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싱커블 에이지 - 끊임없이 진화하고 복잡해지는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시대
조슈아 쿠퍼 라모 지음, 조성숙 옮김 / 알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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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조슈아 쿠퍼 레이모 (혹은 라모)는 시카고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뒤 ‘타임’지 역사상 최연소 부편집장을 거친 인물입니다. 현재는 헨리 키신저가 설립한 키신저 어소시에이츠 (Kissinger Associates)의 부위원장이며, 특히 과거 칭화대 겸임교수이자 골드만삭스 고문으로 활동하던 중 자유진영의 ‘워싱턴 컨센서스’와 구별되는 중국식 국가발전 모델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학문적으로 처음 제안한 바가 있습니다. 이 베이징 컨센서스와 관련해 인식해야 될 점은 민주화가 없는 권위주의 정부의 경제 발전 모델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권위주의 정부들의 경제 발전 모델로 널리 연구되기 시작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자유 진영이 민주주의화가 없는 중국의 경제 발전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레이모에게 한가지 의문인 점은 이러한 결과를 먼저 인지하고 베이징 모델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중국 경제 모델에 대한 단순한 해부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이 책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는데요. “중국의 경제 발전이 종래에는 민주화로 진행될 것이고, 이 민주주의 국가 중국은 친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학자들의 이와 같은 인용은 레이모가 어떠한 해석을 하고 있었는지 대략 알게 해줍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레이모의 이 책은 지난 2009년 ‘The Age Of The Unthinkable’ 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0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총 11장의 분량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주요한 골자는 “서구의 엘리트들은 민주주의가 전체의 안정을 증진시켜 줄 것이라고 예측하고 기대했다”면서 국내문제와 국제관계를 아우르는 이 민주주의의 확대가 크게는 세계 안보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으나, 레이모가 에둘러 비판하는 대로 조지프 나이의 ‘소프트 파워’와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신념으로 여겨져 온 ‘민주평화론’이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세계적 인식론에는 대해서는 크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1차 걸프전의 다소 성공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암약하는 테러 조직에 의해 발생한 9.11 테러가 첨예한 미소 냉전 시기에 핵전쟁에 의한 ‘인류 멸절’ 보다 더 위험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아마도 전자에 대한 비판 인식보다 변화된 국제 안보 환경이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미국인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 CIA가 초래한 왜곡된 근본주의자의 표본이며, 애초에 그를 일거에 제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미국의 안보 뿐만 아니라 세계 안보에 불행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이모는 지난 1971년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미중 관계 정상화를 위한 회담에서 우리가 익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이 국제정치학이 간혹 비합리적이라는 말밖에 설명할 수 없는 국가 지도자들에 의해 이와 관련된 문제를 매번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1971년의 닉슨과 마오쩌둥은 일반적인 정치적 환경과 국제 레짐의 대결로 비추어 봤을 때 서로 대화조차도 나눌 수 없는 관계였음에도 예측할 수 없는 두 리더의 결단으로 대화 채널이 열렸던 것을 앞선 사례에 빗대고 있습니다. 전쟁 상황에 이르거나 그에 준하는 위기의 시간에 매우 정합적 이론에 매달리기 보다는 임기응변과 순간의 판단이 때론 중요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레이모의 큰 인식적 틀로 나타납니다. 이 점은 제한적인 국제 관계나 외교에 국한되지 않고, 언어적, 문화적, 기술적, 과학적 측면 등 현재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변화의 순간을 여러 가치가 서로 뒤엉키고 매시업되는 측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명된 연사되는 기관총이 앞으로 예정된 전쟁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혁명으로 예측했던 대로 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확대되어 오늘날 인류를 멸망에 이를 ‘핵무기 균형’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레이모는 우리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마냥 평화로운 시기가 될 것이라고 치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융시장의 위기와 테러 점조직, 마약상들’ 등 이 세가지의 광범위한 문제가 나날이 발전하는 혁명의 시기에 큰 위험이 되고 있으며, 많은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이 이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각국의 안보문제와 국내 상황의 여러 문제들에 직면에 후순위에 몰려 있다고 분석하고, 다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그 파급 효과가 이미 증명되었던 것처럼 아마도 정치권이 이념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전에 그리스펀이 금융 시장을 비롯한 내재된 미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장 팽창 등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은 사실상 실패에 이르렀다고 보는 그의 시각도 애초에 전형적인 틀로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는 기본적인 견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온갖 종류의 돌발 사태에 대해 항상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관점은 이 책의 중요한 결론입니다. 