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자유 - 민주주의 헌법을 해석하는 방법
스티븐 브라이어 지음, 이국운.장철준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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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연방 대법관이자 호주 시드니 법대를 비롯한 여러 법학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는 스티븐 브라이어 (브레이어)의 ‘역동적 자유’를 일독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보수주의적인 미국 사법 분위기에서 독특한 자유주의적 사법 관료로서 유명한데, 특히 지난 미국 동성결혼 합헌 판결로 전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Active Liberty : Interpreting Our Democratic Constitution’ 으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인 ‘Active Liberty’는 ‘역동적 자유’로 해석상의 배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역동적 자유는 우리 인민 (We the People)의 개념과 함께 시민의 자유와 재해석된 저자의 판단에 따르자면 ‘국가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주권적 권위의 분배를 가리킨다’고 기본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콩스탕의 입을 빌어 분석하고 있는 것에서와 동일하게 “입헌 민주정치에서 인민에 대한 깊은 확신은 크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중요한 인민 주권적 이해인데요. 이 점은 또한 “시민들의 참여적 자기 통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 시민들이 스스로를 통치하고 적극적으로 정치 참여를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운명은 민주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근래 루소의 인민 주권이 공화주의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를 뜻하는 것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가 신봉하는 제한주권의 논리, 즉 권력분립 및 견제와 균형의 정신”이라는 중요한 의미와 같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들의 확장된 의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법 체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소위 ‘전문직업인’으로 일하고 있는 판사들이 헌법자체의 문언주의적 해석에 고립되어 기득권층을 위한 역사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저자는 여러 인용을 통해 일관되게 경계하고 있는데요. 즉, 입헌 민주주의 하에 있는 판사들이 먼저 민주주의적 가치를 먼저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고, 반대의 측면에서 문언주의적 해악은 “민주적 정부의 틀을 창조하려는 헌법적 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을 띤다”고 주요 반론에서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이런 주요한 논리적 관점을 뼈대로 삼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건국 초기에 토마스 제퍼슨과 존 애덤스의 ‘권력의 면밀한 분립’의 초기 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례들을 포함한 사례들을 분석해보고 있습니다. 수정헌법 제1조에 관련해 콩스탕의 표현대로 “모든 시민들이 예외 없이 참여하도록 개방된 정부 형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는 판단과 더불어 미국의 제헌 헌법들이 대체로 시민들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집중함으로써 이를 위한 적절한 규제와 통제 또한 헌법의 틀에서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저자는 사법 관료와 전문 직업 등의 엘리트 들에 의한 지배 체제에 대한 견제를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해 그 필요성을 충분히 개진하고 있고 이런 입장에서도 오늘날 판사들의 역할이 매우 지대한 것을 다시금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수정헌법 1조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애초에 민주주의의 구조적 통치 과정을 수호할 필요에서 비롯되었던 표현 권리에 대한 강력한 보장으로 말미암아, 경제. 사회 분야에 관한 공적, 실질적 규제의 선택이 부당하게 제약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모든 통제에 구별 없는 기준이 적용되는 것과 유사한 부정적 파급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뒤이어 나오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조치와 관련해서는 명백히 오늘날 기술 발전 상황으로 인한 개인 자유와 기본권의 부정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데요. 행정부와 사법 당국이 아주 간편하게 “프라이버시를 위협받은 개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요건을 규정하기만 하면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프라이버시의 예는 사법적 신중성 측면에서 더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는 저자의 평가는 시의 적절하고 해당 판사들의 실용적인 고려 내지는 합법적인 속성을 구분하거나 이 자체를 종래의 문언주의적 판단으로 일관한다면 그만큼 중요한 민주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권력으로부터의 시민의 보호’가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측면에서 제가 전부터 고려해 온 사법부의 판사들이 많은 대중들과의 공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삼권분립하에 사법 관료들이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우리의 사례는 장기적으로 민주주의 제도하에서 저자가 입안하고 있는 이 ‘역동적 자유’와는 거리가 있는 경우라 여겨집니다. 물론 글에서는 판사들이 전문직업인으로서 고도의 법체계로 훈련된 전문 관료여야 하지만 따로 민주주의적 원리주의를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 남기는 것은 다소 제한적이고 판사 스스로가 문언주의 및 텍스트주의에 갇히지 말고 시민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민주주의에 있어서 뭐가 필요한지를 사실상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라 봐야겠죠.

