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 Trans & Cross 2
콜린 크라우치 지음, 유강은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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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저명한 사회학자로 알려진 콜린 크라우치의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일독했습니다. 크라우치는 크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포스트민주주의로 유명한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쓴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고 나서 신자유주의를 다룬 이 책을 너무나 구하고 싶었는데요. 마침 절판된 상태라 개인 중고 거래를 제외하면 딱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운좋게 제 손에 들어왔고, 천천히 정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원제는 The St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이며, 지난 2011년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2년 소개되었는데요. 앞서 언급해드렸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시중에서 책을 구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모쪼록 재간행이 이뤄지길 빌어 봅니다.

우선 크라우치의의 이 책이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민주주의는 측정 가능한 단일 지표를 제공하는 이윤처럼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국가의 긴밀한 관계를 전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의 정치경제적 유산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탈한다”는 설명입니다. 후자의 설명과 관련하여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데요. 사실상 2차대전 당시 자유주의가 국가와 대결하던 배경과 과정이 현재의 신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르며, 폭넓은 시민 자유가 좌파와 연계되어 있다면,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자유 시장 체제에서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이들의 가치 체계로 진화 내지는 왜곡되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정부의 “무산자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가” 많은 자본가와 기업가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공유하며 이러한 경제적인 관념이 점차 견제 없는 지배 이념이 되어왔던 것이 루즈벨트와 케인즈를 관으로 내몰면서 초래했던 그 과정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고, 전통적으로 공리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사회사상적 배경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으로 배격당하고 심지어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철지난 계몽주의로 공격하는 일까지 등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자유 시장 문제를 근본적인 측면에서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즉 2장부터 4장까지가 이러한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시장의 특징과 많은 경제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시장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이런 자유 시장 체제에 대한 결과론이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거대 기업의 이익’으로 나타났다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의 융합에 대한 시도와 가능성을 매우 비판하고 있고, “시장에서 거대 기업은 자신들만 혜택을 누리게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시장의 진입 장벽을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집중하는 참여자들이 매번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입장을 같이하고 뒤이어 이어진 미국 행정부의 경제적 정책의 이론적 기반이 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시카고대 경제학파의 주장과 사상에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점이 지배하는 정치화한 경제의 정치적 함의를 전혀 다루지 못한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의 다음과 같은 말도 그 한계가 명백합니다. “기업에게는 주주 가치 극대화 이외는 어떠한 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목표를 결정할 권리도 전혀 없다”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애초에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실행되기 전에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이러한 신사조가 등장하고 기업이 점차 힘을 갖게 될 때 ‘정치적 다원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중도 좌파 및 진보 세력의 궤멸이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이상을 유감스럽게도 뒷받침하지 못하고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더욱 강화되어 왔습니다. 글 초입에 신자유주의가 쇠퇴하기는 커녕 더 강화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연유에는 “고삐풀린 경쟁이 금융 시장 자체를 깎아 먹는 상황임에도” 대마불사적 입장의 ‘이익은 자신들에게, 손해는 사회에게 맡기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사회와 시민을 담보로 잡는 무참한 사익추구와 금융인들의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시장이 어떠헌 규제나 견제 장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나, 국가와 사회를 담보로 잡는 이 이익화에 대한 어떠한 규제적 장치가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경제 체계에도 일절 도움이 안되는 이기심이겠죠. 