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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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라는 것이 가끔 불편한 것은 (조그마한 부분이긴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 김지혜 #선량한_차별주의자


책의 프롤로그에서 김지혜는 자신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혐오표현에 관한 토론회에 참여했다가 토론 중에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는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느냐고 묻더랍니다.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지적임을, 결정장애에서 ‘장애‘라는 표현이 부적절했음을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바로 잘못을 시인했지만, 결정장애가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인권운동을 하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는군요. 지인은 ‘우리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6쪽)고 합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6쪽)는 사실을, 그런 표현을 작가 자신이 무심코 스스럼 없이 사용했을 뿐인데 자신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사실 저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결정장애가 심해서 누가 뭘 선택하라고 요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버릇처럼 내뱉는 저의 변명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게 많이도 사용한 변명입니다. 작가의 일화에서처럼 저 또한 장애인을 차별하는 생각을 가진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차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눈을 주위로 돌리면 이런 사소함이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일이 아님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통해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어떻게 차별을 보지 못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만들어지는지‘(11쪽)를, 2부는 ‘차별이 어떻게 지워지는지, 어떻게 ‘정당한 차별‘로 위장되는지‘(11쪽)를, 3부는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12쪽)를 단계별로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 저를 강타한 깨달음은 작가가 인용한 아이리스 매리언 영(미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말에서 비롯됩니다.

영은 말한다.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책임질 수 있고 책임을 져야 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성찰하고 습관과 태도를 바꾸어야 할˝ 책임을 말한다. (189쪽)

무의식적이었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어찌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가뜩이나 책임도 지지않고 반성도 없는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뼈져리게 깊은지 모르겠습니다. 네, 다른 사람들더러 가르칠 일은 아닙니다. 저부터 깨우치고 반성하고 실천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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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즘은 시험해 보고 가정해 보는 태도이지만, 생각 속에서, 글 속에서, 삶 속에서 뚜렷한 윤곽을 그리는 습관이기도 하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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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으래비 한국희곡명작선 120
최기우 지음 / 평민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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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희곡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행복합니다. 다만, 주위에 희곡만을 놓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주절거릴만한 상대가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행복은 자유롭게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최기우의 희곡 <정으래비>는 ‘사농공상도, 반상 귀천도 없는‘(20쪽) 대동계를 조직하고 ‘천하를 어찌 어느 한 사람의 것이라 하겠는가.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기 때문‘(28쪽)에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던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과 그가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를 시작으로 1589년(선조 22년)에 동인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처벌이 단행된 기축옥사를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희곡 <정으래비>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이야기의 전체적 흐름은 민중을 대변하는 걸인들의 장면들로 채워집니다. 최기우 작가의 색깔이랄까요. 그의 희곡들은 역사적인 소재가 많지만, 역사를 풀어가는 것은 역사적 인물이기보다는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잊혀진 인물, 즉 민초, 민중들이 그 중심을 이룬다는 특색이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내용, 탁월한 구성, 뛰어난 연극성... 뭐하나 나무랄 데 없는 작품의 완성도는 비단 희곡 <정으래비>에 국한하여 칭찬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지만, 최기우 작가의 대부분의 희곡들이 다 그러합니다. (아니, 제가 지금까지 접한 최기우 작가의 희곡들은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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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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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_키건
#맡겨진_소녀

98쪽.

100쪽도 채우지 못한 적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가슴을 찡하게 누르는 감동의 무게는 수 천 쪽의 백과사전보다 수십수백배는 더합니다.

웬만해서는 정동적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저는 최근 만난 클레어 키건의 두 소설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에 소감을 올렸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그랬고, 이번의 <맡겨진 소녀>가 또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에 관심 이상의 마음이 불쑥 들었는데, <맡겨진 소녀>를 거치면서 그 마음은 도저히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동경으로 자리매김하고 말았습니다.

클레어 키건은 백 년에 한 번 나오는 작가라는 평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작가로 불립니다.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을 필두로 24년간 단 4권의 책만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일궈낸 이력의 면면을 보자면, 첫 단편집 <남극>은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했고,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세 번째 발표한 <맡겨진 소녀>는 데에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과 더불어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 선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발표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오웰상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책표지 작가소개 내용을 참고)

소설 <맡겨진 소녀>는 책 제목에서처럼 한 소녀가 엄마의 먼 친척에게 맡겨져 어느 여름 한 때를 보내는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작품에서 직중화자인 ‘나‘이며, 나를 맡게되는 먼 친척은 킨셀라 부부입니다. 소설은 이 셋이 그려내는 이야기입니다.

소설 <맡겨진 소녀>의 특징 중 하나를 꼽자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현재형 시제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작품은 시종일관 당장 눈 앞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소설 <맡겨진 소녀>는 시간차 없이 그때그때 작중화자인 나, 소녀의 시선과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참 매력적입니다.

...

작품 속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 살짝 소개합니다.

학교 지붕 교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 복권을 팔고자 두 남자가 킨셀라 부부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찾아온 사람에게 킨셀라 아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47쪽)

그 말이, 그 마음이 마냥 따듯합니다. 이 장면은 클레어 키건의 다른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펄롱이 비 오는 날 땔감을 주우러 나온 아이를 차에 태워 비를 피하게 하고 자신의 주머니에 든 동전을 쥐어주는 장면과 닮아있습니다. 작가의 작품 속 중심인물들이 하나같이 따듯한 심장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닐 듯합니다. 작가가 바라는 어른의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짐작이지만, 그럴 것이라 믿게 됩니다.

...

📖 27쪽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 73쪽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
어느 날

내 마음에 온도를 높이고 싶을 때,
슬며시 어깨를 도닥여주는 작은 위로가 필요할 때,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을 때...

클레어 키건을 찾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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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주인은 천하에 있거늘 천하를 어찌 어느 한 사람의 것이라 하겠는가. 천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천하는 만백성의 것이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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