연방주의와 총기 휴대에 따른 정당성과 같은 문제들에서도 저자는 이 역동적 자유에 근거하여 헌법을 해석하는 판사들의 일관된 문언주의적 해석을 경계시키고 있고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제도와 가치를 제일선에 두고 판결을 내릴 것을 내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앞선 연방주의 및 제도의 공고화가 시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토대를 위해 발전했고, 이런 대외적인 정부에 대해서도 “민주적 원리에 충실한 정부란, 실제로 작동가능하면서도 압제에 대항하여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실천적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정부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윤곽은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인식과 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판사들에게 하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한 논리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판사들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는 첨병으로 일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나라와 같은 국가 시험 제도하의 선출된 이 엘리트 사법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내지는 재임용과 관련 모든 문제를 사실상 법원에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배심원 제도와 비슷하게 시민과 학자들을 포함한 심의기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공수처 제도와는 별개로 그 필요성이 요구되어 보이고 또한 대중 정치에 대한 엘리트 지배 권력의 터무니 없는 확대 해석도 전환이 필요해 보입니다. 마이클 사워드가 지적했던대로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비전문성과 부족한 이해는 ‘면밀한 숙의 민주주의’로 해결이 가능하고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확대 만이 기득권 권력 정치를 불식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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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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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에게 근대 유럽사를 정리한 ‘포스트워 1945-2005’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이 글은 세상의 남은 자들을 위한 그의 애정어린 마지막 유고가 된 책입니다. 본디 그는 켐브리지에서 수학해 여러 유수의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 학문적 안착을 하기까지 역사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 불의와 부정의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가했던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이 된 이 논저도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끊을 수 없는 사명감이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에 타계했다는 부고 기사를 읽어보니 제 마음도 절로 무거워졌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원저는 지난 2010년 ‘ILL Fares The Land’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인 토니 주트는 이 글의 목적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총 6장의 주제와 1장의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특히 3장,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과 2장은 바로 이 3장을 위한 배경 설명이고, 나머지 4장과 5장 및 6장은 오늘날 이러한 사회적 모순 상황을 만든 총체적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바탕으로 그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는데요. 결론에 이르는 논증의 많은 과정에는 맨 처음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델 가운데 그나마 유럽의 그것이 낫다’는 도입으로 시작되고,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하여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를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진행된 국가로 나머지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을 그나마 사회민주주의 기반의 국가로 평가하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 모델에 대해서는 과세 형태와 복지 기반의 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약간의 제한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케인스주의가 전면적으로 철회되면서 ‘자유원리주의자’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초래한 오늘날의 급격한 사회문제는 크게 세가지 요인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에 있어 ‘합리적’ 선택에 너무나 많은 면죄부를 부여했고, 둘째는 경제적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부의 불평등이 더욱 완화될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세계화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셋째는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익히 말하는 합리적인 결론을 결코 도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토니 주트는 많은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시장의 심각한 문제 혹은 이로인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도덕’의 결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많은 ‘자유원리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주장했던대로 개인의 이기심을 본질적인 자유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가치를 반복해왔던 공공선과 공동체주의가 소멸에 이르렀다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역할론에 대한 재강조와 면밀한 과세 제도에 대한 기반을 앞선 공공선의 입장으로 저자는 재정립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논리 기반에 대해 대체로 수긍되지만,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본래 도덕적 기질을 갖고 있다’는 논법에는 크게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저자와는 반대로 인간 자체가 매우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존 입장에 찬성하고 단지 인간을 선악의 문제인 이분법으로 제한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도덕 자체와 관련해서는 교육과 이를 통한 공공정신의 필요성이 만드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흄의 도덕적 인식론에도 크게 동의하는 편입니다. 즉,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박탈한 것이 아니라 원래 도덕성과 도덕주의를 인간 주변에 머물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과거에는 존재했다고 밝히는 것이 좀 더 나은 해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의로 돌아가서 오늘날 미국과 유럽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 사회경제적 상황이 미국이 과거 작은 공동체로 시작되어 국가와 중앙정부의 권력 비대를 경계해온 역사적 전통이 기반되어 왔다는 것과 이를 바탕으로 개인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세와 복지를 이해하고 결국 마틴 길렌스가 미국인들이 복지와 세금 문제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갖게 된 원인에 비판적으로 화답한 것과 같이 저자도 이 점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한가지 여기서 따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만약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과거 미국의 매카시즘이 금방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측에는 묘한 감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뭔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이라는 해석에는 이상하게도 셀던 월린이 말했던 ‘전도된 민주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했다”는 보수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론이 앞선 논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수많은 민영화 논리를 강조하고 경제적 국경을 무너뜨려 전세계적인 경제 블럭이 결국 불평등과 사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은 것은 매우 자명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3장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은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학파’가 하이에크, 칼 포퍼, 조지프 슘페터 등의 이들 오스트리아 인들의 자유주의와 맛닿아 있으며, 일찍이 하이에크가 본디 밝혔던 것처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그 모든 간섭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전체주의로 인도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은 허구로 드러났습니다. 