마찬가지로 제가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2008년 이후에 정권을 잡은 오바마 행정부가 금융 위기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시장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국가-시장-기업’ 의 3자 관계에서 새롭게 ‘시민사회’를 결합시켜 4자 관계로 확대시켜야 하며 이와 관련해 7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급진적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학자들이 시민들의 역할과 다양한 토론과 논쟁이 수반된 좀 더 강화된 시민사회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집단 지성과 관련해서도, 또한 광범위한 정치 참여가 용이해진 오늘날의 SNS과 같은 소셜미디어의 발달을 보더라도 이러한 명제가 쉽게 도달할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만 점차 자본주의적 소비 지상주의에 노출되고 만연된 정치적 불신에 직면한 시민들이 과연 옳은 과정으로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쉽게 단언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회경제적 기득권들과 명목상은 이를 지지하는 척 하는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시민-민주주의’의 중요한 도식이 계속 옅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도 간혹 엿볼 수 있지만 앞으로도 신자유주의가 중요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견제할 건전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경제 불평등의 시기에 시민이 자신들이 손수 맡아서 해야 될 정치적 책임을 과연 마땅히 해낼 수 있을지 실로 많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우치의 이 책은 다시금 이러한 상황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새삼 곰곰히 생각해보게 하는 유익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밝히지만 어서 빨리 재출간이 이뤄지길 간절히 빌어 봅니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가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시장에 결합된다 혹은 결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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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 일과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
가이 스탠딩 지음, 안효상 옮김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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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가이 스탠딩은 영국 런던대학의 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교수이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공동창립자이자 현재 명예공동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정 노동자 계급을 일컫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연구로 명성이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인 그가 몸담고 있는 BIEN의 기본소득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아마도 이 책에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2017년에 ‘Basic Income’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8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단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일전에 클리포드 H. 더글러스의 ‘사회신용’과 피터 반스의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 배당’ 등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습니다. 역시 기본소득과 시민배당에 관한 주제였는데요. 다만 가이 스탠딩의 이 책은 좀 더 자세한 논의와 상세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꽤 많이 준비를 했고, 논리들이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고, 번역도 제법 훌륭하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모로 기본소득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기본소득을 중요하고 강조하는 논리로서, “공화주의적 자유”를 먼저 꼽고 있습니다. 이 공화주의적 자유란 “힘있는 사람들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선택을 가로 막지 못하도록 정부가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논리인데요. 저자는 이에 “우파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전통에 대립하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자유에 부여하고, 이것은 노골적인 권위주의 보다 위험한데, 그 이유는 부당하고 조작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많은 우파들이 자신들의 자유 보장을 제일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대체로 타협이 불가능한 절대주의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허버트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자들과 다윈의 진화론을 과격하게 인식해 도금 시대에 포드와 카네기와 같은 부자들의 더 많은 부를 쌓게 되는 이론적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우파의 자유지상주의는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적 권력에 가깝고 투사할 수 있는 각종의 영향력을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 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시민들의 자유는 바로 앞선 ‘공화주의적 자유’이며 이것은 명백하게 힘있는 자들과 노골적인 권력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공리주의적 자유가 더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기본소득 또한 이러한 공리주의적 이론에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은 “현재의 경제 정책과 사회 정이 지탱할 수 없는 불평등과 불의를 낳는다는 인식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급진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정치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지위를 보장 받기 위해 기본 소득은 받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한 기본 소득을 통한 자신들의 시민적 공통 의식과 공감대를 더욱 함양할 수 있으며, 추측하건대, 이것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의 발전 요소가 될 것입니다. 루소와 토크빌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많은 사상가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이 책의 3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본소득이 저자가 단언하는대로 ‘민주화의 도구’라면 우리 시민은 단순하게 도덕적 해이나 과거 레이건이 왜곡한 ‘복지여왕’과 같은 왜곡에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도덕적 해이’는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의 소위 입안자들과 원인 제공자들이 미국 당국에 의해 아무런 기소도 당하지 않고 유야무야 했던 것으로 이들 금융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가 어떠했는지 비교가 가능할 것입니다. 토크빌이 공화주의에 있어서 다수에 의한 폭압을 걱정하고 우려했다면, 이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사회의 절대 다수에 피해를 끼치고 책임을 지지 않는 이 소수의 금융인들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할지는 매우 자명합니다.

