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생각 - 정의에서 민주주의까지
애덤 스위프트 지음, 김비환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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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애덤 스위프트는 현재 옥스포대학에서 주로 정치학에서의 현대 정치이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진보적 평등주의자로서 그가 살고 있는 영국 내에서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4부 공동체 및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평은 제법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일반적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 담론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이 글의 4부는 저에게 있어 스스로 생각에 잠기게 할만큼 흥미로웠는데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양자를 비교한 정치학자는 아마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06년에 원제 ‘Political Philosoph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번역을 담당한 김비환 교수와 출판을 맡은 개마고원은 이러한 책을 펴낼 수 밖에 없는 조합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스티브 스미스는 정치철학이 정치적 삶에서 가장 심오하고 다루기 힘든 영속적인 문제들을 연구해 왔다는 언급을 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인 애덤 스위프트 역시 3부에서 광범위하면서도 분명한 정치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한 갈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러한 자유, 평등, 공동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특히) 정치인들과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서두에서 언급하고, 또한 정치가 혼란스런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 평생 연구해 온 정치철학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도 간접적이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이 집중해야 하는 원천적인 것에는 “국가와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정치라는 것 배후에 있는 도덕적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이 과제일텐데, 문제는 현대의 정치의 내부에 과연 도덕적인 개념들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입니다. 제가 근래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도 “현재에 정치와 자본주의에는 도덕적 전통과 정의가 사라진지 오래”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정의에는 아무래도 필연적으로 논란이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먼저 2부 자유에서는 이사야 벌린이 주창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가 종래에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으로부터의 자유’와 ‘~할 자유’라는 구분이 벌린의 자유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스위프트는 비판합니다. 특히 그는 적극적 자유가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너무 구분적으로만 취급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실질적 자유와 형식적 자유,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서의 자유, 정치참여로서의 자유 및 정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자유 등으로 세밀히 구분해 자유의 정치철학적 문제를 분석합니다. 여기에는 일부 자유의 방편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 자유 개념’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이사야 벌린의 우려와는 상반된 이상적 태도로 저자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실질적 자유는 법으로서의 제약이나 제한된 자원에 기반한 자유가 아닌 실질적인 부분에 기반하고 있고 이것은 아마도 복잡한 정치철학적 개념에 앞선 일반적인 ‘인식론적인 자유’에 대한 이론으로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다음 3부인 평등에서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언급하면서 저자 역시 후자인 결과의 평등의 맹목적 선호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로지 일원화 된 결과의 평등에는 저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의사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맡는 것에는 그만큼 위험성과 고차원적인 책임감이 뒤따르며 이러한 일을 하는데 추동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적절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의사와 같은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문제는 이들이 직업에 준하는 그 이상의 권위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사실상의 원인입니다. 의사의 소명의식과 책임감은 분명 중요하지만 과도한 사회적 권력 관계에 따른 직간접적인 이득은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과거 공리주의적 관념에 따라 해석되어온 기회의 균등과 평등 역시 현재의 시점에서는 각 개인들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집합적인 공동선을 위한 기계적인 절차와 정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모의 자식들이 교육과 진로의 상황에서 자원의 이득을 받을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 자본주의적 노선하에 있는 현재의 민주적 공동체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기회의 균등을 현실에서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선택과 삶의 방향성이라는 잣대로 수동적인 균등의 조항을 사회 전체에 주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하이에크는 “사회 정의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콜린 크라우치 역시도 “신자유주의자들은 타인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밝힌 바와 같이 이론적인 것을 넘어 교조적인 수준에 이른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평등의 요구에 병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는데에는 자신들의 자유와 더불어 강제적으로 ‘어떠한 개입없는 시장 자유’를 위해 타인들의 자유까지 인질로 삼기까지 합니다. 