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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 우리에게 근대 유럽사를 정리한 ‘포스트워 1945-2005’로 깊은 인상을 남긴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이 글은 세상의 남은 자들을 위한 그의 애정어린 마지막 유고가 된 책입니다. 본디 그는 켐브리지에서 수학해 여러 유수의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 학문적 안착을 하기까지 역사학자로서는 매우 드물게 불의와 부정의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가했던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이 된 이 논저도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끊을 수 없는 사명감이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10년에 타계했다는 부고 기사를 읽어보니 제 마음도 절로 무거워졌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원저는 지난 2010년 ‘ILL Fares The Land’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인 토니 주트는 이 글의 목적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되는 총 6장의 주제와 1장의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특히 3장,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만으로도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1장과 2장은 바로 이 3장을 위한 배경 설명이고, 나머지 4장과 5장 및 6장은 오늘날 이러한 사회적 모순 상황을 만든 총체적 신자유주의의 비판을 바탕으로 그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는데요. 결론에 이르는 논증의 많은 과정에는 맨 처음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델 가운데 그나마 유럽의 그것이 낫다’는 도입으로 시작되고, 특히 이 부분과 관련하여 미국과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를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진행된 국가로 나머지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을 그나마 사회민주주의 기반의 국가로 평가하며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 모델에 대해서는 과세 형태와 복지 기반의 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약간의 제한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케인스주의가 전면적으로 철회되면서 ‘자유원리주의자’와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초래한 오늘날의 급격한 사회문제는 크게 세가지 요인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에 있어 ‘합리적’ 선택에 너무나 많은 면죄부를 부여했고, 둘째는 경제적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부의 불평등이 더욱 완화될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세계화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고, 셋째는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익히 말하는 합리적인 결론을 결코 도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토니 주트는 많은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시장의 심각한 문제 혹은 이로인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도덕’의 결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많은 ‘자유원리주의자들’이 강조하고 주장했던대로 개인의 이기심을 본질적인 자유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역사에서 오랫동안 그 가치를 반복해왔던 공공선과 공동체주의가 소멸에 이르렀다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역할론에 대한 재강조와 면밀한 과세 제도에 대한 기반을 앞선 공공선의 입장으로 저자는 재정립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논리 기반에 대해 대체로 수긍되지만,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본래 도덕적 기질을 갖고 있다’는 논법에는 크게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는 저자와는 반대로 인간 자체가 매우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존 입장에 찬성하고 단지 인간을 선악의 문제인 이분법으로 제한적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도덕 자체와 관련해서는 교육과 이를 통한 공공정신의 필요성이 만드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흄의 도덕적 인식론에도 크게 동의하는 편입니다. 즉,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박탈한 것이 아니라 원래 도덕성과 도덕주의를 인간 주변에 머물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과거에는 존재했다고 밝히는 것이 좀 더 나은 해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의로 돌아가서 오늘날 미국과 유럽을 다르게 인식하게 된 사회경제적 상황이 미국이 과거 작은 공동체로 시작되어 국가와 중앙정부의 권력 비대를 경계해온 역사적 전통이 기반되어 왔다는 것과 이를 바탕으로 개인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과세와 복지를 이해하고 결국 마틴 길렌스가 미국인들이 복지와 세금 문제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갖게 된 원인에 비판적으로 화답한 것과 같이 저자도 이 점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한가지 여기서 따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만약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과거 미국의 매카시즘이 금방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측에는 묘한 감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뭔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이라는 해석에는 이상하게도 셀던 월린이 말했던 ‘전도된 민주주의’와 닮아 있습니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했다”는 보수주의적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식론이 앞선 논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수많은 민영화 논리를 강조하고 경제적 국경을 무너뜨려 전세계적인 경제 블럭이 결국 불평등과 사회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은 것은 매우 자명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3장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은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시카고 학파’가 하이에크, 칼 포퍼, 조지프 슘페터 등의 이들 오스트리아 인들의 자유주의와 맛닿아 있으며, 일찍이 하이에크가 본디 밝혔던 것처럼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그 모든 간섭이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전체주의로 인도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은 허구로 드러났습니다. 이 점은 민영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교의가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최악의 혼합 경제’로 나타났고 달리 말하자면 “사기업이 무기한으로 공공자금의 지급 보증을 받게 된 것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철도와 같은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단물을 뽑아내고 이후 경영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국가로 환원하여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악순환을 빗댄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영국의 철도 사례를 간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이런 차원의 이행과정에는 우리의 민주주주의적 결핍을 초래하고, 더욱 개인들을 파편화 시킨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얼마전에 이곳을 통해 서평을 작성했던 닉 콜드리의 ‘왜 목소리가 중요한가’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상이한 인식과 비판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민영화와 관련해서도 기업의 사실상 배타적 이익이라는 해석에서 콜린 크라우치와 그 이해를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해보였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우리의 경제적 삶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저자가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상생해야 하고, 과거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위해 마땅히 민주주의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필요성에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공동체와 공공선의 가치를 다시 재정립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당위성과 관련하여 오늘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평가에도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죽기전에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글 마무리에서 언급하며 “우리에게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의무가 있다”는 대의 명제를 진정성과 함께 설득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많은 이들을 위한 이론적이고 사회철학적인 글로 자리매김 하기를 일개 독서인의 마음으로 기원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자유주의 정권들은 보편적인 혜택을 납세액에 따른 선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과거에 시행되었던 ‘적합성 검사’를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