저자인 가이 스탠딩도 이들 금융 엘리트들과 이들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 부유층들에 대한 예를 들며, 과연 이 보수적 부자들과 이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이 다수의 시민들이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기본소득을 거부할 권리가 있을지에 대해서 일관되게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사실 경제 성장이라는 이유로 이 기본소득에 대한 시기상조나 재원 문제가 나오고 있는데요. 스탠딩은 국가의 가처분 소득과 재원 마련에 대한 여러 루트를 소개하면서 최소한의 ‘시민배당’과 같은 원리로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위스의 직접투표와 같은 이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정치적 실험들도 충분히 가능하고 현재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와 인도, 이란과 같은 개도국들의 사례를 들며 그 기본 효과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유럽의 이민자와 난민 문제로 인한 이 기본소득의 범주 안에 있는 해당 시민들의 규정 문제가 논란이 되어 온 점을 제외하면, 미국과 같은 경우에도 단순한 복지 차원에서의 한계적 지원 말고 기본소득의 제공과 함께 워크페어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투입하면 그 성공 가능성이 더욱 올라갈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확률을 더욱 높이고, 위험하고 어려운 낮은 급여의 일자리에 내쫓기는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효과를 기본소득이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재원과 관련하여 선결 과제라 볼 수 있는 증세의 문제도 부유층에 대한 금융거래세를 강화하고 세금 탈루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 조세피난처에 자금을 숨기는 등의 불법적인 문제를 해당 정부가 강력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득권과 부유층의 이득을 몸소 방어하고 있는 이 우파들이 정말 민주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신념을 보인다면 다수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앞선 불법적인 행태에 대해 스스로 먼저 자정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법에 의한 평등과 법에 의한 지배를 공유하고 있다면, 자신들이 민주주의 제도하에 고립되고 불침의 ‘과두제’의 우두머리들이 되지 않겠다는 양심고백이 필요하겠죠. 이러한 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주주의적 결사의 자유가 시장의 가치와 자유시장체제를 해칠 수도 있다는 이유로 1980년대부터 사실상 제한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가 끄집어 냄으로써 시민 대다수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가 비열한 행동을 할 경우 시민들 사이에서 비열함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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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 좌파 -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2
피터 싱어 지음, 최정규 옮김 / 이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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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싱어는 호주 출신으로 세계적인 생태윤리학자이면서 공리주의를 기초로 한 인간의 도덕체계를 정립하여 전반적인 사회 불평등 문제를 다루고 2012년에는 이러한 학문적 연구와 활동을 바탕으로 호주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의 주인공이 된 바가 있습니다. 인간 본성의 이해를 결여한 좌파를 비판한 이 ‘다윈주의 좌파’는 원제인 ‘Darwinian Left : Politics, Evolution and Cooperaton’ 으로 지난 2000년 출판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같은해 출판된 구판이 새롭게 2011년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자리를 빌어 한가지 고백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지난날 저는 허버트 스펜서의 ‘개인 대 국가’에 대해 서평을 작성한 바가 있는데요. 피터 싱어의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앞에서 언급해 드린 스펜서의 글의 이해를 돕는 약간의 보론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저 역시 이와 관련하여 약간의 도움을 받았는데요. 일단 이 부분을 밝히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취지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이 스펜서를 비롯한 우파적 사회진화론자들에 의해 사회 도태와 더 많은 경쟁이 선이라는 가치 체계로 당시의 거대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나 반대로 좌파는 인간 본성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임에도 이 본성이 변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이것과 연관이 높은 다윈주의를 배척하고, ‘인간의 사회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바로 좌파의 모든 것’인데 이념과 행동주의와 관련하여 동시에 실패해 왔다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윈주의를 좌파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피터 싱어가 쓰고자 하는 글의 요체입니다. 즉, “인간 본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다윈주의적 사고가 좌파로부터 배척당한 게 아닌가” 하는 저자의 추측도 담겨져 있습니다.