저자가 글에 언급하듯이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입에 ‘평등’이라는 단어를 공식석상에서 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언행에 따른 논법이라는 걸 차치하더라도 그 내면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는 시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거의 명백한 것이죠. 덧붙여, “이사야 벌린이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제시해 줄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그런 방법에 따라 살도록 갖에하는 교의들이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뒤이어 4부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대 공동제주의라는 비교적 분석으로 양자간의 오해와 한계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에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에 가해지는 7가지 반론을 소개하고 각각의 항목에 대한 분석과 기존에 가해졌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각에 해당하는 저자의 비판적 논법들이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만 기존에 있어서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있었다는 측면의 인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집합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걸 넘어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를 대결론으로 삼아 자유주의 자체를 제일선이라 주장했던 이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정치적 참여에 따른 적극적 자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과연 ‘타인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인 애덤 스위프트는 이와 관련해서 자유주의자들이 기본적인 공동선 개념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와 의무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중립적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율성과 각 개인의 삶의 선택과 영위에 대한 주의로서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의 수적 범위와 영향력은 매우 협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의 전세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여기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보수 우익의 정치인들 그리고 ‘부자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부유층의 결합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약간의 첨언으로 마이클 왈저와 로버트 달로 비롯되는 공동체적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다소 순진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론격으로 각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해에 왔는데요. 오늘날 극우 및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에 있어 다원주의는 매우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고 있고 정치 문화적인 측면에서 시민들이 분리되고 단순 객체화되는 현상은 각자가 다원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원성의 회복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 고통이 따르는 것으로 시민들의 노력이 분명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4부 거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에 있어 재화의 사회적 의미에 따라 그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논법이 큰 반향을 얻고 있습니다. 로널드 드워킨은 부유층에게 강제로 돈을 걷어 하위층의 삶의 개선에 투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옳은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하위계층의 삶의 개선이 부유층에게도 이익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드워킨의 논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바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재화의 사회적 의미에 따른 분배’는 도덕적 이상주의적 접근을 넘어 현실적으로 그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과도하고 비도덕적인 경제적 불평등 상황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서도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5부 역시 시민의 정치 참여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국민국가주의에서 이들은 우리 국민이고 저들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으나, 저들은 그러한 권리를 박탈해야한다는 논리들이 먼저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좀 더 안전하고 복리에 따른 삶을 영위하고자 각자가 사회 계약에 근거한 사회를 만들었다면 법에 기초한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적 망상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각각의 시민들이 ‘각자도생’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각자의 관심과 의무가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립적 자유를 운운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서로를 배려하는 시민이 부재한 도식적인 국가의 역할론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1. 글의 125페이지에 있던 ‘비이적’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비의적’이라는 단어로 수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득 오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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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19-12-17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게 기실 공공영역의 시장화를 포장한 경우가 많지요.
도덕/비도덕의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같은...

베터라이프 2019-12-17 23:45   좋아요 0 | URL
저도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약간 첨언을 드리자면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확실히 민주주의 및 민주체제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실상의 과두제를 그들은 염두해 있고, 각국의 부유층이 자원을 들여 구축하는 자신들의 권리 보호 증진이 실상은 이런 맥락이 아닌가 의심해보게 됩니다. 예전에 태국에서는 변호사들을 비롯 의사들과 각종 전문직들이 지방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철폐하라는 시위를 벌인적이 있습니다. 이건 개번 매코맥의 진술이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하여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이유가 어떻든간에요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
