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검사를 할 것인가 ? 말 것인가 ?

 

월스트리트 저널- 경제 전문지 아닌가!,- 에서 흥미로운 장문의 기사를 보았다.

 

제목은 전립선 암 검사를 많이 처방하는 의사에게 징벌이 가해질 수 있다.”

 

 (Docotors could be penalized for odering prostate test. WSJ NOV 19, 2015)

 

제목대로 전립선 암 검사를 처방하는 의사에게, 벌금을 물리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선 건강 검진에 절대 빠지지 않는 전립선 암 검사 (PSA )이지만, 미국에서의 예이지만, 오히려 검사를 했다고 의사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과거 10 여 년간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인 전립선 검사의 효용성을 밝히기 위한 임상 시험에서 효과 (암 검사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 에 비하여,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작용의 예를 든다면, 위양성 (암이 아닌데 암으로 나와서 불필요하게 위험한 추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 혹은 과잉 진단 ( 그냥 뇌두어도 되는 상황에서 괜히 검사해서 아는 것이 병이다.”를 만드는 상황) 등이 있고, 추가로 검사비용과, 불필요한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 발생위험의 증가 등이 있다.

 

결론적으로,  2012년 미국 질병 예방위원회 (USPTF)는 전립선 검사를 암 검진 항목에서 제외시키기로 했으나, 여전히 환자들과-그렇다 환자들이 암 검사를 원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의사들은 수많은 전립선 암 검사를 처방하고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전립선 조직검사를 해야 하고-이거 굉장히 괴로운 검사이다-결과적으로 전립선암으로 진단되어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는다. 역시 상당히 괴로운 치료다. 부작용이 바로 남성 기능 상실 이다.

 

물론 암 검사로 환자들이 덜 죽으면,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상쇄되련만, 암으로 죽는 숫자는 거의 같으니, 환자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죽을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 죽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아직도 전립선 암 검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 밀고 당기기를 그야말로 지루하게 하는 형국이고, WSJ 같은 경제지까지도 특집 기사를 내는 것이다.

 

그런대, 어제 NY TIMES에는 여기에 대한 DR. Gilbert Welch 교수의 기고가 실렸다.

 

Welch 교수는 자신이 전립선 암 검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잉진단 : Overdiagnosis  책의 저자이자, 암 뿐 아니라, 모든 의학 분야에서 과잉 진단을 반대하는 연구자 이다. 그런대도, 그는 오히려 전립선 암 처방을 내는 의사를 처벌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다.

(Why doctors shouldn't be punished for giving Prostate Test? NYTIMES Jan 7, 2016)

 

Welch 교수는 기고문에서, 전립선 암 검사가, 치료할 필요도 없는 소위 거북이 암만 잡아내기 때문에 효과가 없으니 중단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처방을 내는 의사를 처벌하는 것은 반대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시 의학은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효과가 없다고, 혹은 위험하도고 해도, 그 위험을 알고도 환자가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의사들이 충분히 환자에게 전립선암 검사의 장단점을 설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자, 즉 상담료를 주자는 것이다.

 

전립서 선 검사를 줄기차게 반대해온 Welch 교수가,  이런 말을 하는 대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고, 일부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이 복잡한 암 검사법의 득실을 누가 이해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사 자신도 이해 못하는 것을 환자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암 검진을 포함한 예방적 치료는, 기본적으로 20세기 후반의 발명품이다. 수천 년간의 의학역사에서는 항상 병이 있는 사람을 치료해왔다. 심장병이 생기기전에 약을 주고, 암의 증상이 있기 전에 검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신 20 세기 후반 의학이다. 아직 검증이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 암 검진에 대한 수수께끼는 이해하기도, 설득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리스 허무주의 철학자 고르기우스 명제, “진실은 없다, 있다 해도 알 수 없고, 알 수 있다 해도 설명할 수 없다.”가 가장 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다.