사실상 기술 진보가 이뤄지는 현 시점을 혁명의 시대로 인식하는 레이모에게 애초 단순한 몇가지의 이론으로 사건을 해석하거나 그 본질을 찾으려는 것은 적정 수준 이상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세계 게임 업계를 언급하며 닌텐도의 사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단순한 창의성의 표출 이상의 총칭하는 매시업의 단계라고 그 자신이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레이모의 이 책이 무엇이 되었든 진보와 불확실성의 이 시기에 어떤 지표가 될지는 저 개인적으로는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진보의 시대에 핵확산이 멈추지 않고, 핵무기 대응에 의한 아슬아슬한 평화가 과연 아무일 없는 것으로 그치게 될지는 지켜볼 문제일 것입니다. 거대한 국가 권력 시스템하에서 개인이 어떠한 파급 효과를 나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민주주의 자체에 회의를 품기보다는 좀 더 그것의 기반을 확대할 수 있는 교육과 정치발전에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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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들끓는다 - 전지구적으로 위협받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놈 촘스키 지음, 천지현 옮김, 데이비드 버사미언 인터뷰 / 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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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현존하는 지식인들 중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인이자, 언어철학자, 정치운동가 및 사회비평가로서 큰 명성을 쌓은 노엄 촘스키와 아르메니아계 미국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최근 출간된 대담집인 ‘세계는 들끓는다’를 일독했습니다. 소개할 이 책은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문답집으로 주로 바사미언이 정치, 사회, 외교 등의 질문과 일종의 화두를 던지면 촘스키가 이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 2017년에 출간된 원제는 ‘Global Discontents : Conversations on the Rising Threat to Democracy’로, 국내에는 최근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원서와 관련하여 약간 흥미로운 점은 국내 번역된 책의 표지는 촘스키를 전면에 두고 있으나, 2017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저작으로 촘스키와의 대담이 실린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촘스키와 바사미언의 이런 작업은 전작인 ‘권력체제’에 이어 두번째로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우선 촘스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일화 한가지는 그가 오랫동안 CIA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일텐데요. 세계 최고라 자부하는 정보기관의 감시와 사찰을 받은 촘스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할 정도입니다. 쥘리앙 방다가 비판한 지식인들의 행태를 사뭇 유추해 본다면 촘스키라는 사례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총 12장의 큰 틀로서의 주제로 여러 맥락을 통해 최근까지 일어났던 주요한 사건들과 그것들의 큰 틀과 해석상의 배경이 되는 연관된 문제들까지 두루 살펴보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대담을 나눈 시간적 순서는 2013년부터 최근인 2017년까지입니다.

여기에 중요하게 서술되는 문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이 조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ISIS를 비롯한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중동 문제와 같이 포함되는 이란, 이스라엘, 터키 등의 서아시아의 국제 갈등과 유럽의 난민 문제와 오늘날 대두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문제, 반대로 미국 국내 정치에서 변질된 공화당과 거대한 포퓰리스트 대통령 트럼프, 민주주의, 보편적 투표권리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글의 맨 처음에는 에드워드 스노든이 촉발한 국가 감시 문제로 전면적인 기술 발달로 인한 국가 권력의 다층적인 감시 체계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고찰해보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시민의 연대와 대화만이 기존의 권력체계가 자신들을 위해 공고화하려는 체제와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는 소위 ‘금권정치’로 더 격하게 말하자면 ‘도둑정치’와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의 맹공’은 복지국가의 해체를 불러일으켰고, 유럽의 경우에는 진보와 좌파 세력이 사회복지 축소와 시민의 안전 보장 철회에 경제 발전 문제를 결부시켜 종래의 정책을 후퇴함으로써, 오늘날 난민의 극도의 혐오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극우 세력’의 정치 무대 등장을 불러일으켰다고 판단합니다. 촘스키의 입을 빌리자면, “유럽이 겪어온 야만적 경제 프로그램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손상해 버렸다”고 평가하고 이것은 그동안 성공적인 민주주의의 이행을 지속해 왔다는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유럽 전체를 민주주의 블럭으로 놓고 봤을 때, 경제 자유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는지는 매우 명백합니다.

