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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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키니는 너무 커져서 금방 싱거워진다. 옥수수 수확은 아직 멀었지만,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곰이나 너구리가 숲 속 어딘가에서 달콤하게 익어가는 기척을 맡으려 하..
고 있다. 그들의 후각은 무척 멀리까지 뻗는다. - P155

밭일을 하는 동안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것을보고 그저 손만 움직인다. 등에 태양을 느끼면서 숨을 쉬고 숨을토하는 것을 내 귀가 듣고 있다. 일군 밭과 수확물에서 흙내가물씬 풍긴다. 다 파낸 것 같은데도 유키코가 흙에 손을 집어넣으면 남아 있던 것이 두 개, 세 개 굴러나온다. - P160

둑 주변이 깨끗해졌다. 왜 사람은 잡초만 깎아도 이렇게 상쾌해지는 걸까. 울퉁불퉁한 땅보다 펀펀하게 고른 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마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평평한 면을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인간이 처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웅덩이.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는 주름이 가고, 풀이랑 잎사귀의 초록색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예초기 엔진을 끄고 헬멧을벗는다. 숲의 소리가 귀에 돌아온다. - P161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책상에서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이 표지인 큰 판형의 책을 열어본다. 매끌매끌한 종이에 활자의 울퉁불퉁함이 느껴지는 그리운 촉감과 햇볕에 그을린 종이 냄새, 스웨덴어로 된 텍스트, 모노크롬 사진, 평면도와 입면도, 도서관 주위의 지형도도 게재되어 있다. 평면도에는 원형의 대열람실 주위를 ㄷ자형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도서관은 다소 높은 언덕에 서 있다. 정면으로 가는 진입로는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엔트런스 홀에 들어서면 그곳은 천장이높고 까만 벽에 둘러싸인 어두컴컴한 공간이다. 얕은 계단을 올라가면 원형의 대열람실이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면 일전一轉해서 천장에서 자연광이 쏟아지는 하얀 벽의 공간이머리 위로 가득 펼쳐진다. 그 아래에 나타난 삼층 원형 개가식책꽂이에는 책이 가득 차 있고, 플로어에 서 있는 사람을 감싸듯이 내려다보고 있다. 다양한 색깔의 책 표지가 하나의 커다란태피스트리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넣은 양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형서가의 모습, 대열람실에 들어간 순간 나이트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해방감과 동시에 그와 모순되는 밀실감이 일체가 된 감각 - P166

사람은 죽은 뒤에 숲으로 돌아간다는 태고로부터의 생사관이 스웨덴 사람들 의식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그 이미지를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 형상화할 수만 있다면 화장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희석되지 않을까? ‘숲의 묘지‘라는 프로젝트 명이 처음부터 준비된 데에는 그와 같은 배경도 있었다.
그러나 ‘숲의 묘지‘를 완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경합에서 일등이 된 후부터 그 일이 필생의 일이 될 예감이아스플룬드에게 있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불길한 것은 하나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숲의 묘지‘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오 년뒤 서른넷이 됐을 때, 아스플룬드는 장남을 병으로 잃게 된다.
죽음은 어느 틈엔지 가까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묵묵히 서 있었다. 아스플룬드는 장남의 죽음을 전후해서 설계에 들어간 ‘숲의..
예배당‘ 의 문 스케치에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라는 명판板을.
그려넣었다. - P170

선생님은 내 의문에 미리 대답하듯이 말했다. "가구는 좀더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물론 이구치 군도 그런 거야 알고 말한 거겠지만 말이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가는 거야. 수정란이세포분열을 반복해서 사람 모습이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본 일이있나?" - P173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 같은 것은 놀랄 만큼 빠른단계에 완성돼. 태아는 그 손가락으로 뺨을 긁기도 하고 열었다.
닫았다.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손가락을 움직여. 건축에서 세부라는 것은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 주종관계에서의 종이 아니야. 손가락은 태아가 세계에 접촉하는 첨단이지. 손가락으로 세계를 알고, 손가락이 세계를 만들어. 의자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야. 의자를 디자인하다 보면 공간 전체가 보이기도 하지."
무의식의 영역을 빼놓고 사람에게 태아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손가락이 예전에 그렇게 세계를 탐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서 손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것이 생각으로 연결된다. 선생님의 건축 작법은 그 양쪽으로 성립되어 있다. 나는 내 손을 펼쳤다가 쥐었다. - P173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 P180

선생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어딘가에서 또 쇠딱따구리가 울었다. 끼이 하는 작은, 그러나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소리.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약..
속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면, 선생님은 그 공간을 어떤 형태로 만들려는 것일까.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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