이 점은 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교의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최악의 혼합 경제’로 나타났고 달리 말하자면 “사기업이 무기한으로 공공자금의 지급 보증을 받게 된 것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철도와 같은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단물을 뽑아내고 이후 경영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국가로 환원하여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악순환을 빗댄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영국의 철도 사례를 간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런 차원의 이행과정에는 우리의 민주주주의적 결핍을 초래하고, 더욱 개인들을 파편화 시킨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얼마전에 이곳을 통해 서평을 작성했던 닉 콜드리의 ‘왜 목소리가 중요한가’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상이한 인식과 비판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민영화와 관련해서도 기업의 사실상 배타적 이익이라는 해석에서 콜린 크라우치와 그 이해를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해보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우리의 경제적 삶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저자가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생해야 하고, 과거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위해 마땅히 민주주의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필요성에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와 공공선의 가치를 다시 재정립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당위성과 관련하여 오늘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평가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죽기전에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글 마무리에서 언급하며 “우리에게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의무가 있다”는 대의 명제를 진정성과 함께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많은 이들을 위한 이론적이고 사회철학적인 글로 자리매김 하기를 일개 독서인의 마음으로 기원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은 보편적인 혜택을 납세액에 따른 선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과거에 시행되었던 ‘적합성 검사’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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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역사 문제 논형 일본학 41
하타노 스미오 지음, 오일환 옮김 / 논형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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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방대한 아시아 역사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센터장인 하타노 스미오는 일본 명문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특히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역임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전후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대한 연구와 일본 전후체제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놓여 있는 글이 소개할 이 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2011년 일본에서 출판되어 국내에는 2016년 논형에서 번역 출간을 맡았습니다. 번역을 맡은 논형은 서울대학교 일본 연구소와 더불어 ‘논형 일본학’ 이라는 카테고리로 국내에 몇 안되는 일본 역사, 사회, 정치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글의 서문에는 “일본 제국의 청산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도출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하타노 스미오는 현재 일본의 ‘전후 탈각의 시도’와 관련하여 그것의 주요한 원인을 연합국과 일본 제국간의 전후 강화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원인이 미국이 주도한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에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최종적으로 일왕을 전범에서 제외한 1946년 4월, GHQ와 맥아더 및 미국 정부의 결정”이 포함되고 이를 통해 일왕이 계속 재위에 존재함으로써 ‘과거 군사 침략에 대한 일본인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선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체제는 우리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은 익히 아실겁니다. 일본과의 교전국 지위를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배상과 청구권이 훗날 급조된 괴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그 당시에도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 등의 반대로 당시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한국을 교전국 지위에 올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최대 침략의 대상이었던 중국과는 대만의 장제스 정권이 그 국권이 날로 추락하여 유명무실해졌고, 반대로 베이징의 마오쩌둥 정권과는 1972년 당시 저우언라이와 다나카 가쿠에이가 식민 지배에 따른 배상 문제를 중공의 양보로 불문에 부침으로써 사실상 이런 일본의 국내 분위기와 맞물려 동아시아와 관련된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의 전후 태도의 모순이 더욱 고착화 되었습니다. 이 점은 현재 전면적인 일본 정치권과 국내의 ‘수정주의적 역사관’과 보통 국가화를 천명하는 ‘전후 탈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전후 도쿄 전범 재판부터 그 과정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연합군, 특히 미군 주도하에 이뤄진 도쿄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그 초기에 “일본인에게 패전이란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에게 참패한 것이, 중국전선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입장과 난징학살사건을 자각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마닐라의 강간’으로 알려진 필리핀 마닐라 시내와 주변지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해, 강간, 고문, 방화와 후에 언급되지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민간인을 동원한 무차별적인 ‘반자이 어택’ 등과 같은 일본군에 의한 광범위한 전쟁범죄가 이 재판 준비 시기에 희석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패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집중하게 되면서 미군에 의한 점령, 그리고 불만족스런 강화로 일본인들에게 인식되게 됩니다. 이에 저자는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조셉 그루의 회고록 가운데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전투의 종결을 촉진시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리화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내면화 된 패전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커티스 르메이가 주도한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 공습’인 도쿄 공습 등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부수적 피해’라고 비윤리적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일본 고위층이 소련과의 중재를 기대하는 등의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런 무고한 민간인 피해는 좀 더 줄일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런 정보들이 공개된 마당에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 공영에 대한 진실된 인정이 일본 국내에서 이처럼 거부되고 있는 것은 저같은 한국인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국민의 정부 시기 김대중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와의 전반적인 한일 협력 시기에 당시 일본 정부가 공동 성명에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배’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했고, 침략이라는 단어에 일본 국내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설명으로 이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는데요.