 

전립선 암 검사 뿐 아니라, 암 검진에 대한 논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설명하기 어렵다. 누구도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생각하면, 암 검진과 예방의학은, 과학의 문제라기보다, 철학이나, 혹은 윤리의 문제, 혹은 예술의 영역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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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죽을 사람들이 가는 곳 아니냐?”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자는 의미로 웰 다잉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호스피스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학이므로,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호스피스 창시자 시실리 손더스 박사  (1918-2005)

 

 

그러나 사실 호스피스는 죽으로 가는 곳도 아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자는 웰 다잉운동도 아닙니다. 우선 어떻게 죽는 것이 존엄한 죽음인지 , 혹은 웰 다잉이 무엇인지도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 없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흔히 오랫동안 항암 치료를 받은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도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서, 가족과 친지도 없이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암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비방 약을 찾아서 재산을 낭비하고, 가족과 친지들과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도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 편안하고 존엄한 죽음이 삶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진통제를 충분히 써서 통증이 없고, 가족과 친지들이 가까이 있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임종 실에서 존엄한 임종을 맞이했다한 들, 하고 싶은 여행도 못하고, 맛있는 음식도 못 먹고, 친구와 가족과 서로 대화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웰 다잉일지는 몰라도, 호스피스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물론 호스피스가 누구나 존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나 죽음 자체가, 혹은 존엄하고 평화로운 죽음이라 해도, 죽음 자체가 호스피스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암 환자가 죽기 전에 어떻게든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을 보고 싶어서, 무리하게라도 차를 타고 보러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갑작스럽게 고통을 받으면서 가까운 가족도 없이 임종을 맞이했다고 해서. 그것은 웰 다잉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까요 ?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안중근 의사이순신 장군의 처절한 죽음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구하고, 수 십,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의 혼을 깨우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좋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인지 대해서는 너무 따질 것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이렇게 혹은 저렇게 주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유서쓰기 운동까지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떻게 죽어야 한다는 좋은 죽음의 정해진 틀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죽음은 그저 찾아오는 대로 맞이할 뿐이지, 미리 걱정하고 고려할 대상의 성질이 아닙니다. 죽음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물론 현재 웰 다잉이니 좋은 죽음을 위한 사회운동이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잘못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호스피스 운동을 웰 다잉운동으로 혼동하는 바람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호스피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오히려 존엄한 죽음자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당연히 죽고 싶지도 않지요. 누군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철부지이거나, 거짓말 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며, 호스피스 환자는 더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호스피스 정신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됩니다. 더구나 존엄한 죽음이나 혹은 죽음을 받아드릴 것을 누구에게라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유서 쓰기나, “웰 다잉등은 하고 싶은 사람은 개인적인 소망으로 해도 되겠지만, 대다수 호스피스 환자에게는 권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호스피스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론 선호가 있다면, 미리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굳이 미리 정해놓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해도 되는대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미리 정하라고 환자들에 권하거나, 가족에게 정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음에 대하여 구태여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각 개인의 생각과 각자가 지내온 삶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호스피스의 창시자인 시실리 손더스 박사의 말씀대로 삶의 방식이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지,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손더스 박사가 설림한 호스피스 기관 : St Christopher Hospice 1957  

 

호스피스 환자라고 해서 죽음을 받아드려야 한다거나, 아니면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호스피스 팀인 우리가 살아가면서 준비하고,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몫이 아닙니다. 가족의 몫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호스피스는 좋은 죽음이나 웰 다잉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호스피스는 무엇일까요 ?

 

현대의 호스피스 정신을 창시한 시실리 손더스 (Dame Cicily Sanders)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You matter to the last moment of your life, and we will do all we can not only to help you die peacefully, but also to live until you die.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이 마지막까지 살 수 있도록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호스피스는 잘 죽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까지, 잘살기 운동입니다. 의료진, 가족, 친지를 포함한 모든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모든 자원을 모으고 투자하여, 누구나에게, 가난하든 부자이든, 유명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최소한 마지막 6개월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는 , 자신의 뜻을 최대한 존중받으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호스피스입니다. 그러니 호스피스는 죽음과는 관련 없고, 오로지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하여”, 삶을 고민하는 의학이자 사회운동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가 된다면 아래 몇 가지를 유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 죽음이니, 임종이니 하는 말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주십시오.

환자나 가족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든지 하는 말조차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스피스는 웰 다잉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명심해주십시오.

 

2. 환자가 무슨 병인지, 언제까지 살 것 인지도 굳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오늘이 바로 마지막 시간이라고, “오늘, 이번 주, 이번 달을 어떻게 잘~ 살 것인지만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3. 먼 미래나 한 달 후보다 지금 이순간이 가장 소중합니다.

