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인민주권 정당론 클래식 1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현재호.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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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는 미국 피츠버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은 뒤, 30여년 간 줄곧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 대학에서 학부생을 지도한 바가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 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여러 가지 중에 특히 “대중들이 대체로 정치적 분별력이 전무하고 너무 무식하다”는 일종의 대중편협론에 반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글의 서문에서 “낙제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민주 시민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학자와 철학자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앞선 이유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30여년간 대학원 생들이 아니라 학부생을 지도한 것도 어린 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고양시키고 보편적인 정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비범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책과 관련하여 약간 애매한 부분은 센게이지 런닝 (Cengage Learning) 이라는 곳에서 저작권 대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위키피디아에서 검색을 해봐도 특별한 내용은 없더군요. 대략적으로 대학 관련 교재를 대행하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1975년의 서문판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70년판을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판은 1960년에 나왔고, 원제는 ‘The Semisovereign People’ 이며,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샤츠슈나이더의 기념비적인 논저라 지칭될 만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갈등, 정당, 민주주의입니다. 혹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먹고 산다”는 바로 샤츠슈나이더의 갈등에 관한 인식과 가까워 보입니다. 이 갈등과 관련해서 저자는 약간의 양가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본디 갈등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갈등 자체를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원동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등의 사회화’라는 개념도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많은 이익단체들이 경합하는 사회에서 경쟁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으로 보고 있으며, 갈등의 사회화 역시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파급효과’ 내지는 ‘사회적 혹은 사회내에서 규명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요. 저자가 집중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의 중요한 목적이 이들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갈등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스피노자의 한줄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정치의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이처람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국 정치의 핵심을 ‘정치 권력에게서 경제 권력을 분리하는 데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저로서는 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굳이 과거의 도금 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치열한 양당 정치의 대결 속에서 미국의 현대 정치가 수많은 정치 로비에 의한 ‘금권 정치’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 한때 앞선 그것이 가능했던 잭슨 대통령 시절의 정치적 이상주의 시대를 대입하는 것이라면 크게 벗어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뒤이어 정당 정치에서는 “정당 정치의 관점에서 이익집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고 저자는 인지하고 다른 특수이익집단의 그들의 ‘특수이익’과 이들 특수이익집단이 “실제 선거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들 집단이 정당 정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더욱 더 제약한다” 일종의 제한적 분석 또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를들어 현재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보다 확연한데, 아마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1960년대에는 이 복합체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당시에 밝혔던 국가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을 샤츠슈나이더 역시 과소 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이 책의 많은 내용이 추가되거나 바뀌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익 집단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이익들을 공적 이익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을 추동하고, 4장에서 밝히고 있는 갈등의 치환의 주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갈등의 관리’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등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동시에 통합한다”는 양면적 측면과 “공동체 내의 모든 긴장을 이용하려는 정치체제는 산산이 부서져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부정적인 해석도 ‘관리’의 필요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적 이익으로 인한 갈등을 공동의 이익의 측면으로 확장시키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앞선 사적 이익을 큰틀에서 공동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닐까 감히 판단해봅니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현재의 미국에서 이들 이익 집단들의 꽤 규모와 응집력을 보이는 것은 개인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데 미국 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파악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적 권력 독점의 출현을 예방하고자 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원래 자유의 이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현실에 도입한 이들이 미국인이어서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전통적인 공동제주의적 역사가 있는 국가들에게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정치사회적 토양이기도 하겠습니다.

또한 5장은 정치적 패러다임이 서로 뒤바뀌게 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역사적 변화를 소개하고, 규모로는 전국 정당의 위치에서 각각의 지지기반인 ‘기업-공화당, 조직 노동-민주당’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업과 공화당 간의 관계를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꽤 견고한 모델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6장은 정당 정치와 더불어 많은 수의 미국 유권자가 스스로 투표 참여를 포기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매우 소리 높여 “만약 4천만의 성인 시민이 법에 의해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이 체체의 성격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지표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법 외적 수단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라고 우려합니다. 법적인 문제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정권 포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익히 모두가 아는 내용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이 원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데요. “민주주의에 관한 모든 고전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그들 개개인이 가진 자발적 욕구의 강도와 그 보편성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제시합니다. 이 장의 중간에 “상당수 정치적 주장 내지 정책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약 4천만 명의 투표 불참자들이 그 정책과 주장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정치체제와 정당의 현실론과 관련해 설명을 하고 있지만 크게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민주주의에 있어서 큰 냉소를 갖게 된 것은 “대중이 너무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정의가 상정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대중이 경쟁적인 권력 체계를 좋아하고, 민주주의와 높은 수준의 삶의 질 둘 다를 원하다는 것”은 복잡한 민주주의적 사회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라 판명됩니다. 조직화된 여러 특수 이익이 미국 정치의 주된 행위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많은 국가들에게서 유산 계급이 사실상 대중 권력에 대한 의문 부호를 갖고 있는 것과도 상반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대중의 권력이 중요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 보이나, 날이 가면 갈수록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가 사그라드는 것은 그 이유가 대중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치 자체가 본래적 이상주의에서 변질되어서 그런것인지는 양자 사이의 선택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물음인 “과연 권력을 누가 쥐고 또 어떤식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는 “인민은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샤츠슈나이더 역시 이 루소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현실 정치의 문제가 엄연히 우리 시민에게 국한된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 현실 정치에 관여해야 되는 정당성은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만 하겠죠. 듀이와 토크빌이 우려했던 우리의 민주적 정치가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이것과는 별개로 이익 집단의 측면에서 기업들의 권력이 비대한 것에 대한 판단은 저자의 통찰력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기업 권력과 정치 권력의 분리 작업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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