데이비드 굿하트 지음, 김경락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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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굿하트는 지난 12년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재직하고 이 기간에 독일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로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특히 각계에서 촉망받는 시사 잡지인 ‘프로스펙트’의 창립자로서도 유명한데요. 정치 성향으로는 골수 노동당원이자 중도 좌파 성향을 지닌 그가 현재 브렉시트를 비롯한 영국 내 사회적 이슈들을 진단하며, 진보와 보수라는 기존의 정치이념적 구분을 넘어 다양한 틀에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7년 “The Road To Somewher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아주 최근인 2019년 11월에 소개되었습니다. 다만 번역된 책의 제목과 원제가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국역된 제목이 꽤 절묘한 배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저자가 이 글에 고안해 놓은 ‘애니웨어’와 ‘섬웨어’에 대해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사회과학 서적과 언론 지상을 통해 진보와 보수, 부유층과 중산층과 하위 노동계층, 만성 실업계층 및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것과는 별개로 저자는 ‘애니웨어’와 ‘섬웨어’라는 용어로 영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사회 계층적 구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애니웨어’는 대체로 부유층과 성취 욕구를 갖고 있는 전문직을 포함한 상위 20% 이내의 계층을 뜻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학 졸업장을 취득하고 있고 대체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애니웨어에 속하는 사람은 오늘날 문화와 사회의 지배자다”라는 문장은 아주 대표적인 설명입니다. 반대로 ‘섬웨어’는 대체로 고단한 노동 계층 내지는 사회적 지위로 봤을 때, 중간보다 못하거나 그 밑에 있는 사람들로 전통주의적인 가치관을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때로는) 포퓰리즘을 지지하고 이들 모두가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자유주의적 정치와 경제주의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대부분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엘리트 계층과 소득 및 사회적 지위로 상위 계층을 모두 포함해 섬웨어로 지칭한 것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만 반대로 애니웨어에 대한 설명과 구분이 약간 미흡하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저자 스스로 애니웨어 및 섬웨어에 대한 한계를 명확히 설명했으므로 더이상 첨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영국내 인적, 사회적 계층을 애니웨어와 섬웨어로 포괄적으로 구분해 그동안 진행된 자유주의적 이행과 EU의 출범 및 대규모의 난민 발생과 이주민과 토착민의 갈등 등 오늘날 영국과 유럽이 겪고 있는 여러 갈등과 대립을 꽤 면밀하고 풍부한 자료를 근거로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데요. 특히 그런 가운데, 2장, 3장, 4장 그리고 5장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3장, ‘포퓰리즘 부상과 좌파의 위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우파와 적극적으로 결탁한 ‘우파 포퓰리즘 및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그동안 좌파의 존재감을 지워왔는지에 대해 정치사회학적 공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포퓰리즘 운동은 적어도 애니웨어가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과도한 확산과 여기에 바탕을 둔 정치 기조에 대한 정상적인 반작용이다”라는 비평을 덧붙입니다. 내부자와 외부자 (대부분 섬웨어)의 정치적 소외가 가중되어 기존의 애니웨어가 주도하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포퓰리즘이 되어왔고, 정치적으로 극심한 소외감을 느낀 하위 계층들이 태생적인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의제를 들고 나와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지지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종래의 카스 무데와 같은 많은 포퓰리즘 연구자들이 포퓰리즘 자체를 도식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정형적인 정치 형태가 없다는 것에 이것을 정상 정치로 봐야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할 수도 있겠는데요. 우선 이 점은 차치하더라도 현재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이들의 하위 계층 지지자들이 기존의 엘리트주의를 타도하고 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 스스로가 그 틈에 들어가려고 하는 정치 본질적 형태를 봤을 때, 이 교묘한 정치인들이 대중 정치를 오도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상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어떠한 대안 없이 그 체제를 자신으로 대체하려는 욕심이 이미 여러 사례로 드러나기도 했었죠.

이렇게 무시못할 유럽의 포퓰리즘 세력의 등장과 정치적 재배치는 이들의 정치 기조가 부정할 수 없는 인종주의와 혐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프랑스 르펜의 극우정치는 다소간 인종주의적 구호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저자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잘못 평가하고 있는 트럼프와 같은 경우는 그가 과거 흑인에 대한 심각한 인종적 편견으로 비추어 봤을 때, 반대로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봐야 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몇 년전, 프랑스의 이슬람 청년 이슈들과 영국의 여러 지역이 오늘날 미국의 남북으로 인종적 포용이 구분되는 것처럼 반이민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는 특히 섬웨어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면화 되었습니다. 