미래에 어떻게 하자든지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환자에게나 우리에게나 오늘,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이 가장 중요한 시간임을 항상 명심해 주십시오.

 

4. 무엇보다도 환자의 의견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주십시오.

먹고 싶은 것은 먹을 수 있도록 가고 싶은 곳은 가도록,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능력이 닿는 한 도와주십시오. 의사, 간호사, 병원 관계자의 지시나, 권유는 무시해도 됩니다. 호스피스에서는 환자의 의견만이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5. 환자가 싫어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환자를 위한 일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됩니다. 주사나, 검사, 치료도 환자가 싫어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누구라도 환자가 싫어하는 것은 누구라도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6. 환자 곁에 있어주는 것 자체가 가장 소중합니다.

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보고, 같이 웃고 같이, 울어주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고, 가장 소중한 호스피스 활동임을 명심합시다.

 

 

호스피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생각하기보다는 남아있는 생을 활기차고,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에 뜻에 따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신입니다.

 

하루를 활기차게 보내야 편안하게 잠이 오듯이, 충실하고 활기찬 인생을 살면 죽음도 편안하게 올 것입니다.

 

호스피스의 정신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음을 알고 항상 어떠한 삶을 살도록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호스피스 회 자원 봉사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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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재직 중에 적격을 당해 수술 방으로 들어가면서 의사들에게  농담을 하였다. “ 다들 공화당원이시죠?” 이것은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간적인 부탁이다. 물론 의사들은 우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답했다.

 

의사와 환자는 결코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물론 환자의 직업이 의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대통령이거나, 대기업의 회장님이라 해도, 의사와의 인간적인 관계없이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매우 불평등한 관계로 서로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어쩌면 환자는 자동차를 사는 것처럼 신중하게 의사를 선택해야 하며, 또 자동차를 운전하듯이 의사의 성질을 파악하고 신중하고 안전하게 운전 해야만,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기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몇 가지 실용적인 팁이라면 .

 

1. 의사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한다.

 

물론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 신뢰가 가야 신뢰할 수 있고, 존중이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지, 환자 자신이 의사를 신뢰하고 존중할 수 없다면, 의사도 당연히 그것을 알게 되고, 의사는 상당한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 모험을 해야 할 순간에 최선의 치료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의사가 처방하는 약 이나 검사가 치료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의학은 불확실성의 과학이자, 가능성의 예술 (Medicine is science of uncertainty and an art of probability)이다. 간단히 이렇게 하면 치료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과는 다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의사-환자간의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명한 의사라거나, TV에 자주 나온다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자신이 느끼는 인간적인 신뢰가 있어야 만 한다. 환자가 보여주는 신뢰를 바탕으로 의사는 최선을 치료를 감히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2. 너무 화려한 복장/화장은 피하라.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거나 지위가 높다고 더 잘 치료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자 착각이다. 오히려 나중에 시비를 걸어올 것에 대비하여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강력한 상대를 만나면 수비 자세를 취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위를 과시하거나, 명함을 주거나, 하는 것은 최소한 의료 행위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불필요한 긴장보다는 여유롭고 편안한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

 

3. 한번쯤은 적당한 선물을 주어라.

 

의사는 단순하다. 초보 의류 디자이너 환자가 직접 만든 상의를 선물 받았지만 너무 작아서 입을 수 없었지만, 벽에 걸어두고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한 적이 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직접 재배한 고춧가루를 한 봉지 들고 온 환자도 오래 기억된다.

 

매번 선물을 줄 필요는 없지만, 한번쯤은 자신을 기억하고 걱정하게 만들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의사는 완벽한 인간이 절대로 ,,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소위 촌지를 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변별력 없어서 환자를 기억하게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는 방어기전이 작동하게 하여, 둘 사이의관계도 별로 좋아지지 않게 된다.

 

4. 너무 자신을 내세우지 마라.

 

의사 앞에서 당당하게 나서야한다, 거나, 혹은 요구할 건 요구해야한다고 느끼는 환자도 있다. 그러나 의사 환자는 대결 구도가 아니다. 의사는 환자 편이어야 한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이런 태도를 만나면 의사는 환자 걱정보다 자기 걱정을 먼저 하게 된다. “ 아이쿠 이거 이거 조심해야 할 환자로군 라고 생각하고 대담한 치료를 포기 할 수도 있다.

