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의 역사 문제 논형 일본학 41
하타노 스미오 지음, 오일환 옮김 / 논형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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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방대한 아시아 역사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센터장인 하타노 스미오는 일본 명문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특히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역임하는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전후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대한 연구와 일본 전후체제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로도 유명합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놓여 있는 글이 소개할 이 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2011년 일본에서 출판되어 국내에는 2016년 논형에서 번역 출간을 맡았습니다. 번역을 맡은 논형은 서울대학교 일본 연구소와 더불어 ‘논형 일본학’ 이라는 카테고리로 국내에 몇 안되는 일본 역사, 사회, 정치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글의 서문에는 “일본 제국의 청산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도출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하타노 스미오는 현재 일본의 ‘전후 탈각의 시도’와 관련하여 그것의 주요한 원인을 연합국과 일본 제국간의 전후 강화인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원인이 미국이 주도한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체제에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최종적으로 일왕을 전범에서 제외한 1946년 4월, GHQ와 맥아더 및 미국 정부의 결정”이 포함되고 이를 통해 일왕이 계속 재위에 존재함으로써 ‘과거 군사 침략에 대한 일본인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선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 체제는 우리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은 익히 아실겁니다. 일본과의 교전국 지위를 부여받지 못함으로써 배상과 청구권이 훗날 급조된 괴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고, 이것은 그 당시에도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영국 등의 반대로 당시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고문이 한국을 교전국 지위에 올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은 최대 침략의 대상이었던 중국과는 대만의 장제스 정권이 그 국권이 날로 추락하여 유명무실해졌고, 반대로 베이징의 마오쩌둥 정권과는 1972년 당시 저우언라이와 다나카 가쿠에이가 식민 지배에 따른 배상 문제를 중공의 양보로 불문에 부침으로써 사실상 이런 일본의 국내 분위기와 맞물려 동아시아와 관련된 일본 제국주의적 침략의 전후 태도의 모순이 더욱 고착화 되었습니다. 이 점은 현재 전면적인 일본 정치권과 국내의 ‘수정주의적 역사관’과 보통 국가화를 천명하는 ‘전후 탈각’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전후 도쿄 전범 재판부터 그 과정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연합군, 특히 미군 주도하에 이뤄진 도쿄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그 초기에 “일본인에게 패전이란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에게 참패한 것이, 중국전선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입장과 난징학살사건을 자각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마닐라의 강간’으로 알려진 필리핀 마닐라 시내와 주변지역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해, 강간, 고문, 방화와 후에 언급되지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민간인을 동원한 무차별적인 ‘반자이 어택’ 등과 같은 일본군에 의한 광범위한 전쟁범죄가 이 재판 준비 시기에 희석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패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에 집중하게 되면서 미군에 의한 점령, 그리고 불만족스런 강화로 일본인들에게 인식되게 됩니다. 이에 저자는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조셉 그루의 회고록 가운데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전투의 종결을 촉진시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리화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은 내면화 된 패전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커티스 르메이가 주도한 ‘비처럼 내리는 소이탄 공습’인 도쿄 공습 등에 의한 민간인 피해를 ‘부수적 피해’라고 비윤리적 판단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일본 고위층이 소련과의 중재를 기대하는 등의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런 무고한 민간인 피해는 좀 더 줄일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런 정보들이 공개된 마당에 태평양 전쟁과 대동아 공영에 대한 진실된 인정이 일본 국내에서 이처럼 거부되고 있는 것은 저같은 한국인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국민의 정부 시기 김대중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와의 전반적인 한일 협력 시기에 당시 일본 정부가 공동 성명에 ‘침략’이라는 단어 대신에 ‘지배’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했고, 침략이라는 단어에 일본 국내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설명으로 이 책에서도 소개되어 있는데요.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그동안 꾸준히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조선인들을 분리해 달라는 한국 민간의 요구를 묵살하면서도 ‘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 출신 군인 및 군속 24만명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표리부동이 어떠한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조선과 타이완은 교전지역이 아니라 분리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돈을 쏟아 부은 셈’이라는 것”은 한국 국내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맛닿아 있습니다. 이로써 저는 한가지를 확인한 셈인데요.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 침략주의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근본적 이익과 아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글의 마무리에서 “일본 정부는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적 비판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침략 전쟁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전후 체제에 대한 모순된 입장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라야마와 고노에 이르는 ‘주변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사과’를 바탕으로 앞선 평가를 보인 듯 한데요. 이미 아베 일본 총리는 무라야마 및 고노 담화를 무력화 하는 것을 시도했다가 당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압력에 굴복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시도했던 일본 총리는 지금도 그 총리이고 오바마가 중재해서 나타났던 박근혜 정부와 아베의 ‘위안부 합의’가 어떤 식의 결과로 자리매김 했는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보통 국가화에 이 전후 문제는 심각한 국격 상실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으며, 여기에 기반이 되고 있는 많은 일본인들은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해 아주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사과 하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러한 우리 태도를 사과로 받아들여라” 바로 이것이 일본측의 본심이겠죠.

끝으로 이 책은 10장의 문제 제기 만으로도 충분히 역사에 대한 저자의 태도와 인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글 중간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일왕의 전쟁 책임을 법적으로 묻는 것이 불가능했다면 히로히토의 퇴위라도 실행되어아먄 했으나 아시다시피 그는 천수를 누리며 아주 안온하게 삶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와 패전과 관련해서 일본 국민들에게 어떠한 본보기라도 보여줄 수가 없었던 것이 일본 정부와 권력층의 노골적인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이 지렛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 역사 문제 전반을 주변국에 의한 불필요한 내정 간섭이라고 받아들이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이성적인 태도를 바라는 것도 물론 힘들죠. 그나마 최선이라고는 일본내의 리버럴한 지식인들이 뭔가 인식의 전환을 이끄는 수밖에 없는데 이들도 역시 역사 문제와 관련해 교묘하게 국익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는 자들도 많아서 저는 딱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과의 협력이니 문화 교류라니 하는 것은 그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죠. 제가 비관주의에 탐닉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역사문제, 전후 체제와 관련된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이 문제 만큼은 딱히 수월한 해결책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덧붙여, 이 책에서도 71페이지에 오탈자 한곳을 발견했는데요. 제가 구입한 것이 초판 1쇄이니 아마도 시중에 깔려 있는 책들이 다 똑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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