다시 중동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면, 과거 남아공이 극렬한 인종차별정책은 ‘아파르헤이트’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을 때, 당시 남아공 외교가는 다른 국가들의 지지는 사실상 필요 없으나, 다만 미국의 공고한 지지는 중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문제는 과거 남아공과 미국과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국제 무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미국의 행태와 과거 남아공에 대한 지지는 유사합니다. 여기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두고 미국이 벌이는 외교 정책과 우호 관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라크와 이란, 터키의 쿠르드족 문제와 관련해 과거 이들에 이란의 공격과 이라크의 화생방 테러, 지금의 터키 당국이 쿠르드 족에 벌이는 노골적인 견제도 특히 교훈으로 삼을 만합니다. 국제 정치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특히 이 책에서 나온 헨리 키신저의 언급대로 ‘군사 작전과 자선 사업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자위력이 없는 민족에게 국제 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 과거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사실상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이 만들어냈던 것처럼, 쿠르드족도 장기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날 미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트럼프를 비롯한 ‘포퓰리즘’의 대두에서 촘스키는 현재의 미국 대통령을 뭔가 이데올로기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힙니다. 즉, “트럼프에게 무슨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그의 판단은 트럼프 내면의 강고한 이념이 존재하고 이것이 과거 히틀러와 같은 전체주의로 갈 가능성을 두고 그를 해석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듯 합니다. 즉, 트럼프가 대선 전에 월스트리트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제인들에게 ‘금융권력’에 대한 광범위한 경고를 내건 것으로 추측된 것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월스트리트 출신의 금융인들을 자신의 백악관에 들임으로써, 그가 어떠한 사고 체계를 갖고 있는지 판단하게 합니다. 다만, 그는 현시점의 미국 정치에서 문제는 미국에는 계급 정치를 할 만한 정당이 없다는 것이며, 공화당의 정치는 20년전보다는 더 우경화 내지는 금권정치화가 되어 소위 티파티 멤버들에게 ‘이스라엘을 방어하는 것이 신의 자손들이 마땅히 맡아야 되는 책무와 같다’는 종교적이고 교조적인 형태의 정치 변질로 나아가는 현상이 더 위험하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그로서도 포퓰리즘 자체가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가능성은 현실에서 희박하다고 보는 거겠죠. 다만, 포퓰리즘 자체가 이런 추세로 간다면 민주주의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측면에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개인보다 미국의 극우 포퓰리즘인 티파티의 구호가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티파티는 그동안 진보정치와 좌파를 격멸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극우 포퓰리즘이 어떠한 문제를 야기할 것인가는 단순한 위험 정도가 아니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촘스키의 건강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기도 했습니다. 부부와의 관계가 좋다는 그의 고백도 듣기에 좋았고, 무엇보다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는데 그렇게 잔병치레 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에 놀랍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떠나 보낸 지금 시점에서 노엄 촘스키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싶습니다. 2010년에 그와 비슷한 양심을 가진 하워드 진이 타계했다고 들었을 때, 꽤 낙심한 바가 있었는데요. 우리에게는 아직도 돌아온 발걸음 뒤를 살펴봐 줄 사심없는 현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리를 빌어 그의 건강을 빌어봅니다.

“경제 권력이 집중되면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는 침식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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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6-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주셨던 분이 계셨는데, 죄송합니다 ㅠㅠ 오류가 나서 다시 업로드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루퍼트 머독 - 미디어로 세계를 선동한 권력욕의 화신