 

5.자신의 숙제도 하는 우등생이 더 대접 받는다.

 

환자가 자신의 병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으면 의사도 긴장하고,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이 생긴다. 마치 공부 잘하는 학생을 바라보는 선생님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의사를 신뢰하되 자신의 숙제도 한다는 기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인터넷과 책을 보니,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 등등으로.. 다만 너무 과하여 의사와 대결 양상으로 가는 것은 .. 그런 환자도 꽤.. 물론 좋지 않다.

 

6. 인간적인 친밀감을 표시하라.

 

최근 이사했다든지.. 혹은 자녀에 대한 이야기, 혹은 자신의 직장등 사적인 대화가 최소한은 있어야 한다. 어쨌든 인간적이 관계가 되어야지, 오로지 병에 대해서만 말하는 관계는 위험하다. 유럽 의학 회에서 만난, 네덜란드 의사는, 중요한 치료 결정을 내리기전에 최소 10 분간은 인사, 즉 사적이 대화를 한다고 한다. 이런 정도는 아니어도 최소한 한 두 마디 정도라도, 환자와 의사의 병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 인간 대 인간으로써의 대화가 최소한은 필요하다.

 

7. 부탁을 들어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

 

의사는 진찰 시에 청진기를 꼭 사용해달라는 부탁을 듣고 기분 좋을 수도 있다. 혹은 자기 아들에 대 한 건강 상담 등, 무슨 부탁이라도 좋으니, 가벼운 부탁 정도는 해볼 수 있다. 들어 주고 말고가 아니라, 보다 더 인간적인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 병에만 관심 같지 말고 환자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 달라는 시그널인 샘이다.

 

8. 중요한 결정은 한 번에 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갑작스런 골절상이나 출혈 등 응급 상황아 아니라면, 서둘러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 중요한 수술이나 항암 치료 결등은 한 번에 결정하지 말고, 번거롭고 불편하다고 해도, 다음 번 진료에서 결정하도록 미루는 것도 필요하다.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한 번 더 심사하고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9. 다른 의사 찾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라.

 

암 진단이나 수술 항암 치료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다른 의사의 의견을 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병원을 찾아가고 기다리고 하는 일이 번거롭고, 물론 같은 결과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더욱 결정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궁극적으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 의사-환자간의 신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특히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는 어떤 형식으로든 소위 세컨드 오피니언을 구하는 것은 필수이다.

 

10. 이런 모든 절차가 귀찮기만 하다면.. 당신은 필시 병원과 의사가 필요치 않은 심각하지 않은 병을 갖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결코 대등하지 않다. 모든 것은 환자에게 어렵게 되어있으나, 단하나 이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는 것은 의사는 환자를 선택할 수 없으나, 환자는 자신의 의사를 선택한다.” 라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당사자인 환자의 나름대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대한민국의 의료 제도 하에서는 이점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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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가 의사 혹은 병원을 이용하는 법에 대하여 상당한 오해가 있다.

 

사람들이 암 치료는 의사의 권유를 따르는 게 좋다.” 라든가..

혹은 의사가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치료해 주겠지.. ”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그런대로 통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이, 아니 엄청나게 바뀌었다.

 

전화 걸려고 공중전화를 찾는기 힘들어지고,

모두들 핸드폰을 사용하는 시대가 된 것처럼..

 

시대 자체가 변해버린 것이다.

없어진 공중전화를 찾아 시내를 돌아 다녀도 헛수고 일 뿐이다.

 

겨울에는 외투와 장갑을 써야 춥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한 반팔차림으로 나서야 고생이 덜하듯이 ..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의사 사용법을 알아두어 야 한다.

 

과거에는 의사가 부모가 자식을 돌보듯이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최선의 치료를 해주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를 온정주의 (Paternalism) 환자와 의사 관계라고 말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가족을 대하듯이 가장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하여 환자의 동의를 얻어서 치료하고,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던 그야말로 그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30 년 전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아직도 이러한 의사를 기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그런 의사는 멸종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의료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변화를 꼽아본다면..