일찍이 다윈주의에 대해 많은 사상가들이 사회적 약자를 도태시키고 마땅히 강자가 그 승리를 취한다는 관점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될 수 있음을 예측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받아들인 사람이 허버트 스펜서입니다. 제가 그의 논저 ‘개인 대 국가’에서 다뤘던 것처럼 전반적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도태를 광범위하게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거대한 기업가들과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로서 각광을 받아 왔고, 오늘날에도 그런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과 우파들에 의해 스펜서는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의 좌파는 이기적 인간의 본성을 포함한 본성 자체의 아주 치밀하고 철저한 이해를 선행해야 한다고 싱어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점이 선결되어야 다음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사실 다른 측면으로 본다면 ‘이 우파들이 다윈의 논의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 동안 너희 좌파들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로 바꿔 생각해 볼수도 있을텐데요. 앞서 제가 요약한 바대로 좌파는 사람들의 모든 고통을 절감하고 덜어낼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것은 버트란드 러셀이 밝힌 ‘진보주의 및 좌파의 선명성’으로 어떻게 보면 원초적인 양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다른 책의 서평을 통해 ‘신자유주의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인식을 깨우친 바가 있습니다. 많은 우파들의 가치 체계가 경쟁과 개인들의 이기심 및 이익 추구가 선이라는 관점하에 불평등과 사회 하위층들의 삶의 고단함 등을 애써 무시한 바가 있고, 전반적으로 이러한 우파들의 이러한 가치관념적 기조가 1970년대 이후 루즈벨트와 케인즈의 사회 협력적 정책이 뒤안길로 사라지며 신자유주의가 대세가 되면서 강력한 사회 가치적 주장이 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제 다시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로 관심을 돌릴때다’와 같은 주장들이 어이없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피터 싱어는 “사회적 지위상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사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전제하고, 이것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항상 있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프랑스 혁명을 통한 나폴레옹의 짧은 신분 개혁이나 귀족 제도를 일소한 지금에도 항상 이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급 위상이 등장했고 이점은 앞으로도 증명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 계급적 인식의 날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이것을 최소화 시키고 좀 더 다수의 이익에 수렴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바로 좌파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강력한 원리로서 작동하는 고착화한 체계를 견제하는 좌파 스스로의 ‘말하고 시비거는 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주의적 관점에 너무 경도되어 있다는 점도 명백한 패착이라고 볼 수 있겠죠. 더욱이 저자는 시장의 경쟁에 대한 관점에서도 다수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중상층 계급에서의 부의 증가가 극빈층에게 돌아갈 삶의 처참함을 보상할 수 있을 정도로 큰지 의심스럽다”라고 판단하며 글의 후반인 협력과 협조의 문제에서도 “부와 권력에서의 불평등이 커지면 그만큼 상호 부조를 할 유인이 없어지게 된다”면서 현실적인 측면의 인식과 고려를 하면서도 반대의 대안을 위한 필요성을 모색하는 등의 노력을 이 글을 통해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또 “약자, 빈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섬으로써 좌파가 가졌던 전통적 가치를 (다시금) 옹호해야 하며, 다만 어떤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이들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 곰곰이 연구해야만 한다”고 당위성과 그 노력을 좌파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전체적으로 좌파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거품을 뺀 좌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유토피아적 사고를 버리고 실제로 어떤 것이 성취 가능한지에 대한 냉철한 현실적 비전으로 대체할 것”으로 결론내고 있습니다. 피터 싱어의 이 말은 진보주의와 좌파에 있는 많은 이들이 깊게 새겨야 하는 것으로 저는 느껴졌습니다.

오늘날까지 민주주의는 자유 시장경제라는 측면의 동반자를 데리고 발전해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양가적 측면에서 이 자유 시장경제적 입장 또한 어두운 면을 초래해 왔는데요. 민주주의의 균형과 견제의 원리로서 노골적인 정치 투쟁이 아니라면 정치 세력의 좌우파의 균형적인 사회 이론적 경합이 사실상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좌파가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스스로 당면한 역할론을 걷어참으로써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오로지 ‘자유’의 날개 하나 만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죠. 이제 다시 ‘평등’의 문제를 되살리고, 이러한 역할을 좌파가 자임함으로 많은 시민의 지지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피터 싱어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쓸만한 이론적 체계를 이 책을 통해 좌파들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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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예일대학 최고의 명강의 오픈예일코스
스티븐 스미스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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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스티븐 스미스는 미국 테네시 대학을 졸업하고, 더럼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이후, 미국의 정치 및 철학 명문 예일 대학에서 오랫동안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권위자이자 마찬가지로 정치철학과 정치사상사를 깊게 연구한 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정치철학’ 이라는 분야를 개인적 차원에서 세계와 인간사를 조망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결 조건으로 그동안 이해해 왔습니다. 저자인 스티븐 스미스는 이와 비슷한 관점으로 “정치철학은 정치적 삶에서 가장 심오하고 다루기 힘들며 영속적인 문제들을 연구해 왔다”고 평가하며, 현재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왜 이 정치철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만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여기 이 책이 잘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감한 연구물은 국내에 오픈 예일 코스라는 예일대학 최고 명강의 시리즈로 앞선 이안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가 첫 테이프를 끊은 바가 있습니다. 원제는 ‘political philosophy’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총 12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철학이 있게 한 중요한 사상가들을 각각 분석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빌헬름 바이셰델의 ‘철학의 뒤안길’과 유사한 서술 구조가 아닌가 판단해 봅니다. 또한 우리의 정치학과 정치철학이 어떻게 탄생했고 뒤이어 어떤 식으로 분화되고 발전되었는지 ‘인식의 조감도’를 이 책을 통해 조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내용으로 미국의 한 대학의 학부에서 강의로 이뤄지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교습 행위 정도가 아니라 강의를 듣는 이들의 면밀한 배경지식과 수준높은 이해력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학부생들이 이러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또한 이해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최고위 학부여서 그런지 아니면 이미 미국 고교 시절부터 이러한 선행학습을 몸에 익힌 것인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사뭇 놀라운 감정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더군요.