데이비드 맥나이트 지음, 안성용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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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국영 ABC TV의 기자 출신인 데이비드 맥나이트는 정치, 역사, 환경 등의 주제로 다양한 글을 출판한 저술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냉전 역사에 관한 두 가지 주요한 논저로 세계 출판계에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호주 지식인의 눈으로 본 호주 출신의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의 실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이기도 한데요. 지난 2012년 ‘Ruoert Murdoch : An Investigation of Political Power’의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언론 그룹인 뉴스코퍼레이션의 총수 루퍼트 머독은 CNN 의 테드 터너 등과 더불어 꽤 유명한 언론기업인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맥나이트의 이 책에서는 이런 표면적인 평가 말고 루퍼트 머독이 과연 어떤 사회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의 발언이 인용된 기사와 연설, 그가 사주로 있는 여러 언론사의 편집장들과 같은 이들의 발언 등을 소개하며, 그가 어떠한 정치적 행로를 걸어왔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머독 개인의 정치적 관심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어 왔는지 여기에는 많은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머독 특유의 독특한 관점 세 가지를 먼저 정리하고 싶은데요. 첫째는 세계적인 기후 변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히스테리적 불안조정자 및 재앙예언자로 치부하는 것과 둘째로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보수주의자들을 억압한다는 해괴한 견해와 셋째로 머독이 견지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견해가 사실상 ‘우익 포퓰리즘적’ 대변하고 이를 평생에 걸쳐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추구해 왔다는 점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머독의 사업 기반은 기본적으로 부친의 유산 승계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호주의 언론사를 운영했고, 그러한 기반하에서 머독이 성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호주를 거쳐 미국에 사업을 위해 미국인이 된 상황에서도 미국과 영국 정치권에 지지와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익히 다른 기사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와의 친분은 꽤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루퍼트 머독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대처 정부가 집권 초기 사회 복지 정책을 철회하는데 있어서 머독이 지지를 보인 점은 앞선 두 사람과의 정치적 공감대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겠죠. 다만, 대처의 회고록 출간과 관련해 머독이 운영하는 출판사가 그 판권을 사들여 출판이 되었을때, 대처의 집권 당시 머독과 긴밀했던 그녀가 회고록에는 머독의 이름이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꽤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또한 머독이 조지 H.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것과 대처 정부가 남아메리카에 있는 포클랜드 전쟁을 벌이는 것에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보인 점은 과거 레이건 행정부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환영과 유사합니다. 맥나이트는 머독이 레이건 행정부 이후 급격히 우경화되었다고 언급하는데요. 이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소련에 대한 공격적 대응에 그가 영향을 받은것과 비슷한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이건 정부가 임기를 마치고 그것의 심리적 공허함을 그가 가졌는지, 아니면 레이건 정부가 떠난 그 자리가 앞으로 소련과의 대결에서 허약한 미국을 두려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수집단 우대 정책에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등 일반 우익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그것이 본인의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간에 그 추동에 공감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머독은 선택과 경쟁이라는 자유시장 가치를 신념으로 받아들였고, 후에 이 점은 마거렛 대처와 연결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머독이 레이건과 대처의 배후라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세사람이 서로 정치적 공감대가 있었으며, 정치와 언론매체라는 결합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거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견해에 대한 능동적 수렴이라는 측면과 경제적 이익이라는 부수적 이익이 분명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추정해봅니다. 이 글에서도 ‘뉴욕 포스트’와 관련된 재인수와 그가 거느리고 있는 언론기업들의 경제적 이익 또한 분명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 우익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경제적 이득과 이권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과 특히 자유 시장과 관련된 주제에 있어서 매우 배타적인 의견을 보인다는 점은 이들과 머독간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정치적인 인물이 왜 미국의 선거판에는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원초적인 의문점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와 유사한 행적과 가치관이 있어 보였는데요. 유력 정치인들과의 관계 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건지, 아니면 정치 무대에 직접 뛰어드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여기는건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약간 의구심이 드는 부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8장과 기후 변화를 일종의 샤머니즘으로 모는 9장은 특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머독이 이끄는 뉴스코퍼레이션은 ‘뉴욕 포스트’, ‘월스트리트 저널’, ‘폭스 뉴스’, 영국의 ‘선’, ‘타임스’, 호주의 ‘오스트레일리안’. 아시아의 ‘스타 TV’ 및 글로벌 출판 그룹 ‘하퍼콜린스’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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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억만장자 제국 - 거대한 불평등의 근원