 

첫째 : 치료법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 졌다.

 

같은 암이라고 해도 사용하는 항암제가 종류가 많기도 하거니와, 투여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다. 수술법이라고 해도 로봇 수술이니, 내시경 수술 이니, 가지각색이다. 물론 방사선 치료의 종류와 선택 가지 수 도 많다. 치료 전략도 다르고, 의사의 경험과 선호하는 치료법도 다르다. 그래도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상 여러 가지 치료법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특별히 좋은 치료법 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치료법 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어서 치료법의 우월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 더 이상 환자가 치료비를 지불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치료비는 정부에서 나온다. 물론 국민이 의료 보험료를 지불한 것이니, 국민이 내는 것은 사실이나, 의료비를 지불하는 곳은 정부가 훨씬 크다. (현재 암 치료비의 95%가 국민 보험 부담이다.) 따라서 의사, 혹은 의료 기관은 당연히 환자보다도 의료보험공단, 즉 돈을 실제로 지불하는 정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러한 의료 보험 정책을 만든 사람은 의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국민도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하민국 정부이고, 가장 유리한 쪽도 당연하게도 정부이다. 이제 싫든 좋든 의사이든 환자이든, 정부의 정책과 방침과 규제에 따라야 한다. 이는 곧, 의사와 환자들이 자기 생각대로 치료하거나 치료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국가 전체로는 이득일 수 있으나, 환자 개인에게는 달리 생각해야할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

 

셋째,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가 변했다.

 

과거에는 환자는 당연히 집 근처의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집근처는 아니더라도 같은 시내의 병원, 혹은 같은 도내의 병원으로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제주도에서 출발하는 새벽 비행기에는 언제나 환자들로 만원이다. 과거에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동일한 도시의 거주자로써 동질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비행기와 기차, 승용차를 이용하여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필수적으로 환자의 다양성, 즉 기대치, 치료 목적, 거주지 역, 의사에 대한 신뢰도 등에서,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을 내포한다. 이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는 같은 사투리를 쓰고, 같은 지역에 살고 있어서, 얼굴도 가끔 볼 수 있는 , 혹은 두세 다리 건너면 알만한 그런 사이가 아니다. 이젠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는 생전 처음 보는, 이질적이고, 대부분은 법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는 의사와 환자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게 힘든 상황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새로 바뀐 환경에서 적용되는 규칙은 공유 의사 결정 원칙” (Shared Decision Making) 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의사와 환자가 정보를 사이좋게 공유하고 (shared), 말하자면 의사가 알기쉽게 설명하여 환자가 이를 충분히 이해한 다음, 이를 토대로 서로 상의하여 치료방침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물론 뜻도 좋고, 방향도 그럴싸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환자가 의사의 말을 대부분 오해하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즉 의사는 새로운 개념, 공유의사 결정 원칙 (Shared decision making) 에 따라서, 의료 정보를 제공했을 뿐인데, 환자는 과거의 규칙 즉 온정주의 원칙에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법을 권유했다고 착각 내지 오해하는 것이다.

 

의사가 이렇게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면 과거에는 그 의미는 이것이 최선이니 다른 생각 마세요!” 라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의미가 다르다.

 

이제는 이렇게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의 의미는 의사가 내 생각은 이렇다.” 는 뜻으로 말했을 뿐, 어떤 치료가 환자에게 더 적절한지는 이제 당사자인 환자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서, 상의해야할 상황을 의미한다.

 

즉 이제 당신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라는 뜻이다. 물론 정부의 눈치도 보고 시간도 바쁜 의사로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환자가 이해하여야 한다.

 

실제로는  환자는 자신의 상황에 가장 적절한 치료법을 의사가 권유하는 것으로 착각 혹은 오해하고 최선을 다해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협상의 시작인데, 협상이 끝났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랜 동안 암 치료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착각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는 환자에게 자세하고 내밀한 속마음, 치료에 대한 의지와 열망, 경제적인 상황, 가족 구성원과 관계를 포함하여, 기타 의사에게 하고 싶거나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 모든 내용을 듣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내놓고 상의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의사는 자신이 선호하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다른 치료법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갖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환자가 외과의사에게 수술을 권유 받고, 내과의사에게 가면 약물 치료를 권유 받는 다면, 환자는 황당하다고 할 수 있으나, 마치 북한 핵에 대한 여당과 야당의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실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프로페셔널이기 때문에 이미 새로운 환경에 적응 했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이다.

