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39p)”
『밤의 여행자들』을 읽다가 생각의 흐름은 수전 손택을 향하게 되었다. 재난을 당한 지역의 이미지를 이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 재난을 여행상품으로 만드는 스토리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읽었던 전쟁과 같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연민이 아닌 수치심을 느껴야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이 기억났고, 다시 『타인의 고통』을 펼쳐 들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화 시켜 상업적 목적이나 이념이나 권력화 시키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할 뿐 아니라,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사유에 대해 쓰고 있다. 주로 전쟁과 관련된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른 재난에도 해당되는 부분이 있다.
“상업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보는 현대의 이미지는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다양한 운명과 필연성이 모든 인간의 영혼을 어느 정도로까지나 종속시키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우연이 만들어 낸 심연에 의해 자신과 분리된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거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시몬느 베이유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60p)”
수전 손택에게서 소개 받은 책,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마주친 부분이다. 『일리아스』를 폭력과 힘이라는 방향에서 풀어낸 책이다. 어떤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몇 줄 읽어보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책 역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어느새 시몬느 베이유의 다른 작품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옮겨 담는다.
수전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로 『타인의 고통』을 시작하지만, 조금은 비판적이다. 익명의 희생자들의 사진은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심연만 깊게 할 뿐이다.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은 그 심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건들은 그 깊이와 거리를 없애고 재난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밤의 여행자들』의 주인공 요나는 여행사 ‘정글’의 직원이다. 벚꽃이 한창이었던 진해를 휩쓴 쓰나미와 봉사활동을 결합한 상품을 계획하는 그에게 재난은 상업적 이미지와 아이템이다. 다른 직원이 진행하고 있는 퇴출위기의 여행상품을 조사하고 보고하기 재난여행에 직접 참여한다. 그곳은 베트남의 한 섬, 무이에 있는 사막의 씽크홀 현장이다. 그곳이 운다족과 카누족은 사막에서 잔인한 전쟁 중이었고 그 참극은 곧 모래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었다. 무이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위해 그곳의 주민들은 이 사건을 재현한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렌즈에 담았다. 사고로 이곳에 낙오된 요나는 이곳에서 ‘폴’이라는 기업의 음모를 알게 된다. 이 섬의 여행지로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재난을 조작한다. 이 조작에 가담하는 요나는 실재로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폭로하는 것을 망설인다. 갑자기 들이닥친 쓰나미에 의해 그는 재난의 희생자, 여행 아이템이 된다. 쓰나미는 그와 저들 사이의 '심연'을 쓸어간다.
무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살육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경고하기를 거부한 성경의 '요나'를 소환한다. 트럭에 치인 사람을 무심히 치워버리는 장면을 그저 이상히 여기는 정도로 눈감아버리는 요나는 심장이 이미 식어버린 것일까?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재앙의 이미지를 상업적 목적의 광고로 활용했던 그 시간 동안 서서히 식어버렸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비해, 지금 그 뉴스를 보고 듣는 나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게 된다. 탈출하던 사람들과 기차역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의 영상들에 마음이 아팠고, 폭탄이 떨어지는 캄캄한 도시의 공포에 전율했었다. 지금은 뉴스에서도 그런 영상이나 이미지보다는 유럽과 미국,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내용들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더 많이 보인다. 전쟁의 소식에 지쳐갈 때 쯤 뉴스의 화면들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영상으로 교체되었다. 우리는 영상들의 홍수 속에 살면서, 우리는 새로운 자극으로 이전의 비극을 잊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음이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태원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당시 자신이 무심했던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이 저릿했다.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 우리 사이에 있는 그 심연을 생각하며 마음은 끝없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