한스 위르겐 크뤼스만스키 지음, 류동수 옮김 / 새로운제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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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작고한 독일 사회학자인 한스 위르겐 크뤼만스키 교수는 사회학, 역사학, 심리철학 등의 연구로 일생을 바쳤습니다. 특히 자유 베를린 대학과 빈 대학을 거쳐 독일 북라인-웨스트펠리아의 명문으로 일컫는 공립대학 뮌스터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독일 매체에 단골로 출연해 정치와 사회 비판에 동참하고, 특히 최근까지 미국정치를 연구하며, 미국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군사복합체에 대해 더욱 주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의 원제는 ‘0.1 % - Das Imperium Der Milliadare’로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더불어 현재는 절판된 상태로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상태인데요. 모쪼록 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급히 재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크뤼스만스키 교수는 오늘날 전세계의 막대한 부를 차지하고 있는 부자들을 오늘날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주된 변곡 요인이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찍이 갈브레이스가 “수많은 글과 매체에서 부자들에 대해 이야기 되고는 있지만,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시도가 전무하다는 점이 아쉽다”는 고백에 저 역시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부자들의 막대한 부에 대해 이런저런 표면적인 평가와 서술만 해왔지, 전체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분석 등이 미흡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에서 슈퍼 부자들에 대한 두 가지 차별화된 조건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전세계 차원의 자본주의는 지배구조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고 돈을 가진자에게 일종의 사회경제적 규칙을 만드는 권리를 사실상 부여 받고 있으며, 둘째로는 이 슈퍼 부자들이 어느 정도 공적,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러한 부자들의 기본적인 시장 행위자로서 뿐만 아니라 시스템내의 참여자로서, 경제에 국한된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전반에도 영향력을 침투시켜 그야말로 “승자 독식 사회와 금권 지배 체제의 쌍두마차”를 이들이 끌고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을 포함한 모두가 자기 입으로 말하기 두려운 부분이 바로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가 사실상 자본의 지배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책의 2장에서 4장에서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재산권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독일 기본법을 보더라도 현재 수많은 조세피난처에 은닉되어 있는 검은 자금들과 스위스 은행들이 보호하고 있는 마찬가지의 검은 돈이 일부가 아닌 다수의 부자들이 관여한 불법적 행위라고 판단될 만합니다. 또한 이 부자들이 전통적인 자본주의 자본가의 토대에서 부를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대부분 금융과 부동산 투자, 최근 등장한 부자들 마저 2000년대 초 IT 붐을 타고 신흥 부유층에 도달하게 된 것으로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우려한 ‘일반적인 자본주의 토대가 변이’되는 상황과 같습니다.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금융 자본주의가 부유층의 부를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축적하게 해 준 사실상 그들만의 패러다임 전환을 발생시킨 것인데요. 이 ‘금융 자본주의’를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 범주 안에 넣고 해석할 수 있는지도 저로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금력 엘리트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1990년대 초반 냉전의 해체가 민주주의 내에서 소수 부유층들의 제약을 벗어나게 한 결과가 되었고, 신자유주의의 출범과 다수 부자들의 ‘극자유주의’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것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가 수많은 부채 경제를 초래하고 이러한 채권들을 보유하고 있는 세력들이 기존의 유럽의 ‘사회안전망 자본주의’를 불식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이 부분 역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새로운 질서는 사회 안전망 전부를 민영화시켜 거대기업과 부자들의 막대한 이익으로 돌려지고, 자본이 좌우하는 일반적인 시민들의 안전 보장 상태로 바꾸려는 미래의 모습이 과연 어떨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합니다. 