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특별한정판, 양장)
한강 지음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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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 P334

있었다. 그의 오른편과 왼편 무덤은 모두 고등학생들의 것이었다.
아마도 중학교 졸업 사진일 검은 동복 차림의 앳된 얼굴들을 나는들여다보았다.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도청에서 총을 맞았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스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에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이.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그렇게 끝까지 같이하기로 했는데, 이듬해 느이 아부지가 병을얻어 약속을 못 지켰어야. 겨울에 임종할 때엔 야속했다이. 이 지옥에 나만 남겨놓고 가는 것이..
허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을 나는 모른게. 거그서도 만나고 헤어지는지,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는지,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있는지 모른게, 느이 아부지 잃은 것을 가엾어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하는지 어떻게 내가 알었겠냐.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먼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 P190

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살아남기 위하여.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옵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살아남은 자의

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재판장님이 곧 들어오신다. 끽소리만 내도 즉석 총살이다, 알겠나. 입 닥치고, 끝까지 고개 숙이고 있어야 한다. 최후변론은 일분을 초과하면 안된다, 알겠나.
그들은 장전한 소총을 들고 의자와 의자 사이를 다니며, 자세가바르지 않은 사람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쳤습니다. 재판소 밖에서 가을 풀벌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새로 받은, 세제 냄새가 풍기는 깨끗한 푸른색 수의를 입고서 나는 즉석 총살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정말 닥쳐올 총살을 기다리듯 숨을 죽였습니다.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P122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지금도 나는 여름을 견디지 못합니다. 벌레 같은 땀이 스멀스멀 - P120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가지고 있는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CAN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히 무대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배우들이 별안간 꼿꼿이 허리를 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102 - P102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Hind Mezi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고요한 낮과 밤들이 지나갔어. 새벽과 저녁의 푸른 어스름들이지나갔어. 자정마다 찾아오는 군용 트럭의 엔진 소리가, 날카로운전조등 불빛들이 지나갔어.
그들이 다녀갈 때마다 가마니에 덮인 몸들의 탑이 하나씩 늘어갔어. 총을 맞은 대신 머리가 움푹 으깨어지고 어깨가 탈골된 몸들.
그 사이 드문드문 섞인, 환자복에 흰 붕대를 감은 깨끗한 몸들.
한번은 그들이 쌓아놓고 간 열몇사람의 몸들에게서 얼굴을 찾을수 없었어. 목이 잘려나간 게 아니란 걸, 흰 페인트칠로 얼굴이 지워졌다는 걸 깨닫고 나는 어른어른 뒤로 물러났어. 새하얀 은박지같은 얼굴들이 고개를 뒤로 꺾은 채 덤불숲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어. 눈도 코도 입술도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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