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날이 새고 얼마 있다 잠이 깬 나는, 좁은 침대에 누운 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선생님 기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머리맡에 둔 손목시계를 들고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본다. 5시 5분이다. 나는 현관 바로 위의 침대가 있는 서고에서 지내고 있다. 새벽녘, 침대 밑 마루에서 오래된 나무 기둥과 벽을 타고 덜컹덜컹 조심스러운 소리가 기어오르듯 희미하게 들려온다. 현관 안쪽에 걸어둔 버팀목을 떼서 벽에 세우는 소리다. 커다란 미닫이를 왼쪽에 있는 두껍닫이에 집어넣은 뒤, 그 앞에 있는 문이 벽에 닿을 때까지 백팔십도 열어젖히고 놋쇠 문고리에 마로 된 고리를 걸어둔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어도 문이 닫히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안쪽 망사문을 연다. 선생님은 산책을 가신 것 같다. 밤의 숲에서 차가워진 공기가 망사문을 통해 천천히 들어온다. 여름 별장은 다시 조용해진다. - P9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다.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옆의 설계실블라인드를 소리나지 않게 올린다. 좌우로 넓게 퍼진 남향창 가득히 안개가 흐르고 있다. 가운뎃마당에 있는 큰 계수나무가 안개 속에 가라앉고, 안개 속에 떠 있다. 선생님은 이런 숲 속을 산책하는 걸까. 길을 잃지는 않으실까. 안개는 아무리 깊어도 ,해가 뜨면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 P10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기타아오야마 사무소는 반쯤 개점휴업 상태가 되는데 기타아사마에 있는 오래된 별장지, 통칭 아오쿠리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이 옮겨가기 때문이다. - P11
그러나 나는 그 시절의선생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무라이 슌스케라는 건축가가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 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 P16
"주택설계에서는 뭐가 제일 힘들까?" 선생님이 손을 올려놓은 도면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덧셈도 뺄셈도 하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만들어내야 하는 부분일까요? 주택설계에는 덧셈뺄셈이 많다고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자네는 덧셈뺄셈은 잘하나?" "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에게 어울리기는 한 것 같습니다." - P18
정서적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로 전달하려고 했다. "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장인이 전달하는 비법 비슷했다. - P20
"겨울 풍경 속을 덜커덩 덜커덩 달려서 저 아래 세계가 점점멀어지는 것은 뭔가 저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아 쓸쓸하지.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게 빙글빙글 한가하게 돌아가는 것이 참 좋다. 고 아주 진지하게 말씀하시거든."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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