이를 수월하게 전개하기 위해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들과 많은 정치 엘리트들을 포섭하여 이들 금권이 사실상 배후에서 정치를 조정하는 권력을 보유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장 지글러는 이러한 이행을 ‘신봉건주의 시대’의 출현이라 봤고, 로버트 달을 비롯한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우려한 ‘장막안의 과두제’와 다를바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슈퍼 부자들을 제외하고 경제적인 측면의 사회 계층적 분석에 몰입했고, 이들을 대체로 선망하면서도 사회 외적으로 별개의 이들로 취급해 왔습니다. 이 부자들 역시 자신들이 언론 노출을 극히 꺼려하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부의 안전을 위한 ‘유목민화’를 추구해 왔는데요. 이 유목민화는 적극적으로 한 국가나 사회에 규합되는 것이 아니라 세금 이익이나 재산의 분산과 같은 목적으로 여러곳을 기본적인 의식주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 쉽게 국가들을 넘나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자들을 위해 재산 관리 회사들이 결합되고, 변호사와 회계사, 은행원들 및 정치인들이 움직이는 무브먼트의 중요 지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 21세기 유목민의 습성을 간파한 저자의 분석은 꽤 설득적입니다. 그래서 글 곳곳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저자의 질문인 ‘진정한 자본가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대답을 찾기는 어려운 것이고, 거대한 부유층들을 “신자유주의 기치 아래 탄생한 금력 장치는 기업을 통한 자산 운용, 모든 가능한 소득원 (특히 금융 시장)으로부터의 소득 창출, 상속, 심지어 약탈까지를 잘 조율된 네트워크 같은 하나의 커넥션으로 이어준다”고 저자가 밝혀내는 것은 바로 앞선 분석이 바탕되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이 책의 6장에서는 ‘봉건주의로의 회귀와 부조리한 나라’라는 소주제로 최근 사회과학 분야에서 떠오르고 있는 ‘재봉건화’에 대해 언급되고 있습니다. 결국 파격적인 이런 이행을 막기 위해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매우 시급해 보입니다. 저자는 책의 3장에서는 2009년 뉴욕에서의 억만장자 비밀회동을 소개하며, 이들 소수 부자들이 전세계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세계 인구를 40억명으로 줄일 필요성이 있으며, 이를 위한 논의도 밝혀진 것으로 나옵니다. 마이클 블룸버그, 오프라 윈프리, 조지 소로스, 테드 터너와 같은 이들이 그 성원이었습니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냥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화입니다만 무엇보다 선출된 것도 아닌 소위 기득권들이 전세계 다수의 운명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이 단순히 소름끼친다는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 전반의 문제점들이 생활을 옥죄고 있는 시점에서 이 패러다임이 날로 강화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시민들의 연대와 행동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대 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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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탄생 - 근대국가의 중세적 기원 중앙사학연구소 번역총서 1
조지프 R. 스트레이어 지음, 중앙대학교 서양중세사연구회 옮김 / 학고방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조지프 R. 스트레이어 (혹은 조셉 R. 스트레이어)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대학 출신의 역사학자로서, 1930년대 모교인 프린스턴 대에세 오랫동안 교수를 역임하며, 학자로서는 드물게 CIA에 관여를 했으며, 첨예한 냉전 구도속에 특유의 국가론을 견지하며, 그에 따른 연구와 저술활동을 지속하다 1987년에 생애를 마쳤습니다. 특히 스트레이어는 소수의 엘리트 지배에 따른 국가론을 지지했는데요. 또한 이와 관련하여 합리적 관료주의에 대한 학문적 논거에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1961년부터 행한 일련의 강ㅇ연, 대학 강의, 논문 발표 등을 통해 영감과 필요성을 도출해 출판된 것으로, 지난 1970년 ‘On the Medieval Origins of the Modern State’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국내에는 일종의 기획된 연구번역물인 ‘중앙사학연구소 번역총서’중의 하나로 2012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약간 특이한 점은 중앙대 역사학과 차용구 교수의 지도하에 번역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해당 역사학과가 주도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 번역이 좋았습니다.

작고한 스트레이어 교수는 지난 2007년 작고한 아서 슐레진저와 더불어 1970~80년대에 유명했던 학자였습니다. 특히 유럽 중세 역사에 대한 미국 국내의 권위자였으며, 근대 국가의 출현에 따른 근대 정치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그의 이 책은 그러한 학문적 연구선상에 있는 논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이 책은 특유의 몇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친영주의적 관점, ‘잉글랜드 내부에는 강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는 측면의 해석을 기반으로 유럽 역사에서 12세기 이후 잉글랜드에 대한 긍정적 서술 관점이 보이고, 두번째로는 현대의 국민국가에 대한 해석과 연결되어 보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주의는 엄연히 다른 부분이라는 인식에 따른 그 자신의 대의 명제, 즉 엘리트 들을 위시한 위로부터의 국가 토대가 이러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연계되어야하는 필요성에 대한 요구입니다. 그가 피지배 계층의 불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한 예측이 더욱 가능해 보입니다.

