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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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간다.
달리 말해, 내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 간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갔다. 사실 내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애초의 용도와는 거리가 멀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돼지가죽 트렁크는 원래 축음기 상자였다. 먼지막이 외투는 아버지의것이었다. 우단 깃이 달린 도회풍 외투는 할아버지 것. 니커보커 바지는 에드빈 삼촌 것. 가죽각반은 이웃 카르프 씨가 준 것. 초록색 양모장갑은 피니 고모의 것,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받은 붉은 포도주색)실크스카프와 세면도구 가방만 내 것이었다.
아직 전쟁중인 1945년 1월이었다. 한겨울에 러시아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해 사람들은 뭔가를 주고자 했다.

짐 싸기에 대하여 9페이지

내게 일은 이미 일어났었다. 그것은 금지된 무엇이었다.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오리나무 공원의 제일 은밀한 곳, 짧게 자란 잔디 언덕 뒤편에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원 한가운데 있는 둥근 정자로 갔다. 공휴일이면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는 곳이었다. 한동안 정자에 앉아 있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의 틈을 빛이 뚫고 들어왔다. 나는 갈퀴 달린 하얀 덩굴손을 따라 이어지는 텅빈 동그라미, 네모, 사다리꼴의 두려움을 보았다. 그것은 내 혼돈의무늬였고, 어머니의 얼굴에 나타날 혐오의 무늬였다. 정자에서 결심했다. 다시는 이 공원에 오지 않으리라. 1 멀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자주 - 이틀을 못 넘기고 그곳으로 갔다. 랑데부하러, 공원에서는 그렇게들 말했다.
나는 처음 만났던 남자와 두번째 랑데부를 가졌다. 그는 제비라고

10 페이지

마지막 여름 랑데부가 있던 날, 나는 오리나무 공원에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환상(環狀)도로에 자리 잡은 성삼위일체교회로 들어갔다. 이 우연이 운명을 만들었다. 나는 다가오는 시간을 보았다. 제단 옆 기둥에 잿빛 외투를 입은 성자(聖 者)가 서 있었다. 그는 목에 외투 깃 대신 양을 두르고 있었다. 목덜미에 두른 양은 침묵이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목덜미의 침묵이 입 안의 침묵과는 다르다고 말할 때, 이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안다. 수용소 시절 이전부터 그 이후에 이르는이십오 년 동안 나는 공포 속에 살았다. 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
나라가 나를 범죄자로 가두고, 가족들이 나를 치욕으로 여겨 내쫓의리라는 이중 추락의 공포였다. 혼잡한 거리에서 진열장 유리를, 전차와 주택 창문을, 분수와 물웅덩이를 들여다보았다. 혹시 내 속이 비치는 건 아닐까 미심쩍어하며.

12. 페이지

헛간과 구덩이를 오간 발자국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더는 남몰래 음식을 날라줄 수 없게 되었다. 온 정원에 발자국천지였다. 눈이 그녀를 밀고했다. 그녀는 숨어 있던 곳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했다.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절대 눈을 용서하지 않을거야, 그녀가 말했다. 방금 내린 눈을 내가 다시 그 모양 그대로 만들어놓을 수는 없어. 아무것도 닿지 않은 것처럼 꾸며놓을 수는 없는 거라고, 땅은 그렇게 할 수 있지, 그녀가 말했다. 모래도 그렇고 마음만먹으면 풀까지도. 물은 스스로 제 모양을 그대로 만들어. 물은 닥치는대로 삼키고, 또 삼킨 후에는 곧 닫히니까. 그리고 공기는 늘 모양이똑같지.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까. 눈이 아닌 다른 것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을 거야, 트루디 펠리칸이 말했다. 이게 다 두껍게 쌓인눈 때문이었어. 눈은 마치 떠났던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갑게 왔지만 알고 보니 러시아인들의 종노릇을 한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것도 눈이 배신했기 때문이야,
트루디 펠리칸이 말했다.

페이지 21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서로 익숙해져갔다. 좁은 열차 안에서 사소한 일들이 일어났다. 자리에 앉고, 일어섰다. 짐가방을 헤집고, 쏟고 다시 꾸렸다. 용변 구멍에 일을 볼 때는 두 사람씩 담요를 들어 가려주었다.
소소한 일들이 사소한 일들에 딸려왔다. 가축운반용 열차 안에서 개인적인 것들의 부피는 줄어들었다. 누구나 개인으로서보다 여럿 가운데 누군가로 존재했다. 배려는 불필요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했다. 말하다보니, 어쩌면 나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조차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 비좁은 열차 안에서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고 트렁크에 먹을 게 아직 넉넉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사나운 굶 주림이 덤벼들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 이후 오 년 동안,

배고픈 천사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푸르스름한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 염소들을 애도하였 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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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날 밤 급작스레 어른이 된 건 내가 아닌, 내 안의 공포였을 것이다. 진정한 유대란 이런 식으로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볼일을 보는 우리의 얼굴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철둑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모두 달을 등지고, 꼭 들어가야 할 방문을 쳐다보듯 열차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를 버려둔 채 문이 닫히고 열차가 떠날까봐 미칠 듯 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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