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그동안 꾸준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조선인들을 분리해 달라는 한국 민간의 요구를 묵살하면서도 ‘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 출신 군인 및 군속 24만명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표리부동이 어떠한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조선과 타이완은 교전지역이 아니라 분리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돈을 쏟아 부은 셈’이라는 것”은 한국 국내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맛닿아 있습니다. 이로써 저는 한가지를 확인한 셈인데요.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침략주의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근본적 이익과 아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글의 마무리에서 “일본 정부는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적 비판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침략 전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후 체제에 대한 모순된 입장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라야마와 고노에 이르는 ‘주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사과’를 바탕으로 앞선 평가를 보인 듯 한데요. 이미 아베 일본 총리는 무라야마 및 고노 담화를 무력화 하는 것을 시도했다가 당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시도했던 일본 총리는 지금도 그 총리이고 오바마가 중재해서 나타났던 박근혜 정부와 아베의 ‘위안부 합의’가 어떤 식의 결과로 자리매김 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보통 국가화에 이 전후 문제는 심각한 국격 상실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으며, 여기에 기반이 되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은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 아주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사과 하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러한 우리 태도를 사과로 받아들여라” 바로 이것이 일본측의 본심이겠죠.

끝으로 이 책은 10장의 문제 제기 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에 대한 저자의 태도와 인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글 중간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일왕의 전쟁 책임을 법적으로 묻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히로히토의 퇴위라도 실행되어아먄 했으나 아시다시피 그는 천수를 누리며 아주 안온하게 삶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패전과 관련해서 일본 국민들에게 어떠한 본보기라도 보여줄 수가 없었던 것이 일본 정부와 권력층의 노골적인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이 지렛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역사 문제 전반을 주변국에 의한 불필요한 내정 간섭이라고 받아들이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이성적인 태도를 바라는 것도 물론 힘들죠. 그나마 최선이라고는 일본내의 리버럴한 지식인들이 뭔가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수밖에 없는데 이들도 역시 역사 문제와 관련해 교묘하게 국익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는 자들도 많아서 저는 딱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과의 협력이니 문화 교류라니 하는 것은 그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죠. 제가 비관주의에 탐닉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역사문제, 전후 체제와 관련된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 문제 만큼은 딱히 수월한 해결책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 이 책에서도 71페이지에 오탈자 한곳을 발견했는데요. 제가 구입한 것이 초판 1쇄이니 아마도 시중에 깔려 있는 책들이 다 똑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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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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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여년 간 줄곧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부생을 지도한 바가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 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 가지 중에 특히 “대중들이 대체로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하고 너무 무식하다”는 일종의 대중편협론에 반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의 서문에서 “낙제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민주 시민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학자와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앞선 이유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여년간 대학원 생들이 아니라 학부생을 지도한 것도 어린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고양시키고 보편적인 정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비범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약간 애매한 부분은 센게이지 런닝 (Cengage Learning) 이라는 곳에서 저작권 대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위키피디아에서 검색을 해봐도 특별한 내용은 없더군요. 대략적으로 대학 관련 교재를 대행하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1975년의 서문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70년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판은 1960년에 나왔고, 원제는 ‘The Semisovereign People’ 이며,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샤츠슈나이더의 기념비적인 논저라 지칭될 만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갈등,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혹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산다”는 바로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에 관한 인식과 가까워 보입니다. 이 갈등과 관련해서 저자는 약간의 양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본디 갈등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갈등 자체를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등의 사회화’라는 개념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많은 이익단체들이 경합하는 사회에서 경쟁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보고 있으며, 갈등의 사회화 역시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파급효과’ 내지는 ‘사회적 혹은 사회내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집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의 중요한 목적이 이들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스피노자의 한줄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이처람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국 정치의 핵심을 ‘정치 권력에게서 경제 권력을 분리하는 데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저로서는 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굳이 과거의 도금 