우선 책의 1장은 11세기의 유럽 정세를 요약해 보면서, 소위 국왕의 통치 기반인 위로부터의 초기 주권 개념과 세속 권력인 국왕과 종교 권력인 교황 권력간에 전반적인 해석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고, 2장은 1장에서 서술했던 봉건영주와 국왕의 관계에서 중요한 문제였던 조세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출현했던 초기 사법제도와 14세기 전반을 휩쓸고 간 흑사병의 광풍 이후 일부 지방의 통치조직들이 와해된 결과에 따른 제한적인 관료제의 출현 등을 다루고 3장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포괄적인 제목으로 초기 근대국가의 출현에 영향을 끼친 상비군의 개념과 유산 계급의 출현에 따른 기존의 왕정과 국가 지배체제의 여러 변화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의 이 책이 큰 맥락에서 밝히고자 하는 점은 17세기 이후 초기 근대 국가의 성립에 기존의 ‘암흑의 핵심’이라는 중세의 영향이 기반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인식 태도에서 서유럽의 중요한 두 국가, 즉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전체의 봉건 국가형 체제의 벤치마킹된 중요한 국가들이었고, 또 다른 이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상이한 체제 발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던대로 잉글랜드가 복잡한 지역 기반의 프랑스와는 달리 동일한 지역적 기반을 갖고 있는 국가로 평가하며, 17세기 중반 이후 짧은 크롬웰의 대두를 제외하면 꽤 안정적인 토대 위에 있던 국가로 잉글랜드를 배경의 논증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비롯해 지역적 특색과 기반을 갖고 있는 지방의 봉건 영주들과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통해 통합과 분열의 정치라는 상황속에 놓여 있던 프랑스의 상황도 상세히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법은 1장에서 보인바와 같이 초기 조세권에 대한 국왕과 교황의 갈등, 이를테면 프랑스에서 보인 주교들에 대한 조세권에 대해 이렇다할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교황의 사실상 무기력한 양보와 이후 역대 교황들이 국왕과의 세속 정치권의 대결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 조세권과 관련된 통치자의 권리가 어떻게 인식과 제도의 발전을 해 왔는지에 대해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세권과 이 징세 문제와 관련된 초기 사법 제도 및 이후 유산계급의 요구와 맞물려진 합리적 관료제의 출현이 근대 국가 성립의 주요한 기반인 것은 역사로서나 정치 일면으로서나 분명해 보입니다. 이렇게 12세기에서 16세기 후반까지 유럽에서 소위 위로부터의 주권 국가 sovereign state의 성립 과정이며, 초기 사법제도도 마찬가지로 위에 조세와 관련된 조세징수원이 재판관을 겸임한 것으로 기원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쇠퇴하고 있던 봉건 영주들과 유산 계급의 출현으로 초기 의회가 생성되고 “이들 의회가 정부의 조세 수입을 억제할 수 있는 한, 유럽 국가의 발전은 방해를 받았다”는 저자의 평가는 어쩌면 “주권 개념이 도대체 언제부터 등장했고, 그것의 정확한 규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국왕의 징세에 대한 권리’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지방 과두 세력과 통치 세력들의 저항은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 위한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파악됩니다. 또한 에스파냐의 카탈루냐 지방의 오래 존속된 정치적 독립성이 이것을 단순히 민족주의라고 보기보다는 지방의 독립성을 추구한 결과라고 보는 측면의 저자 해석이 꽤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앞선 주권 개념의 명확한 개념을 설명하기 여려운 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국왕 휘하에 설립된 국왕 직속 재판정을 비롯해 “법을 제정하는 권한에서 주권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해답은 일견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국왕의 통치 권력을 확실히 보증하는 것에는 징세의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므로 제한적인 개념일 수 있습니다.

또한 16세기 전반에는 큰 전역이 유럽에서 발생하지 않아 성곽의 주요 경비를 제외한 상비군의 필요성이 시급하지 않았고, 산발적인 국지적 갈등에 용병을 이용한 것은 앞선 상황을 잘 설명한 만하고, 특히 16세기 이전에는 국외 정보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후, “16세기에 국외 정보에 관심을 갖고 이 부분에 능통한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은 국내 상황에 대한 통제 가능성이 어느 정도 이뤄진 이후, 산발적인 국지전과 외교 문제에 따른 필요성으로 인해 일종의 전문적인 직위 계급의 출현이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기존의 국왕 휘하에 있던 각종 장관들이 자잘한 국내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지만 국외에 눈을 돌리게 되는 이러한 외부 정보 요구는 근대 국가 출현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국내 불만과 수용 가능하지 않은 요구들이 야기시킨 각종 반란에 대해 “최후의 수단인 군사력은 집단이나 지방에 관용의 한도를 넘어선 경우에만 사용될 수 있었다”는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듯 초기 근대 국가의 출현이 면밀한 중앙 집권적 권력 체계의 형성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 중앙에 대한 각종 견제가 여러 측면에서 생성되고 그러한 서로간의 인식과정이 (자의이거나 혹은 타의거나) 어떤 공감대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법적인 측면이나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주건의 최고위 행위자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환경과 이를 통해 합리적 관료제가 출현하는 것은 꽤 절묘한 역사적 과정이 아닌가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국내에는 스트레이어 교수의 번역이 많지는 않은데요. 개인적으로는 그의 전기가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습니다. 아마도 중세 유럽에 대한 상이한 관점의 논증이 저의 관심을 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초기 근대국가와 국민 국가 생성의 기원론에 관심있는 분들은 스트레이어의 이 책을 통해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고, 번역 자체가 꽤 매끄러워 일독에도 크게 거부감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책 107페이지에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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