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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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와 에드몽

내가 읽어야 하는 작가들 중에는 카프카도 있다. 『변신』을 읽는동안 나는 그레고르의 끔찍한 운명에 놀라 망연자실해진다. 왜 그런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레고르의 악몽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밤사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똑같은 운명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숨이 막힐 만큼 두려워진다. 나도 그레고르처럼 비천한 존재로 변할지 모른다. 내가 처박힌 방이 창고가 되었다가 쓰레기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레고르를 떠올리면 욕지기가 인다. 그레고르가 꼭 나 같다. 아무도 그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자신조차 그렇다. 그레고르처럼 나도 말할 곳이 없고 친구도 없다.
나는 숨막히는 공간에 갇힌 바퀴벌레다.

결국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만 그레고르의 종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전까지 나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꿈꾸었다. 그의용기에 찬탄했고, 키클롭스를 상대한 그의 꾀에 황홀해했다. 혹은쥘 베른의 책들에 나오는 필리어스 포그, 네모 선장, 사이러스 스미 - P135

베이지색 장정에 흑백 삽화가 들어 있는 두 권짜리 『몬테크리스트백작을 꺼내든다.
나는 곧장 책 속에 빠져든다.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나는 그와한몸이고, 그의 모든 감정을, 이유도 모른 채 닥친 끔찍한 처벌 앞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어리둥절함을, 왜 이래야 하는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 던져진 공포를 똑같이느낀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가 느낀 반항심과분노와 절망까지도 그대로 느낀다. 에드몽 당테스가 벽에 머리를 찧을 때, 세상과 단절된 외로움 때문에 죽도록 고통스러워할 때, 에드몽 당테스는 나다. 그 책 속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든다. 그가파리아 신부를 만날 땐 나도 함께 해방을 경험한다. 파리아 신부는에드몽뿐 아니라 나까지 절망의 늪에서 건져주고 복수의 욕망에서 풀어준다 - P136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 할 모델을, 본보기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밤에 차가운 수돗물을 아주 가늘게 흘러나오도록 틀어놓고 몰래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그레고르를 떠나 당테스가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카틀랭 공장의 노동자들이 단호한 걸음으로 일터로 향하고 어린애들이 거리에서 웃고 떠들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당테스에게 다가간다. 삶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하다. 언제나 해결책이 있다. 기필코 그것을 찾아내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고함을 치며 화낼 때면 나의 자신감은 단숨에무너지고 그레고르의 세상만이 남는다. 어머니의 눈길이 나를 향할때면 나는 그레고르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레고르다. 등껍질을바닥에 대고 배를 드러낸 채 일어서지 못하고 네발을 우스꽝스럽게허우적대는 그레고르다.
에드몽 당테스처럼 지금 나의 가장 큰 약점은 지식 부족이다.
진정한 지식을 얻지 못하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 P137

백치를 읽을 때는 금맥을 발견한 기분이다. 나는 도스토옙스기에 빠진다. 그의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매혹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진짜처럼 실감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제멋대로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완벽한 존재들과 달리 삶으로 진동한다.
증오하고 사랑하고 미칠 듯이 흥분한다. 비틀거리며 정신적 혼돈 속에서 허우적댄다.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되 답을 찾으려 매달리지는 않고, 욕망과 광기와 과오 속으로 달려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삶이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해준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것을, 온통 폭력과 오욕과 복수와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삶에 맞서벽을 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삶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기고, 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 - P157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찾아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다. 몇 줄밖에 읽을 틈이 없다. 내 방으로 들고 갈 수는 없다. 그랬다가 들키면 금지 된 창고방에 들어간 것까지 들통나게 된다. 일단 옆에 쌓여 있는 낡은 식탁보 아래 책을 감추어둔다. 그러곤 이후에 들러서 한 번에서너 페이지씩 읽는다. 주인공은 너무도 놀라운, 격정적인, 사악한, 신랄한, 이기적인, 고통받는, 비겁한 인물이다. 그를 뒤흔드는 모순적인 생각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사로잡는다. 그는 사교성 없는 낙오자이고, 스스로 모욕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수를 위해 젊은매춘부 리자 앞에서 훌륭한 사람인 척한다. 심지어 죄 사함을 받고 싶으면 찾아오라고 주소까지 건넨다.

그는 찾아온 리자를 짓밟는다. 하지만 리자는 그의 혐오스러운가면 아래 커다란 고통이 숨어 있음을 알아채고 기꺼이 몸을 바친다. 아주 잠시 그는 리자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의 진심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금세 다시 악령들에 사로잡혀 기필코 돈을 주겠다면서 리자에게 모욕을 안긴다. 리자는 그를 용서하지만 그대로 떠나간다.

나는 충격에 빠져 읽고 또 읽는다. 늘 숨어서, 늘 몇 페이지씩 읽는다. 나는 서서히 깨닫게 된다. 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흔든 그주인공은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다. 둘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세상을, 관습을 밀어낸다. 똑같이 광기 상태를, 거창한 말들을, 좋아한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굳은 외관 아래 아직까지 벌어져있는 상처가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 행하고 어머니와 나에게도 강요하는 것, 그 모두가, 아버지가 우리를 가두어놓은 이 세상 전부가 사실은 탁월한 통찰력이 아니라 은밀한 고통에서 나온 게 아닐까? - P158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을 때마다 결말에 담긴 냉혹한 교훈이 나를 죄어온다. 그 교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언젠가 자신의 광기를 깨닫는 날이 온다 해도,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 도망쳐!"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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