본격적으로 글을 논의하기에 앞서, 이 정치철학이라는 분야가 저자의 언급대로 ‘정치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분야’인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다만 철학과 정치학의 경계를 여기저기 넘나드는 것이 정치철학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또 의지를 갖고 살펴봐야 하는 것이 ‘당위적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진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트에 의한 집단 지배적 정치 체제를 옹호 했고, 특히 인간 정념의 불확실성을 신뢰했기 때문에 과연 이성으로서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현재의 우리에게도 남기고 있는데요. 특수한 부류의 특수한 공화국을 꿈꿨던 플라톤에게 저자는 극단주의자 라는 꼬리표를 붙이면서 소크라테스를 대척점의 소위 ‘교훈적 역할’로 당시의 정치 전반과 철학적 물음을 온전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 현실집중적 사상가로 평가하며 그에게 고안할 수 없거나 고안하기 힘든 현실적 재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꽤 열성적으로 현실의 실험재료를 갖고 자신의 정치현실적 이상을 만들어 내는데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 토마스 홉스는 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상당히 비판하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 만큼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 놨던 정치 이론적 체계는 꽤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학 및 정치철학적 개념을 고안해 놓은 것은 크게 인정받을 만하고, 특히나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 그가 기여한 부분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선 플라톤은 “정치 권력이야 말로 철학의 깊은 염원이라고 평가했다”는 저자의 단언은 쉽게 이해에 다가가기는 힘들었지만, 토대적 입장에서 정치 권력이 어떠한 속성과 목표를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가 장 자크 루소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플라톤의 반대의 입장에서 사회계약과 일반의지를 다룬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더불어 “시민 대다수가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국가에 살지는 모르지만, 그 중 극소수만 플라톤식의 정의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점은 아이러니다”라는 점 또한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보이면서도 그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의 소위 민주주의가 불평등한 노예 제도가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 그들의 민주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측면에서 고심해 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이어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논쟁이 되고 있는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유명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연구자로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얼마나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에 집중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제가 갖고 있던 스트라우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거나 뒤바꿔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대한 위기의 순간, 사회 존재 자체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만 인간의 본성이 가장 완벽하게 발휘된다는 마키아벨리의 믿음”과 같이 그동안 체사레 보르자와 쌍으로 묶여 권모와 술수에 능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투입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다는 대표적인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적 사상이 일관된 도덕적 거부감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들이 이러한 정치적 이득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맹목적 결과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고민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 도덕적 정당성 보다는 정치 행위 자체의 안정과 과감한 결단을 통한 다수의 이익을 그려왔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현재에 이르러 마키아벨리가 광범위하게 거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저자는 그의 군주론에 필적하는 논저 로마사논고를 통해 마키아벨리에 대한 약간의 옹호를 보이고 있기는 한데요. 꽤 애매한 부분으로 보이긴 했습니다. 군주론과는 다른 대략적으로 공화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는 다음 논저가 과연 그에 대한 사상적 전환이 될지는 아쉬운 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홉스와 로크, 루소는 ‘자연상태’와 인간의 평등권으로 묶어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는데요. 앞의 자연상태는 이미 플라톤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홉스가 그 바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들이 그 자연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적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는 관점과 더불어 자유 사상의 고취 또한 홉스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반면 로크는 사적 소유권을 표방한 자연권에 대한 언급과 정치 권력에 의한 자유 재량권 및 상업 제도에 대한 독특한 발상이 나타납니다. 