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치열한 양당 정치의 대결 속에서 미국의 현대 정치가 수많은 정치 로비에 의한 ‘금권 정치’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 한때 앞선 그것이 가능했던 잭슨 대통령 시절의 정치적 이상주의 시대를 대입하는 것이라면 크게 벗어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뒤이어 정당 정치에서는 “정당 정치의 관점에서 이익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지하고 다른 특수이익집단의 그들의 ‘특수이익’과 이들 특수이익집단이 “실제 선거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들 집단이 정당 정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더욱 더 제약한다” 일종의 제한적 분석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를들어 현재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보다 확연한데, 아마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1960년대에는 이 복합체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당시에 밝혔던 국가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을 샤츠슈나이더 역시 과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의 많은 내용이 추가되거나 바뀌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익 집단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들을 공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추동하고, 4장에서 밝히고 있는 갈등의 치환의 주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갈등의 관리’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한다”는 양면적 측면과 “공동체 내의 모든 긴장을 이용하려는 정치체제는 산산이 부서져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해석도 ‘관리’의 필요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적 이익으로 인한 갈등을 공동의 이익의 측면으로 확장시키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앞선 사적 이익을 큰틀에서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감히 판단해봅니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현재의 미국에서 이들 이익 집단들의 꽤 규모와 응집력을 보이는 것은 개인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데 미국 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파악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권력 독점의 출현을 예방하고자 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원래 자유의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에 도입한 이들이 미국인이어서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적인 공동제주의적 역사가 있는 국가들에게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정치사회적 토양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5장은 정치적 패러다임이 서로 뒤바뀌게 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역사적 변화를 소개하고, 규모로는 전국 정당의 위치에서 각각의 지지기반인 ‘기업-공화당, 조직 노동-민주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과 공화당 간의 관계를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꽤 견고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6장은 정당 정치와 더불어 많은 수의 미국 유권자가 스스로 투표 참여를 포기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매우 소리 높여 “만약 4천만의 성인 시민이 법에 의해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 체체의 성격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지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법 외적 수단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우려합니다. 법적인 문제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정권 포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익히 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원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데요.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고전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그들 개개인이 가진 자발적 욕구의 강도와 그 보편성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제시합니다. 이 장의 중간에 “상당수 정치적 주장 내지 정책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약 4천만 명의 투표 불참자들이 그 정책과 주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정치체제와 정당의 현실론과 관련해 설명을 하고 있지만 크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냉소를 갖게 된 것은 “대중이 너무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정의가 상정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대중이 경쟁적인 권력 체계를 좋아하고,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둘 다를 원하다는 것”은 복잡한 민주주의적 사회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 판명됩니다. 조직화된 여러 특수 이익이 미국 정치의 주된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많은 국가들에게서 유산 계급이 사실상 대중 권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갖고 있는 것과도 상반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권력이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 보이나, 날이 가면 갈수록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가 사그라드는 것은 그 이유가 대중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 자체가 본래적 이상주의에서 변질되어서 그런것인지는 양자 사이의 선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물음인 “과연 권력을 누가 쥐고 또 어떤식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샤츠슈나이더 역시 이 루소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현실 정치의 문제가 엄연히 우리 시민에게 국한된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 현실 정치에 관여해야 되는 정당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겠죠. 듀이와 토크빌이 우려했던 우리의 민주적 정치가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이익 집단의 측면에서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한 것에 대한 판단은 저자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기업 권력과 정치 권력의 분리 작업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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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사워드 지음, 강정인.이석희 옮김 / 까치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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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마이클 사워드는 영국 코벤트리에 소재하고 있는 워릭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시드니 민주주의 네트워크 (The Sydney Democracy Network)의 회원으로 활동중인데요.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오늘날 민감한 정치적 변화 시기의 여러 핵심적 이론들을 연구하고, 어떻게 현실에서 작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포괄적 연구들입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서 호주에서는 꽤 유명한 정치학자로 인정 받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는데요. 아마도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언론과 여러 저작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놀라운 학문적 작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원제는 ‘Democracy’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까치에서 2018년에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우선 마이클 사워드는 자신의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두 가지 논점이 있는데요. ‘첫번째는, 과연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참여는 중요한가. 