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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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우리의 단골 카페, 자주 앉던 창가 자리에앉아 있습니다. 창 너머로 오빠가 일하고 있는 회사 건물이 보이네요. 1층부터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세어 봅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7층, 저 많은 창문중 하나에 오빠가 있겠네요. 열 시간 후에 여기서 오빠를만나기로 했지요. 하지만 더 이상 오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남깁니다. 불미안해요. 이미 몇 번이나 말했듯 청혼을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빠와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요.

(현남 오빠에게) - P155

이 결정이 맞는지, 후회하지 않을지, 내가 오빠 없이 살 수있을지 두렵고 무섭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벌써 10년째, 그러니까 거의 제 인생 3분의 1을 오빠와 함께 지내 온 셈이니까요. 그런 오빠를 앞으로 영원히 못 본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이제 여기서멈추려고 합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또 고마웠고, 정말고마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 P156

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요. 하지만 오빠 말대로라면 제가과 친구도 모르는 애가 되는 거잖아요. 저도 모르게 규연이가 오빠 동아리 후배라고 강하게 말했고 오빠는 오늘왜 그렇게 예민하냐며 "그렇다고 치자. 했어요.
왠지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저는 오빠 손을 잡아끌고길을 건너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규연이에게 직접 자신은 오빠의 동아리 후배이고 저와 다른 과라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런데도 제가 울었던 건 오빠가 우겼던 일이 화가 나서도, 그래 놓고 착각할 수도 있다고 별것 아닌 듯넘겨서도 아니에요. 사실 규연이를 만나러 가면서 정말내가 틀린 거면 어떡하지, 내가 헷갈리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저 자신을 계속 의심했기 때문이에요. - P159

지은이가 가장 먼저 맥주 한 캔을 다 마신 다음이었나요? 한참 아까 경기를 되새기던 중이었나요? 오빠가지은이에게 "너는 보통 여자애들하고 다른 것 같다."라고말했고, 지은이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고 물었습니다. 오빠는 "칭찬이야." 했어요. 지은이는 "보통 여자애들이 어떤데요? 보통 여자애들하고 다르다는 게 왜 칭찬이에요? 그럼 보통 여자애들은 보통 별로라는 뜻이에요?"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습니다. 술자리는 급히 마무리되었고 그래도 오빠는 택시를 지은이네 먼저 들르도록 해서 내려 주고 저를 기숙사에 데려다주었죠. 지은이가 내리고 난 택시 안에서 오빠는 지은이가 좀 당돌한것 같다고 했다가 버릇없는 것 같다고 했다가 싸가지가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듣기 좀 그랬어요. 그래도 제 친군데 싸가지가 없다니. - P167

오빠는 저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요. 동문회에 입고 갈 단정한 정장을 사 주었고 당일 메이크업을받을 숍도 예약해 놓았어요. 제게 주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인정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마냥 기쁘지는 않더라고요. 뭐라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데 잇새에 아주 작은 고깃덩이가 끼어서 아무래도 따지지 않는 답답함, 찜찜함, 불편함, 뭐 그런 감정.
지은이에게 말했더니 대뜸 "자기 동문회인데 왜 너한데 새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키지? 네가 현남 오빠 액세서리야?" 하더군요. 아, 이거였구나. 내가 느낀 불편함이이유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 P168

그리고 그날 우리는 김밥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갈비탕을 먹었어요. 제 몸이 너무 약해진 것 같다며 오빠는고깃국을 사 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불편했고 갈비탕이 싫었어요. 오빠는 설렁탕에 소주 마시는 소박하고 소탈한 여자가 좋다고 자주 말하죠. 그런데 오빠, 설렁탕 비싸요. 그리고 저는 물에 끓인 고기는 별로더라고요. 고기는 구운 게 좋지. 오빠는 자꾸 설렁탕이니 갈비탕이니 그런 거 먹자고 하고,
제가 잘 안 먹으면 입이 짧다고 잔소리하고 악순환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입이 짧은 게 아니라 오빠가 몸보신시켜 준다고 사 주는 음식들이 입에 안 맞았을 뿐입니다.
몇 번 얘기했는데 오빠가 그냥 흘려듣더라고요. 다시 말하지만 고기는 정말이지 구운 게 좋습니다. - P182

