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번역자의 살찐 턱과 허름한감색 점퍼, 핏기 없이 노릇노릇하던 낯빛을 기억했다.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길고 거무스름한 손톱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정확한 이목구비만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이러 온 겁니인간입니다.
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 쪼그만 것 손 잡아서 끌고 오면 되지, 몇날 며칠 거기 있도록너는 뭘 하고 있었냐고! 마지막 날엔 왜 어머니만 갔냐고! 말해봤자 안 들을 것 같았다니, 거기 있으면 죽을 걸 알았담서, 다 알고 있었담서 네가 어떻게!

그란게 느이 작은형이 으어어어, 말도 아니고 뭣도 아닌 소리를 지름스로 지 형한테 달라들더니 방바닥에 넘어뜨렸다이. 짐승맨이로 울부짖음서 말을 한게, 무슨 이야긴지 뜨문뜨문하게밖에 안 들렸다이.

형이 뭘 안다고…… 서울에 있었음스로……… 형이 뭘 안다고…그때 상황을 뭘 안다고오.

둘이 그 꼴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나부엌으로 돌아왔다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무 소리안 들리는 것맨이로 전을 부치고 산적을 꿰고 탕을 끓였다이.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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