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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대안 - 자본의 민주화와 역량증진 정치
로베르토 M. 웅거 지음, 이병천.정준호 옮김 / 앨피 / 2019년 11월
평점 :
브라질 출신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정치철학자인 로베르트 M. 웅거는 29세 때, 하버드 로스쿨의 종신교수의 직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학계에서도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웅거의 글과 관련하여 이 책의 옮긴이 서문을 작성한 이병천 교수도 그의 글이 다른 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달리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는 것에 저역시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병약해진 전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혁신적 개선과 치료를 주장한 그의 ‘민주주의 넘어’를 읽었을때도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직관적인 논법에 절로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또다른 이론적 동류로서 좀 더 대중적인 이 책이 번역이 된 것은 실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009년에 원제, “The Left Alternative”로 처음 출간되어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번역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과 관련해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원래 국역된 제목이 ‘좌파의 대안’으로 인쇄가 되어도 될 법한데, 진보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은 책에 대한 독자들의 원만한 접근을 위한 시장주의적 의도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자기 검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인민 주권과 관련 ‘인민’이라는 번역을 본문에 사용했음에도 왜 좌파라고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본문에 진보와 좌파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원래 좌파 The Left를 그냥 진보로 번역했는지 약간 의구심이 드는데요. 뭔가 이래저래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저자인, 로베르트 웅거는 스스로를 ‘민주적 평등주의자’로 읽혀지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현이 조금 이상해보입니다만 민주주의의 평등의 원칙이 바로 서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수정된) 제목대로, 우리는 과거 마거렛 대처가 부르짖었던 ‘신자유주의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는’ 정치경제적 일방주의의 이념이 강요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웅거는 2008년 미국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가 그 실체를 잃고 말았다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지만, 분명 신자유주의가 철회되거나 재구성된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정권 이후 등장한 버락 H. 오바마 정권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금융인들을 어떠한 법적 기소 없이 놓아주고 심지어 공적 자금으로 이들이 은퇴 자금 놀이를 한 것을 그냥 수수방관 해버린 점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종말을 고했다고 봐야 했으나, 웅거가 일침하는 대로 경제적 합리성을 맹신하는 일관주의적 입장에 의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재조정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웅거는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에 맞서 이를 극복할 필요성으로 금융과 생산 관계를 조절하는 구조를 재구축할 기회 경제의 회복과 재분배를 동시에 실현할 연결고리 모색의 중요성의 기로에 서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웅거의 금융 부문에 대한 명료한 대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제한적인) 한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한적인 한계라는 구절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웃기지만 확실히 웅거가 금융 시장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만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안 제시가 약간 부족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경제적 불평등의 입장에서 충분한 국내 저축과 소비세 징수로 여건의 개선을 노려볼만 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만, 특히 소비세 징수 정도에 대한 문제와 이를 위한 과세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과연 어떤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초반의 문제제기 겸 해결 당위성과 관련해, 진보 내지는 좌파가 신자유주의적 파고의 시기에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샹탈 무페의 현실 인식과 상당히 유사한 발언인,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진보 좌파가 전격적으로 투항해 세계화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먼저 꼽고 있습니다. 반대의 보수 우파가 자유주의적 경제 합리성에 순응해 조절 기능이 없는 자유방임 시장주의에 경도되어 어쩌면 미국의 억만장자 코크와 같은 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대중 정치의 불신으로 경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보수 정치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데 일조했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사회나 정치 일선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안이라는 것은 과반의 힘을 가진 정치 세력을 견제하는 반대의 창의적인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함은 매우 자명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민주주의적 혁신’과 ‘고에너지적 민주주의’ 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 프레카리아트라는 표현이 학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전세계의 수많은 근로 노동자들은 숨가쁜 노동에 짓눌려 자신의 삶이 개선되고 좀 더 나은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조차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 사회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계급 이동성의 제약, 정치 참여의 감소, 사회적 연결의 악화 등 반 민주적 굴절들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달리 말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미국의 적당한 시장에 대한 거리두기를 저자 역시 확실하게 비판합니다.
이렇게 웅거가 강조하는 진보 좌파의 역할론과 관련해 일찍이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마스 프랭크는 “우파는 돈이 되지만, 좌파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양 정치의 극단적인 차이를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합리화가 부국이 빈국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처럼 강요되어 여기에 합류한 보수 우파와는 달리 진보 좌파는 이념적인 것을 떠나 사회와 시민을 위해 적절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극적 대안으로 비롯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가 충실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 사회화 비용을 과세로 충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좌파가 어떠한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연유로 진보 좌파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왜 금권 정치와 경제적 합리성에 매몰되지 않는 꽤 건전한 보수주의는 탄생하지 않았는지 이것을 맹목적인 이념적 강요로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와 경제에서의 도덕적 가치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보수와 진보의 대결 문제는 거의 무의미한 논쟁이 되지 않았나 성급히 판단해봅니다. 다만,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 문제로 변질되는 대결 구도를 ‘무제한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라,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건전한 다원주의’가 이를 치료하고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더할 나위 없는 기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역시 깊은 공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다원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이졸데 카림이 예견한 바와 같이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견으로는 다원주의가 꽤 단순한 이상주의로서 쉽게 그 노정이 완료될 것으로 보이나, “사회 통합적 성장에 대한 탐색과 달리, 다원주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경제적 대안이 그 효력과 범위에서 보편적이기를 요구하는 것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로베르트 웅거의 통찰은 매우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그동안 진행된 사회학에서의 자기 합리화와 인문학에서의 현실도피주의 경향은 전반적인 이들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데 부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것은 오로지 미국 내의 현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조가 전세계적으로 매우 특별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쉽지만 어려운 해결책의 길은 미국의 세계 경제를 포함한 주도권과 헤게모니를 정상적인 민주주의하에 놓인 국가들과 연대해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를 민주화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한 전략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여러가지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량이 상당해 이곳에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의 변덕과 정치적 불운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기본적 권리와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제로 대체할까 합니다.
결국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안의 수단을 잃어버린 진보 좌파가 대의적인 측면에서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근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변해 나가는 것이 최초의 걸음이라고 웅거는 제시합니다. 시장을 전복시키거나 어떠한 위기 상황의 혁명을 꿈꾸는 진보 내지는 좌파 세력은 그 정치적 선명성을 결코 달성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고유한 양심을 지켜내려는 그 어마어마한 시도와 동일하게 어려운 길에 들어서야 하며, 모든 젊은인들을 정치에게서 멀어지게 한 그 음모론을 불식시키고 모두가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진정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에 가장 부합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뿐만 아니라 시민과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또한 구축해 진정한 경제와 시장주의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남은 과제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더불어 진정 한 사람의 속내 깊은 웅변과도 같은 이 글이 모쪼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