오빠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삶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말해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질문은 "아이를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가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이나 낳는 게 좋다고 생각해?"였고, "네가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네가 아이를 몇 년쯤 직접 키울 수 있을까?" 였으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했고 오빠는 왜 그렇게 계획 없이 사느냐고 저를 한심해했습니다. 하지만 오빠, 오빠가 아이를 직접 낳을 것도 키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계획을 혼자 세우죠? 한심한 건 제가 아니라 오빠예요. - P185

자전거 여행 이외에는 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없네요. 평소에는 그냥 그런 데이트들이었죠. 밥 먹고,
영화보고, 맥주 마시고, 섹스하고, 나랑 섹스하려고 만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오빠가 뭐 섹스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 P187

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고 너랑 결혼하기 싫은 겁니다. 본격적으로 결혼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꺼림칙하던모든 게 분명해졌어. 그동안 오빠가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오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돌봐줬던 게 아니라 나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더라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 P190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안다.

(오로라의 밤)

옐로나이프에 다녀오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 전 참고 삼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는 오로라여행 후 퇴사하고 천체 사진작가가 되거나 전혀 다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 나왔다. 한 발짝만 걸어 나와도 길은 넓고 많은데 일상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한 발짝의 계기가 그들에게는 오로라였다. 나도 그럴 줄알았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왔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입시 업무를 마무리하고진학지도 연수를 받고 필라테스를 하면서 남은 방학을보냈다. 방학은 언제나 너무 짧고 새 학기를 생각하니 두려운지 설레는지 수시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로라의 밤) - P253

이렇게 눈을 감으면, 눈 앞에서 막 춤을 춰. 나를 감싸서 우주로 데리고 날아가. 우주는 이렇게 넓고 끝도 없구나, 나는 그냥 먼지구나, 아무것도 아니구나, 생각이들어."

"할머니 설마 인생무상 이런 거 깨달으신 건 아니죠?"

"악착같이 살아야지, 깨달았다. 나라도 이 먼지 같은 나를 아끼고 아껴서 훌훌 날아가지 않게 잘 붙잡고 살거야."

(오로라의 밤) - P255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어쨌든 지혜는 첫 번째고비를 넘겼다. 내가 지혜의 소원을 잊지 않고 빌어 준덕분이라고 우기는 중이다.
오로라를 보고 온 것은 어머니와 나인데 지혜의 인생이 달라졌다. 달라질 뻔했던 것이 달라지지 않는 방향으로 달라졌고 그것은 어쩌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과 그 일 들이 나와 지혜에게 가져다 줄 변화를 생각한다
나와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을 생각한다 - P259

"엄마도 똑같네."
"아니! 엄마 똑같지 않아! 너 엄마가 뭘 보고 어떻게 자랐는지 몰라? 엄마 너만 할 때부터 성교육 캠프 다니던 사람이야. 대학 때 책 모임 만든 얘기 들었지?"
주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겠지, 무려 20년 전에. 그리고 지금 엄마는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해해 줘야 한다, 몰래 사진 찍고낄낄거리는 게 장난이다. 그러는 사람이 됐어. 여자애들이 성적 떨어뜨리려고 남자애를 꼬신다, 그런 한심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됐다고,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구나. 20년 동안 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93

"하지 마. 너 겨우 스물네 살이야. 앞으로 네가 할 수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포기하겠다고?"

"왜 포기해? 결혼한다고 내가 왜 포기해? 난 다 하고살 거야."

그게 마음대로 될 것 같아? 결혼하고 애 낳고 키우고 그러면서 여자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을 것같아?"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직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으니까 엄마 같은 사람이 있는 거야."

엄마는 거의 30년 전,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는 지방 소도시에 가정 폭력 상담소를 연 사람이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73

아이를 낳고 키워 봐야 어른이 된다고들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세상을 알고 사람을 겪어 본 평범한 어른들은 의외로 대의를 위해 자신의손해나 고통을 감수하기도 한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판단할 줄 알고 일정 정도의 정의감, 측은지심, 희생정신도 있다. 그런데 자녀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피해 학생을 쫓아다니며 합의를 종용하는 성폭행 가해 학생의 부모, 내 아이 학교 옆에 특수 학교를 짓지 말라는 학부모들, 논문의 공저자로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고위 공직자……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빠지지 말아야지, 내 아이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지, 나빠지지 않고도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있다고 계속 나를 다잡는다.

(여자아이는 자라서)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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