홉스와 로크는 둘 다 자유주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오늘날에도 거의 완벽한 논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 역시 동일하게 평가하고 있는데요. 홉스는 그가 과거의 전통주의에서 고안한 정치체에 대한 약간 경직된 체계가 있다면 로크는 당시에는 꽤 혁명적인 입헌주의 사상이라든지, 개인의 소유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에드먼드 버크가 과격한 혁명주의 및 혁명사상에 일조한 인물로 루소를 지목했던 것과 같이 또한 로비에스피에르 자신이 루소와 동일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소는 공화주의에 있어서 지배층의 우려를 불러 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나날이 심도가 깊어지는 계몽주의적 사조에 인간이 스스로 타고난 ‘의지’로 스스로의 정부 내지는 정치체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도출될 문제였습니다. 물론 루소 이전에 종교 개혁을 통한 이러한 기반의 뿌리가 무르익고 있었지만, 이것에 불과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장 자크 루소였습니다. 그가 요즘 말로 ‘히키코모리’삶을 지향하며 자신의 자유와 자연상태를 만끽하면서 이러한 사상을 잉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 유리된 상황에서 전세계의 많은 공화주의적 이념을 확신시키고 그야말로 많은 자연인들을 ‘노예 상태’에 벗어나게 만들어 준 그에게 한편으로는 고마움을 갖게 됩니다. 비록 에밀과 관련된 논란과 다소 과격한 혁명 사상과 계급 투쟁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되기도 하지만 그와 토크빌이 없었다면 세계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갓 태어난 미국의 민주주의에 큰 희망을 보았던 토크빌은 루소의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후세들’에게 여러 경각심을 남깁니다. 개인들이 이익을 당연시하고 극도한 사익추구를 감행할 경우 민주주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와 다수에 의한 횡포, 고착화된 권력이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익히 우리가 들어왔던 문제들입니다. 권력의 집중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나을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록 시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일종의 답을 토크빌이 제시해 왔습니다. 이 (꽤 광범위한) 의지의 문제를 홉스 등도 다루고 있지만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시민 다수의 의지’라는 주제는 토크빌이 평생 기울여 왔던 화두와도 같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역사에서 인종을 따로 구분하면서 분석한 것은 분명 논쟁적이긴 합니다만 당시의 유럽 백인들의 선입견과 사상이 인종주의적이었고 당시 유럽의 노예 문제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를 보더라도 ‘시대의 한계’랄까 그런 모순이 있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밧줄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주제들을 잡고 사는 것이 과연 우리 시민들에게 허황된 꿈인지 말입니다. 정치를 엘리트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생업이나 열심히 하는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정치에 나설 대리인들을 선출했으니, 사상의 고안과 정치적 의지. 행동 등 모든것을 이들에 다 맡겨놔야 하는지 설사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에선 딱히 할게 없다고 자위하는 것이 맞는 건지, 또한 그 전제로 이러한 정치학, 정치철학의 질문과 이해는 정치학을 전공하거나 그 학문적 토양 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인지는 그 답이 일견 의문과 함께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티븐 스미스 교수의 이 책에 대한 부족한 서평을 쓰면서 동시에 우리의 정치가 더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금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우스개 소리로, 레오 스트라우스를 위대한 정치철학자라고 평가한 것에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정치학과 정치학의 계보를 역사와 철학을 통해 상당히 꼼꼼하게 살펴 볼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장점이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많은 분들도 이 책을 통해 우리 정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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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불평등한가 - 탐욕스러운 1%가 99%의 삶을 파괴한다
척 콜린스 지음, 이상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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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척 콜린스는 미국 뉴 헴프셔 대학 출신으로 정책연구소(IPS)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불평등과 부유한 개인들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지속해 온 전문가입니다. 검색으로 나오는 그의 논저들이 대부분 위의 주제들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데요. 다만 국내에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을 때,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저도 역시 국내에 소개된 뒤 한참 뒤에서야 책을 손에 쥐게 되었네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나 논증이 꽤 단순하고 명료하고 글의 가독성도 나쁘지 않은데, 요즘 같은 거대한 불평등의 화두의 시기에 어떻게 관심을 끌지 못했는지 꽤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저의 사견입니다. 원제는 ‘99 To 1 : How Wealth Inequality Is Wrecking the World and What We Can Do about I’으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 소개된 연도도 마찬가지로 동일합니다.