환자는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어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이제 와서,  아니 의사가 좋은 치료법을 정해주어야지.. 환자가 그걸 어떻게 알야?” 라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첫째 : 병원을 잘 선택해야 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선택의 기준은 남에 의한 평이나 유명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 만일 유명한 병원에 대한 집착이 큰 사람이면, 가장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병원에 가는 것이 맘이 편할 듯하다. 그러나 암 치료가 수개월 - 수년간 지속 된다는 점을 고려하고, 간병을 하는 가족의 수고도 고려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병원 시설과 전문가의 유무도 판단할 필요가 있다. 병원에 전환도 걸어보고, 인터넷도 찾아보고.. 노력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원하는 병원이 되어야지, 남들이 추천하는 병원이 아니다. 다른 조건이 없다면,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급의 종합 병원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 될 듯하다.

 

둘째, 담당 의사, 대학 병원이라면 주치의 교수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택 기준은 역시 자신이 가장 기준이다. 유명한 의사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역시 말할 필요도 없다. 친절한 의사를 원한단면, 역시 만나보고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충분한 의견 교호나이 가능해야 한다. 유명한 의사보다는 자신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고 상담해 줄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

 

셋째, 의사와 충분한 인간적인 교감을 갖고, 자신의 능력 한도에서라도 나름대로 치료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의사와 관계를 좋게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몫이겠지만, 의사에게 자신의 말을 충분히 들려주는 것은 역시 환자의 몫이다. 의사나 환자나 예의는 물론 이거니와 인간적인 교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인 교감이 없는 치료는 진정한 의미의 치료라고 할 수 없다. 자신에게 맞는 의료진을 찾기 위해서는 귀찮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의사를 찾아서 의견을 들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발달하고 의료가 발달 하면 모든 게 편해질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인 경우가 더 흔하다. 암 치료는 발달하고 있다지만, 암으로 죽는 사람의 수는 점차로 늘고 있다. 암 치료법은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도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에 바탕을 둔 온정주의적의료 행위는 이제 계약과 설명을 중시하는 공유 의사 결정 원칙으로 대치되었다.

 

과거에 환자가 치료되지 못하면, 의사는 죄송하다고 사죄하고 환자는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였다. 아쉽게도 이젠 우리는 그러한 신뢰를 더 이상 같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환자와 의사가 신뢰 없이도 치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사회는 신뢰를 잃어버렸지만, 각 개인 의사와 환자는 인간적인 교감을 통하여 서로가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암 치료는 서로에게 쓰라린 상처로 남을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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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 앎 을 보고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인 것이다라든가

혹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랫동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오랫동안 폐암을 않아오던 60세 여성은 암이 여러 군데로 전이되었고, 특히 대퇴골 (허벅지 뼈)이 전이로 인하여 골절되었다. 당연히 수술을 해야 했지만, 어차피 남은 날이 몆 일이 안되었음을 고려하여 수술하지 않고 통증만 조절하기로 하고 입원하였다.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알아차린 그녀는 회진을 온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한테는 굳이 안 오셔도 되니까, 가서 다른 환자를 돌보아 주세요!”

 

역시 오랫동안 폐암을 앓아오던 75세 남성은 뇌에 전이가 발견되자, 의료진이 뇌의 방사선 치료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상만을 약으로 조절하며 지냈으나 점차로 병세가 악화 되어 갔다. “왜 이렇게 쉽게 안 죽는 것이지?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평생을 건강하게 지내시던 89세 여성은 전신에 퍼진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의료진은 환자의 나이를 고려하여 부작용이 적은 소위 타겟 항암제 치료를 권하였다. 환자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말씀하셨다. “그냥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대부분의 환자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죽음 자체보다도..

삶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 정도이고....

두려움은 죽음 자체보다도, 죽음에 이른 과정에서 느끼게 될 신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물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가장이라면,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가족을 남기고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미련과 걱정도 상당할 것이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죽음 자체는 그다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환자가 격어야 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물론 가장의 죽음으로 인하여 남은 가족이 견디어야할 고통, 경제적이든 감정적이든 , 사회적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있다. 그러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할 것이나.. 만일 그것이 없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살아야할 삶의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실상은 완전한 허구이다.

