은거나 다름없는 삶”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탄생이, 비교적 명확하게, 엄마로 부터 분리된 순간, 규정되는 것과 달리,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뇌사의 경우에는 뇌의 기능이 정지된것을 기준으로 판정하기도하고, 혹은 심장의 기능 정지를 기준으로 판정하기도 한다, 물론  여러 장기중에[서 유독 뇌와 심장을 기준으로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라는 말은 없지만, “죽은 거나 다름 없다”는 말은 일상생황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결국 죽음이란 것은 절대적으로는 피할 수없는 숙명이지만, 실제로 실생활에서 쓰이는 죽음에 대한 정의 조차도, 대단히 가변적이며, 아마도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복잡해질 수록, 혹은 의학과 과학이 더 발달 할 수록, 더 죽음의 의미와 기준을 포함하여 방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죽음은 미리 예견된 것이다. 즉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숙명을 갗고 태어난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에게 죽음은 시기나 방법도 피할 수없다.
비행기사고로 죽기도 하고, 전쟁에서 총탄에 쓰러지기도 하고, 암과 질명으로 죽은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죽음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선택이 불가능하다. 


죽음을 선택 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죽음은 삶의영역 바깥이다. 즉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할 수있는 성질의것이 아니다. 인간이 직접 선택한 죽음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상당한 사회적 논란과 과오,실수를 피할 수도 없다.

통과된 존엄사법은 죽음의 시기와 방법을 선택하기 위하여 만들어지 법이 아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는 존엄사법에 따라 죽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존엄사 법에 따른다면, 본인의 명시적인 의사표시와 함께, 2인 이상의 의사와 가족이 찬성해야 존엄사가 실시될 수있다. 물론 이법에 의하여 존엄사를 시행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게는 있을 것이나, 결코 많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이 법에 의하여 시행된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한것이아니라, 사실상 매우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행위은 언제나, 예외없이 치명적인 오류를 법할 가능성이, 매우 많을 수도 있다,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선택이 불가능한 영역이고,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선택이 불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만들었을때 ,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있다고 믿어버리면, 고통스럽다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해결책이 있을 것으로 무조건 믿어버리면, 인간 의지는 무슨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느 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걱정스럽다.

죽음에 임박하여,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라면, 어떤방법으로든지 해결을 하고자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렇나 좋은 해결책이 없다고해서,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존엄사법은 존엄한 죽음을 담보하는 해결책은 전혀 아니다. 존엄사법은 지켜야 하는 법도아니고, 그렇다고 지키지못했을 때 벌을 가할 수있는 법도 아니다. 누가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존엄하게 죽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엄사법에 미덕이 있다면, 선언적인 의미이다.

이제 마냥 죽음을 억지도 미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것이 존엄사법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그냥 법적으로 혹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선언으로 받아드려져야 한다.

가을에 낙엽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할 수도없고 피해서도 안되고, 미루거나 연기할 수도, 또 연기해서도 안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간의 탄생과 마찮가지로 죽음도 선택할 수없으며, 선택할 필요도 없다.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방법, 시기, 장소도 피할 수없다고, 또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필요할 듯 하다.


달나라에 쉽게 갈 수있는 방법이 없는데도, 갈 수있을 것이라고 ,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 믿어버리면, 결국은 주술과 미신에 의지하게된다. 두렵고 어두운 세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 할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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