이 책의 간략한 주제는 “부와 권력의 극심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체제와 국민의 신뢰를 좀 먹는다”는 한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만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소 과격한 논법으로 1% vs 99% 의 대결과 같은 계급투쟁을 암시한다는 주변의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그것에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식으로든 부의 집중과 불평등 문제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서, 크게는 민주주의와 우리의 정치에 있어서 작게는 시민의 안정된 삶을 위해 그 당위성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약간의 이 글의 장점은 막대한 부의 계층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몇가지 해결을 위한 상세한 대안들을 결론에 도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경제적인 측면의 대안을 위해 재건 은행을 만들다던가, 부유층의 자본소득세와 배당세 및 금융거래세 등을 부과해야 한다는 관점 등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대안들에 대해 마땅히 충분한 근거와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월스트리트를 당장 없애자와 같은 주장에는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미국 은행법이 지난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 다소 규제책이 만들어지긴 했습니다만 더욱더 강력하게 일반 은행과 투자 은행의 분리를 확실히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미국 내에 만연된 불평등과 관련해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역사적으로 불평등을 상당히 너그럽게 생각해 왔다”고 인식하면서, 국내적인 요건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미국인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세계적인 규칙 변화에 어떤 방식으로 협력했는지 살펴볼 책임”이 있다는 확대된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계 경제를 조정해 온 미국 정부와 그것을 지지해 온 미국 시민들에 대한 일정한 책임론으로 이해 되었는데요. 충분히 공감을 가질만한 내용입니다.

우선 이 탐욕스러운 1%들에 대해 특히 민주주의적 과세주의에 반하는 조세피난처에 자산을 숨기는 광범위한 조세 포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이 일종의 ‘게임 조작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는 해석과 이를 통해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정치권에 투입해 사실상 미국 의회를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두고 있다는 엄중한 현실 판단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자의 통찰력을 느끼는 동시에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부자들은 우익에 돈을 투입한다 라는 저자의 설명이었습니다. 단순히 부유층과 우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한다고 봐야 하겠지만, 정말로 우익들은 장 지글러의 언급대로 정말 민주주의를 마뜩치 않아 하는 걸까요. 우리와 같은 많은 시민들은 “보다 더 평등하고 경제적으로 안정화 된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라는 평가는 부유층과 우익들의 이해와 정말 달리 하는 것인지, 그런식으로 이해 대립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어려운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언급되는 많은 최상위 부유층들은 자신들에 대한 부의 집중이 사회에 대한 공공선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당위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점이 이들의 명확한 가치 체계라면 정말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부유층 및 기업인들이 결국 이제 와서 계급 투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만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체제 자체를 정언으로 여기는 시민들에게는 당면한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굳이 제레미 벤담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일찍이 토크빌 역시 이러한 관점을 초기 민주주의 역사에서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더욱이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애덤 스미스 조차도 노동자들이 시스템의 부품화가 되는 것에 큰 우려를 보였죠.

2008년 이후 미국의 기초 경제 기반은 중산층과 아프리카 계 가정들이 막대한 자산 상실을 시작으로 일반적인 부유층과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부의 집중으로 미국이 극심한 불평등의 시기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비교 대상으로 북유럽 국가들의 ‘사회 이동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의문은 과연 부자들이 주도하는 금권정치를 과연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이미 기울어진 부유층과 일반 시민들의 권력 격차를 또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지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연대’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만 이해 관계의 지배권을 되찾고 앞선 이들이 민주주의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해소시키는 등의 대안을 달성하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를 믿는 많은 시민들의 행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대략적으로는 ‘시민 연합 vs 기업의 힘’ 으로 구도가 그려지기도 합니다만 단순한 의미 부여라기보다, 정치적 불안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부유층이라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만연된 불평등 문제에 자신들도 손을 보태 개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 대책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완전 무결성 먼저 내려놓고, 민주주의가 잘 굴러가야 시장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의 끝머리에서 깊이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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