즉 원래는 있던 것이 아니며..더구나 본능적이거나, 근원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말하자면 학습된 것이다.

 

즉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배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적을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적다. 젊은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결코 철이 없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회적인 학습의 결과로 죽음을 점점 두려워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게 된다. 건강검진, 운동 , 각종 건강식품과 약에 의지하게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는 정작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즉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드리게 되며,.. 사실상 죽음 자체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 단계이론은 대단한 상상력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대부분의 두려움은.... 죽음에 이른 과정에서 느끼는 신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생이 끝나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경제적 걱정 때문이다.

 

따라서.. 고령의 환자나, 자신의 가족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이 없는 경우에 죽음은 훨씬 편안하며.. 사실상 특별한 진통제도 필요치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죽음은 불필요한 두려움이 제거되면.. 질병에 의한 경우라도, 암 등의 질병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비교적 커다란 고통 없이 맞이할 수 있다.

 

왜 사회는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학습 시키는 것일까?

 

당연한 목적이 있다.

 

먼저, 가장 크고도 광범위한 목적은 상술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팔 수 있다. 엄청나게 비싼 항암제나, 건강검진 패키지는 물론이고, 최고급 외제차나, 자외선을 막아주는 선글라스, 건강식품, 총 대포, 핵무기까지도.. 사실상 거의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상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판매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목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고분고분하게 만든다. 처음 보는 의사에게 가슴을 풀어 헤치는 여성을 다른 이유로 설명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히틀러등 독재자의의 가장 중요한 전술이자.. 사실상 모든 정치가의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선거운동이다.

 

세 번째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종교적인 목적이다.

학술적으로 이미 연구된 사실이지만... 종교적 신앙이 깊은 사람일수록.. ..역설적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결국 인간 수명이 더 늘어날수록.. 학습기간이 증가함에 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져간다. 사회가 발달 할수록..특히 경제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커져만 간다. 정치, 사회, 종교가 복잡해질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증대된다.

 

그러나..

사실상 원래부터 죽음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원래부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실체가 없다.

삶의 끝이 있을 뿐,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허상이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궁극적으로 누구나 죽기 때문이다.

 

또 죽음을 늦추거나, 연기하기도 사실상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을 잘 관리하면,, 수술을 받으면.. 항암치료를 받으면.. 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확률적인 것 뿐 -- 사실상 운동을 열심히 하면 오래 산다는 것이 밝혀진 것도 아니다. 오래 사는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더라는 것 정도 일 뿐- 절대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건강관리로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기 등 운동을 하다가.. 별일도 아닌 병으로 수술을 받다가.. 혹은 혈압약이나, 당뇨병 치료제의 합병증으로 심지어는 소화제에 의해서도.. 물론 항암치료를 받다가.... 예기치 않게 죽음을 갑작스레 맞이하는 것은 별로 드문 일 도 아니다.

 

누구나 죽는 것이고, 연기할 수도 없고, 사실상 선택권이 전혀 없는.. 더구나 실체조차도 없는 죽음을 누가 두려워 할 것인가


오랜 기간의 학습이 아니라면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일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 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확실치는 않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좀 더 평화롭고, 좋은 사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미친 듯이 소비하지 않게 되어 경제가 붕괴하고..,..사람들이 겁 없이 날뛰어서 정치적 혼란이 와서 전쟁과 파괴가 더욱 극심해질 것인지.... 예측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롭게 덜 고통스럽게 삶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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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1-0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을 때는 죽음을 추상적으로 느끼게 되지만 나이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되니 더 두려움이 커지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과연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Ralph 2016-01-05 17:04   좋아요 0 | URL
˝충실한 삶을 살면 죽음은 두렵지 않다.˝ The fear of death follows fron the fear of life. A man who lives fully is prepared to die at any time. ˝

마크 트웨인을 말처럼, 오래 살든, 신나게 살든, 어쨋든 충분히 충실하게 산 분들은 삶에 대한 미련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 다 충실치 못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더크고,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그냥 우리가 부지 불식간에 배운 것이 뿐, 실체는 없다 라고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