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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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을 읽고서야 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시구로를 한참 열독할 때 읽었다. 발췌해놓았던 것을 확인하고 어이가 없다. 바쁘게 읽었거나, 집중이 안 되는 상황에서 억지로 의무감에 읽었거나 ……, 후자인 듯, 아니, 둘 다인 것 같다. 어차피 들었고 읽었던 기억이 희미하니 빠른 속도로 다시 읽었다. 뒷부분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흡입력이 이시구로의 다른 책보다는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영국에서 상하이로 다시 영국으로의 장소의 이동, 1930년에서 1937년과 1958년의 시간적 배경, 그리고 1910년대의 상하이 조계에서의 회상으로 이어진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의 구성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렇게 시공간을 넘나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1930년, 1931년 1937년 1958년으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주인공의 기억 속 진실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 읽고 나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를 애써 생각해야 하는 책이 있다. 이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 많아서 그럴까? 이 주제가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이 소설이 던지는 문제의식이랄까 주제는 줄리언 반스의⟪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나 이언 매큐언의⟪속죄⟫와 맥을 같이 한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 드러나는 모습은 더 많은 이유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편견은 보고 있는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판단의 칼날은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파탄으로 이끈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가 월도프와 런던에서 만난 세라 헤밍스의 태도, 그녀와 세실경의 관계는 오해와 비판을 일으키기 쉽다. 크리스토퍼와 사교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녀의 삶은 신분상승과 화려한 생활을 위해 결혼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세실경의 태도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세라 헤밍스와 결혼하지만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하이에서 만난 그들의 본심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랐다. 세라 헤밍스를 통한 경험은 가리워진 진실을 암시한다. 크리스토퍼는 어릴 적 상하이 저택에서 보고 경험하고 알고 있는 사실 뒤에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상하이 조계에 살면서 아편밀수와 연루되어 실종된 아버지와 어머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삼촌에 대한 기억을 쫓아 상하이로 온 그는 새롭게 밝혀지는 단서들을 만난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찾아 간 곳 난징은 전투가 한참이었다. 이곳에서 일본군이 되어있는 어릴 적 친구 아키라를 만난다. 부상을 당한 아키라와 한 밤을 지새우고 그는 영국대사관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를 구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삼촌을 만나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후에야 홍콩의 요양시설에 있는 어머니를 만났고, 그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그렇게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유년기에 묶여있던 상처를 치유 받는다.

작가는 영국으로 건너가기 전 상하이에 살았던 기억을 소설의 배경으로 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경험했던 영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생활과 에피소드 역시 소재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유년기의 불안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아키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아님 또 다른 친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국내의 국제 조계에서 일어난 납치 사건 당시와 중일 전쟁의 중국은 불안정한 모습이다.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8년의 홍콩은 새로운 세기를 맞는 것처럼 안정을 되찾아가는 모습이다. 크리스토퍼 뱅크스처럼.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뒤에 가리워진 개인의 삶의 진실들, 국가라는 거대한 의미 아래 감추어진 개별자의 인식과 삶의 의미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사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체된 인간들. 작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진실에 대해 많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아키라에 주목하게 되었다. 작가의 내면에 남아있는 자아를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유년기의 아키라는 상하이에서 일본에 돌아가는 것을 죽도록 싫어한다. 잘못을 저지른 결과에 대한 벌이 일본에 보내지는 것이 될까봐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일본 본토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일본 지식인의 자화상인가 하는 생각이다. 중일전쟁의 전장(戰場)에서 만난 아키라는 더욱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이탈해 도망쳐도 중국인들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있는 거할 곳 없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극우로 치닫고 있는 자신의 나라를 떠날 수도 돌아갈 수도 없었던 일본 지식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다. 상하이에서 영국에서의 작가의 정체성의 한 부분을 형성한 정서라는 생각이 든다.

전체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고아와 같은 정서와 정체성을 갖게 한다.

전쟁터 장면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에서의 시가전을 기억나게 했다. 인터내셔널 조직원인 프랑스인이 국공합작이 깨지고 중국군과 공산군이 전쟁을 벌인 1927년 상하이 전투에 참전한다. 그의 참전의 목적은 공산혁명이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반면 이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는 한 인간의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주친 전투다. 사상적 대의이든지, 개인적인 사건이든지 서로 얽힐 수밖에 없다. 참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 내심 충격을 받은 것은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곳에 도착해 이 주 동안 지위가 높든 낮든 이들시민들과 나눈 교제를 통틀어 정직한 태도로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문명 세게 선체를 집이삼키려 위협하는 큰 소용돌이의 중심부인 이곳에서 사람들이 딱하게도 공모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자주 목격한 젠체하는 변명으로 책임 회피 그 자체에만 골몰해 사태를 엉망으로 만들어 왔다. 그리고 지금 그런 그들, 이른바 상하이의 엘리트들이 여기에 모여, 운하 저편의 중국인 이웃들이 겪는 고초를 경멸어린 어조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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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15 2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체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고아와 같은 정서와 정체성을 가지게 한다.]우와 그레이스님의 이 문장은 밑줄 두줄 쫘악[전체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고아와 같은 정서와 정체성을 가지게 한다.]우와 그레이스님의 이 문장은 밑줄 두줄 쫘악 ५✍⋆* 난징 대학살 시대에 집단 수용소로 끌려갔던 영국 작가 JG발라드가 당시 십대 였는데 영국으로 가족과 함께 돌아 온후에도 수년간 스스로 몸과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고아‘라고 느꼈데요이 작품의 주인공 ‘아키라‘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아버지 모습을 투영 시켰죠. 상하이 태생으로 중국에도 일본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않은 씩씩한 사나이로 기억 하더군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레이스 2021-04-15 22:21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아키라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아버지의 모습이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4-15 22:32   좋아요 2 | URL
‘가지게 한다.‘
표현이 어색해서 ‘갖게 한다‘로 바꿨습니다. ㅋ
따로 떼어보니 이상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4-15 2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처음 읽은줄 알고 읽다보니 전에 읽었더라는(1Q84 1권 이였습니다 ㅎㅎ)
이시구로 📚이라니 이것도 읽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