노동 시장에서의 이민 유입은 섬웨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고, 이러한 이민 유입을 대체로 지지한 애니웨어에게 광범위한 엘리트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에 까지 이르렀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엘리트 지배체제는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직업적 정치인들의 등장과 지배의 권한을 시민이 위임한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인 기득권 지배체제에 대해 동의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 상황에 대한 건설적 구축은 그 반대에 마땅하고 현실적인 대안이 존재해야 하며,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뒤이어,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에 유입된 난민(일전에 밝혔듯이 저는 난민이라는 표현 보다는 실향민 내지는 내쫓긴 국적박탈자 등으로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은 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대규모 이민 행렬과 더불어 기존의 유럽 사회에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선 저자는 애니웨어와 섬웨어 간의 기존의 세계를 보는 인식 구조에서 먼저 이것을 구분하고 가장 먼저 선결해야되는 부분은 “이 이슬람 이주민들에 대한 기존 토착민들의 사회적 규칙에 대한 교육과 정상적인 사회공동체로의 편입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무슬림들은 다른 소수 인종에 견줘 상대적으로 사회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이러한 상황에 놓인 무슬림들의 사회 분리가 과연 이들만의 책임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고려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외부 유입된 이민들의 사회 통합이라는 주제가 특히 국민 국가적 가치에서 기존의 사회 안전 보장책들이 그 안에 통합된 사회 구성원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는 노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땅히 이주민들도 자신이 새롭게 둥지를 튼 사회에 적극적으로 통합될 노력을 기울이고 기존의 사회 구성원들 역시 이들을 포용하여 이주민들이 정당한 납세자의 위치로 올라서 동등한 세금 납부와 더불어 책임감을 갖추게 하는데 조언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4장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보다 ‘분별력 있는 세계화’에 노력하지 않고 “엘리트들이 평범한 이의 두려움을 외면하며 심지어 깔보는 듯한 태도를 반복해 왔다”는 것은 어떤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데이비트 굿하트는 자신이 설명한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관계에서 섬웨어가 애니웨어가 되기란 어려울 것이라 예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너희들도 노력해서 엘리트가 되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사회 전반적인 상황에서 애니웨어와 섬웨어가 투입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시점에 개인의 노력 만으로 전통주의적 계층 이동을 바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온건한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 모색으로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하고 있는데요. 과연 포퓰리즘이 온건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꽤 부정적입니다. 시민 모두가 적절한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물론 당연하겠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객관적인 분별력을 발휘하기란 매번 어려운 법입니다.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속한 주의 시민들이 지난 대선에 어떠한 선택을 했고, 나가서 총들고 싸우라는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서의 과격한 발언에 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우리도 이미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 내의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갈등의 첨예화는 유럽의 경우 난민 문제와 유럽 통합 등과 같은 다른 문제로 수면 아래에 불안하게 나마 잠겨 있지만, 이것을 언제까지나 극우 포퓰리즘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가 분명 2008년의 실패를 안고서도 어떤 시각과 행동의 변화를 찾지 않는다면 기존의 민주주의적 질서와 완만한 사회 구조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도 있을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돈을 더 줄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를 해왔고, 그처럼 각자의 이익에 기반한 참정권의 권리를 행사해 왔습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이상에 부합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에게 꽤 강하고 절박한 변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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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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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영국에서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에게는 세계의 불의와 부정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목소리를 냈던 위대한 지식인이자 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에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바우만의 여러 글이 번역되어 슬라보예 지젝과 더불어 ‘어떤 현상’으로까지 비춰지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특유의 무엇과도 타협할지 모르는 정신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겁니다. 그런 그의 학문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는 이 책은 지난 2013년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의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거의 같은 해에 번역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매한 판본은 선집판으로 표시되는 2019년 판인데요. 저자인 바우만과 제목으로 비추어 보아 꽤 판매가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초판에서 약간의 번역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점을 제외한다면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받는 이유가 독자 입장에서는 현 시대를 반영하는 척도이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척 콜린스의 “왜 세계는 불평등한가”에서도 자세한 지표로 소개되어 있듯이 오늘날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 지수는 매우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바우만의 언급대로 “소득의 최상위층과 그 나머지 계층의 차이”라고 해석해도 될만큼 이 심각한 차이는 계속 누적되어 왔습니다. 