두번째로는, 오늘날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과 만연한 환경 문제를 민주주의가 해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 내지는 의문을 갖고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형태, 성격, 기원, 의의 등을 논리적으로 규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1999년 10월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마샤라프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 개표 상황, EU 체제와 유로화 가입에 대한 영국의 민주주의 캠페인 이 3가지를 ‘과연 각각의 국민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그 본질성을 살펴보고, 2장은 미헬스를 거쳐 조지프 슘페터의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고찰하고 3장은 앞선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비판과 함께 이론적 대안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은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들에 대해 살펴보고, 5장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치철학의 이론과 현실정치의 여러 고민들을 틈새에서 몇가지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으로 마지막 약간의 결론을 통해 글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는 민주주의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혹은 이론적 서술 (naration)을 통해 텍스트적인 상호접근식 방법의 형태로 일관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즉, 1차대전 당시 ‘인류 문명의 파괴’에 따른 민주주의적 회의와 그에 따른 미헬스의 입장들, 뒤이어 2차대전을 치루고 이후에 등장한 조지프 슘페터의 소위 민주주의에 있어서 ‘정치과학적’ 이론 소개하고 각각의 주장을 또 다른 여러 정치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으로 비교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 자신은 꽤 관찰자의 시선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되는 곳곳에 저자의 인식이 또 보여지기도 합니다. 우선 미헬스는 그의 정당론에서 “민주주의는 과두제로 이르게 되며, 필연적으로 과두제적인 중핵을 포함한다”고 전제하며 조지프 슘페터도 동의한대로 ‘엘리트에 의한 관료지배’를 안정적인 선택으로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슘페터 역시 “유권자들의 역할이란 정부를 산출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명백하게 단정하고 있는데요. 정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현실주의적 정치 이론’라 여겨지지만 미헬스와 슘페터는 ‘이 현실적인 한계’를 매우 중요하게 파악했지만 동시에 정치 일반을 소급적인 수단화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이를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되어 왔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단순한 권력의 위임자로 국한시켜 해석한 부분은 분명 동의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이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당위성이 민주주의 자체가 ‘민중 권력의 가시적 형태’라는 측면의 이해와 ‘오늘날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이해 관계와 정치적 상황을 과연 대중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관련해 앤서니 다운스가 옹호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의 인식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앞선 사례들과 거의 비슷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작다고 평가하지만 저는 이것에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전에 태국의 변호사와 의사들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농민이나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크 랑시에르도 진단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과두제의 위협은 지대한 것입니다. 에릭 홉스봄도 처칠과 같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관론을 견지했던 바가 있는데요. 이러한 소위 ‘정치과학자들’은 “평등주의적 열망은 망상”이며, “제어하기 힘든 민중적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소위 상위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엘리트 지배 정치가 모순인 것은 “평범한 남성과 여성 대다수에 대한 깊은 불신”이 지배하는 것으로 저자 역시 이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로버트 달과 벤자민 바버가 천착했던 다원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수단만이 이러한 ‘엘리트 지배 체제’로 획일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물론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와는 아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18세기 말 공화주의 시기의 루소는 그의 일반의지로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고 그들 모두가 참여해서 만들어내는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가치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특히 “자유주의가 불안정과 불안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기적인 공동체주의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설득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 ‘대중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단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좋은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각 국가들이 지구화 과정에 놓여 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소수에 대한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에 이르고 있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불균형적인 관계로 발생하는 문제들의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로버트 달이 주장했던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제는 국가 단위의 권력 규모를 보이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과 정치 권력이 영합해 나가고 있는 거대한 경제 주체들의 영향에서 전통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는 사실상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권력이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선언적인 의미로서 국한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이 우려의 본질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글의 결말에서 보이는 대로 저자는 모두에게 각자가 인식하는 민주주의는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민주주의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거의 딜레마에 가깝지만, 각각의 시민들이 집중하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스스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전세계의 심각한 환경 오염과 이것의 피해는 세계의 국제정치가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증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중국 학자 엔쉐퉁이 현재 세계는 “민주주의적 과잉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실상은 세계의 민주주의가 ‘공표’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현실의 민주주의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기반하고 있는지 이 책은 꽤 면밀하고 상세히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연관된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딱히 책을 잡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언급된 다두제(일종의 다원주의적 정치체제)의 핵심 조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선출직 공직자들
2.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3. 포괄적인 선거권
4. (누구나) 공직에 출마할 권리
5. 표현의 자유
6. 대안적인 정보
7. 결사의 자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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