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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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베개를 베다』, 중편소설 『첫 문장』, 장편소설구경꾼들』, 『상냥한 사람』 등이 있다.


백수린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오늘 밤은사라지지 말아요』,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이 있다.

강화길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괜찮은 사람』, 장편소설 『다른 사람』 등이 있다.

손보미2009년 『21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담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중편소설 『우연의 신』,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등이 있다.

최은미200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울고 간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중편소설 『어제는 봄』,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등이 있다.

손원평2016년 장편소설 『아몬드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여 등단했다.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 등이 있다.

간밤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남편의제사상을 차리지 않기로 했다. 제사 전날 밤이면 남편은 항상나를 찾아왔다. 지난 10년 동안 그랬다. 꿈은 늘 똑같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 왔어. 배고파." 나는냉장고를 뒤져 뚝딱 저녁상을 차렸고, 남편은 강된장에 밥을 비벼 먹었다. 참 달게도 먹어서 꿈을 꾸고 나면 제사 음식을 정성껏 만들 수밖에 없었다. 꿈속에서 남편이 먹은 강된장은 남편이죽던 날 아침에 먹은 음식이었다. 그날 남편은 늘 그렇듯 아침밥을 먹으며 아들의 욕을 했다. 한심한 놈이라고. 그러고는 내게강된장이 너무 달다고 했다. "청양고추 좀 넣어봐." 남편이 말했다. 나는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 아들은 한심 - P9

작가 노트


할머니는 화투점을 자주 봤다. 아침에 학교 가는 나에게 좋은 소식이 온다거나 산보를 갈 일이 생긴다거나 하는 말을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열두 장 화투 패의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점괘는 5월 창포와12월 비가 함께 나오는 패였다. 비가 오고 국수를 먹는다. 일요일에는 나도 가끔 화투점을 보곤 했다. 할머니가 한 번, 내가 한 번, 그러고 나서 우리 둘은 민화투를 쳤다. 방학 때는더 자주 쳤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식물도감을 사서 봄에 피는 들꽃의 이름을 외웠다. 훗날 조카들이랑 산책을 하게 되면 척척박사처럼 들꽃 이름을 말해주는 고모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카랑 산책할 일은 거의 없었고 들꽃들도 볼 일이 많지 않아서인지 금방 까먹었다. 식물도감외우기는 언젠가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손주들은 없겠지만…… 들꽃을 볼 때마다 혼자라도 이름을 불러보는 할머니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할머니는 화투점을 보는 할머니와 들꽃 이름을 외우는 할머니가 반반 섞여있다. 그건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밤 할머니를 꿈에서 본 건 아마도 상우가 한 말 때문일것이다. 할머니의 네 번째 기일을 맞이해 온 가족이 모여 성묘를 갔던 날, 나는 남동생인 상우로부터 할머니에 관한 놀라운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누나, 그 할아버지 기억해?"
가을볕이 좋은 토요일 오후였고, 공원묘지에는 잠자리들이한가롭게 날아다녔다. 아직 어린 조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햇살에 비석들이 반질거리며 빛났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보러 오기에 여러모로 딱 좋은 날이었다.
"누구?"
"왜, 예전에 우리가 프랑스에 살았을 때, 아파트 일층에 살던할아버지 있잖아. 키 크고, 보청기를 끼던."


백수린 흑설탕 캔디 - P39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있는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 P51

"난실!"
CD 재생이 끝난 줄도 모른 채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 깜빡졸고 있는데 갑자기 브뤼니에 씨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눈을 떴을 때 발견한 것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엄청난 높이의 각설탕 탑이었다. 켜켜이 쌓인 높다란 각설탕 탑.
"와!" 할머니가 탄성을 질렀다. 마치 경이로운 일을 난생처음목격한 사람처럼.
할머니의 반응에 신이 난 브뤼니에 씨가 부엌에서 언제 가져온 것인지 모를 설탕 상자 안의 남은 각설탕들을 테이블 위에아주 조심스럽게 마저 부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정육면체의 갈색 설탕들, 할머니는 각설탕들을 바라보다가 가까운 쪽에놓인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아이, 달아.‘
이런 천진한 달콤함이라니. 각설탕을 입 안에서 굴리자, 단맛이 서서히 퍼지고,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떠올랐다. 무슨 일인가로 혼난 후, 양장점 입구 앞 흙길에 앉아울고 있던 어느 초봄, 할머니가 보았던 여자 손님의 우아했던보라색 클로슈 모자. 인력거에서 내린 그녀가 할머니 손에 쥐여줬던 흑설탕 캔디. 난생처음 맛보았던 그 황홀하도록 달콤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런 것뿐이다. 그러니까, 할머니가나에게 찾아왔던 지난밤 꿈에 대한 일, 꿈속에서, 할머니는 ‘
아가시기 전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70대의 건강한모습으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채 희붐한 빛에 둘러싸여 서 있다. 그 세계에서 아마도 소녀인 나는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가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안긴다. 그런데 이건 무슨 향일까?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자 속이나 치마 속 어디서도 향의 진원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할머니, 할머니, 나를 좀 봐."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가나를 돌아보고, 나는 할머니가 주먹을 꼭 쥐고 있다는 걸 불현듯 알아챈다. "할머니, 손을 펴봐." 나는 할머니에게 떼를 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울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무엇이든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 P72

작가 노트

「흑설탕 캔디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열여덟 살 때 습작으로 썼으나 완성하지 못한 첫 장편소설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이 이야기를 쓰는 동안, 나는 피아노 연주곡들을 종종 찾아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것은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16번이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던 슈만이 호프만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후 연인인 클라라에게 헌정했다는 곡.
나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노년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이 난실과 장 폴의 사랑이야기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난실과 장 폴사이에는 정말 무엇이 오갔던 것일까? 그것에 대해서는 나역시 모르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에게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걸던 ‘난실‘의 사랑스러움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도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제 한번 뵈러 가야겠네."
할머니가 요양원에 입원한 날, 명주가 말했다. 그러나 이후10개월간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명주의 암이 재발했기때문이다.
명주가 서른일곱 살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할머니는 그녀에게 유기농 브로콜리와 파프리카를 한 상자씩 사줬다. 수술직후에는 병문안을 가는 내게 현미떡 두 상자를 들려 보냈다.
"이걸 명주 혼자 어떻게 다 먹어."
내가 투덜거리자 할머니는 신신당부했다.
"너 명주한테 잘해라. 잘해야 돼."
막 수술을 마친 환자에게 현미떡을 갖다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이 맞나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나마 명주가

강화길 선베드77 - P77

다행히도,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자제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나는 나였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과하게 다가섰다. 기대했고, 실망했고, 미워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는견디지 못했다.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아주간신히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와 결코 가까워질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을 지켜. 선을.)명주를 만났을 때, 그러니까 서른두 살에,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가까워진 지 일주일 만에 싸웠다. 그녀가 내가 소개한 책의 2권을 보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 취향이 아니야."
그 말에 나는 미쳐 날뛰었다. 그녀가 마치 나를 거부한 것처럼 굴었다. 나를 비난하고, 평가한 것처럼 굴었다. 나는 이후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랬듯 그녀도 나와 연락을 끊을 것이고,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싫은 게 아니야. 그 책이 재미없는 거지. 그건 달라."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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