또한,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많은 기업의 수장들이 대규모 인원 감축을 자신의 성과로 여겨왔으며, 그로인한 퇴직금 보너스 경쟁은 파리드 자카리아가 비난한 ‘거대한 도덕적 해이’와도 일치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여기에는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수많은 중산층이 프레카리아트화 되었다는 것도 언급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세계화 이행을 보며 바우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소수의 부가 과연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는가?” 라는 뼈아픈 진실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우만은 이 글 3장에서 우리가 왜 광범위한 기제로서 ‘경제적 불평등과 이를 고착화 시키는 맹목적 현실 이론들과 인간 경험의 결과물들”을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소위 인간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존재 의의로 해석 되는데에는 시장은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시장 안에서 경제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존재 의의는 마찬가지로 부정당할 수 없다는 검증과 검토가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우만은 경제학과 시장은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초에 주어지거나 운명으로 여기는 것에 학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제와 시장의 신격화는 우리가 현재의 불평등을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과거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이 전에는 “일상적인 노역과 부역이 조금만 늘어나도 ‘관습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농민 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다”고 그는 지난 역사로서 뒤돌아 봅니다. 사실상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권력이 자리할 수 없다는 종래의 계몽주의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될 권리와 인권으로 결국 억압에서 해방으로 나타났듯이, 바우만은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우리의 자포자기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더욱이 GNP 열거되는 경제성장주의에 대한 사회국가적 맹목과 이러한 궤도 안에 한웅큼이라도 뭔가 ‘경제적 덤’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일반적인 이상과 현실의 차이보다도 더 냉엄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음에도 우리는 그저 마냥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앞선 저 부분과 관련해 일종의 ‘갇혀있는 이중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금융 자본주의의 발전 상황에서 증권화를 비롯한 고도화 된 금융기법이 가만히 숨만 쉬어도 초단위로 가진 부가 증대하는 소수의 부유층들이 그 본질로서 오로지 ‘자신의 보호와 이익 보전’에만 힘쓰고, 이러한 시스템이 뭔가 잘못된 것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배타적인 이익추구가 결국 공익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뜻모를 믿음과 자본주의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마찬가지로 그 혜택이 사회 전반에 도달할 것이라는 종교인과 같은 믿음 말이죠. 이 두 가지의 구조가 결과적으로는 그 나머지 다수의 시민들을 고통에 이르게 했으며, “이러한 기존의 부자들이 ‘실물 경제’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는 것”과 “개인의 재능과 능력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였다”는 바우만의 말은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구조 가운데서 자본주의와 새로 이식된 ‘소비 지상주의’는 전통적인 도덕적 관념에서 개인과 개인들의 유대나 이해에 반하는 ‘개인적 나르시시즘’에 더 몰두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소비를 하는 자들은 행복하고 소비를 못하는 자들은 더 불행하게 만드는 단순한 괴리 현상으로 여길 수 없을만한 폐해를 낳았습니다. 즉, 이러한 소비를 배경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개인의 이기심’이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바우만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을 담은 글도 일찍이 출판 되기까지 했습니다.

결론과 함께, 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정의로 가는 열쇠’로서 우리가 필히 수행해야 될 ‘인간 친화적이고 협력적인 공생’이라는 주제로 여러 방안들을 그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잠깐 요약해 본다면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가 그동안 전혀 ‘검토나 의혹이 없는 앞선 수많은 암묵적 전제들’을 스스로 나서서 검증해 나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우만은 글의 2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의 이상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이 높으면 높을 수록 이것을 현실로 체념하게 된다는 그의 조언은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숙제를 남기고 간 바우만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그가 말했던 ‘우리가 서로 손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우리의 선택이 진정 중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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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 억만장자 코크는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왔는가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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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역사학자로 불리길 원한다는 저자 낸시 맥클린은 브라운대학과 위스콘신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마친 뒤, 노스웨스터 대학을 거쳐 현재 듀크 대학에서 역사학 및 공공정책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이 책은 공공선택과 지대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맥길 뷰캐넌과 그의 사상적 행적을 치밀하게 탐구했는데요. 