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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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도코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도코 또래에게 그 시대는 공룡이 살던 시대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나마저도 그때가 마치 신비로운전설의 시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코에게 그건 우리 세대가 가진 불손한 향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삶에 찌든 중년의 알코올중독자일 뿐이니까. 그 시대는 빛바랜 사진 같은 것이다. 어딘가에서 쭉 잠들어 있던 것, 그것을 꺼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두 명의 죽은 이들이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확실히 그 빛바랜 시대에 우리가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969년도의 일이야." - P97

"와, 이렇게 낡은 차가 아직까지 굴러가나 보네."
그렇게 말하면서 웃으며 덧붙였다.
"맘에 들어, 이 자동차. 디자인도 심플하고 뭔가 충견이떠올라."
내가 받은 인상도 똑같았다. 그건 이 나라 자동차 산업의여명기를 나타내는 조촐한 기념비였다. 천CC 엔진, 그리고타이어와 핸들이 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디자인이라고할 만한 것도 없다. 커다란 차체에 작은 운전석이 실려 있다.
그것뿐이다. 라디오는 달려 있지만 그 외에 다른 옵션은 전혀 없었다. 빛나던 옛 시절이 그대로 형태가 된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 P121

지금까지의 시간을 돌이켜보았다. 22년 동안 했던 일들을회상했다. 건축 현장 작업을 가장 많이 했고 빌딩 유리창 청소, 선반 공장. 점원 일도 많이 했다. 게임 센터, 펍, 파친코,
사무직을 하자니 운전면허가 없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전부 육체노동만 해 왔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아니, 의미가 있어서 그런 일을 계속한 것이 아니다. 계속 도망 .
을 쳤던 것도 아니다. 그런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단지 그런 일이 좋았다. 알코올중독 중년이 되어서도 좋았다. 바텐더 일도 마음에 들었다.
"후회는 안 해?"
"전혀. 내가 해 온 일들은 전부 나한테 가장 어울리는 것들이었어."
내가 말했다.
아사이는 조금도 야쿠자 같지 않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 더 충고해도 되나?"
"응."
"자네에겐 결함이 있어. 지금은 품질 관리의 시대잖아. 결함품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지. 자넨 이런 세상에는 부적합한 성격이야." - P212

"돈이라는 힘 말이야. 평범하지만 강력한 힘이지. 예를 들면 아무한테나 현금을 보여 줬다고 치자. 네 연 수입을 듣고놀라는 사람은 없을걸. 하지만 그것을 열 배로, 즉 천만 엔으로 끌어 올리면 어떻게 될까? 그 현금을 눈앞에 둔 인간은 마음이 움직일지도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움직이지 않으면 뭐, 그걸로 괜찮아. 그럼 이번에는 다시 열 배, 즉 !
억 엔을 쌓아서 보여 주면 되니까. 현금으로 1억 엔 그게 눈앞에 있다고 해 봐. 그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은 욕망에 패배해. 인간이 변한다는 뜻이야. 물이 백 도에서 기체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그래도 부족할 때가 있지만 돈을 더 쌓아 올리면 어떤 인간이라도 언젠가는 끓는점에 도달해. 이게근 20년간 내가 배운 확실한 규칙이야." - P364

유코는 결국 너를 잊지 못했지. 나와 유코의 대화는 언제나 60년대 말로 돌아가 있었어. 언제 만나도 마지막은 너 이야기로 끝났지. 그때 처음으로 알아챘어. 내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절망이 언제 찾아오는지 알긴아니. 이 세상에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있다는 걸을 알게 되었을 때야. 전기 상자 안에 있을 때는 희망은 있었거든. 언젠가는 이 상자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하지만 이쪽은 그런 것조차 없어. 모르는 척을 했지만 아마 유코도 알고 있었을 거야. - P383

2015년 『도덕의 시간으로 제6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한 오승호(고 가쓰히로) 작가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소설로후지와라 이오리의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을 꼽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오승호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좌절에 대한 동경을 느꼈다고 합니다. 좌절은 싸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요. 아무리 애써도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 있음을 알고, 알면서도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찾아오는 좌절을 수용하는 자세야말로 오늘날 우리 세대가 계승해야 하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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