여기에 더하여 뷰캐넌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미국 내 비상장회사 가운데 두 번째 순위에 있는 코크 인더스트리의 찰스 코크의 행적 또한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글에 앞서 뷰캐넌과 코크 이 두 사람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인식하고 기업인들과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매기는 세금과 이와는 반대로 정부에서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 역시 인간 자유의 측면에서 대표적인 해악으로 여기는 등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뷰캐넌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보장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긴 해도 그것을 대놓고 솔직히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취지의 내면과 현실의 반대되는 역설을 실질적으로 정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과거를 저자는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Democracy In Chains”로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19년 11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흔히 좌파들에게 가장 공격 받는 경제학자로 일컫는 제임스 맥길 뷰캐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 당시 “시골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방의 교육대학을 나오고, 기득권 대학과는 아무 연고도 없고, 학계에서 유행하는 온건 좌파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지도 않고, 전적으로 비주류인 주제를 연구하고..” 라는 소감을 밝힌바가 있습니다. 저자인 맥클린도 뷰캐넌이 젊은 시절에 소위 아이비 리그 출신들에 대한 반감과 방어기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언급합니다. 아주 단순한 개인사에 입각해 그가 노골적인 자유주의 (특히 가진자들과 기득권들을 정부가 수탈한다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에 경도된 것은 스스로 홀로 일어선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손으로 어떠한 성과를 얻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극심한 반감과 혐오를 갖게 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외눈박이 학자’처럼 그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경제적 자유와 시장에 정치를 투영시키려는 정부를 반대하고 그외의 다른 가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냉담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칠레 피노체트 정권에 기득권과 부유층에 유리한 헌법 개정을 조언하고 관여했으면서도 사실상 다수의 칠레 시민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신음한 다수 시민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어떻게 민주주의가 그들로부터 박탈당했는지 학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것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뷰캐넌과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학자들이 칠레의 군부 독재 정권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그토록 쉽게 자신의 임무와 융화시킬 수 있었을까?” 라는 매클린의 질문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요즘같이 학문의 진정성이 결여되어 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학자인 사람이 공익과 시민의 자유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냉담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과거, 전세계 상아탑의 본산이라 일컫는 미국 대학에서 자리를 잡은 학자가 기본적인 양심도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태도를 보인 것은 저자인 맥클린이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믿고만 싶을 지경입니다.

초기에 뷰캐넌이 관여했던 몽 펠레인 소사이어티의 기조 역시 “정부가 나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의 이른바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훗날 시카고 경제학파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단은 최종적으로 시민이 경제적으로 정부에 기대는 것을 이론 및 사상적으로 확립시키고 시장 전반에 있어서 기업인들에 대한 전면 재량권과 과도한 세금을 철폐하고 사실상 정부가 야경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점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1900년 이전으로 국가 시스템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경제적 말살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극심히 반대하고 혐오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붕괴한 경제 시스템과 사회 기반을 되돌리기 위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위 부유층 및 기업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던 것으로 유명했고, 당시 내각의 구성원들이 거의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뷰캐넌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있었고 경제학 전반에서의 ‘지대 추구 이론’을 밝혀냈음에도 기업들이 법적 그리고 정치적 수단을 통해 좀 더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가 없던 것으로 보아 앞선 해석들과 더불어 뷰캐넌이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초임으로 근무하던 버지니아 대학의 경제학과 당시 공립학교들의 흑백 통합 분위기에 리틀록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종주의적 차별 의식을 보이는 것 또한 정치역사의 진보를 믿는 우리라고 하더라도 심히 뜨악한 장면입니다. 그가 근무하던 대학의 버지니아 주는 보수주의자인 해리 버드의 영향력에 있던 소위 귀족주의적 분위기였습니다. 거의 이 글 전반을 장식하고 있는 ‘주의 권리 state’s right’는 국가 차원의 정책에 있어서 연방 정부의 관리를 받는다기보다 각각의 주들은 스스로 통치할 권한이 있으며 또한 주마다 각각의 상황이 있다는 인식을 넘어 ‘연방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수 없는 배타적 권리’를 표방합니다. 마찬가지로 뷰캐넌이 그토록 혐오하는 ‘집합주의’에 대해서도 과거 파시즘 시대에서나 통용될 만한 인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합쳐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중 다수를 몰아 비판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조심스러운 내용이지만, 일반적인 보수 다수와 극우들을 포함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명목상의 수단화로 삼아 겉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표상을 밝히고 있지만,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 정치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주도하는 정치와 이들의 다수결 및 의견 개진을 소수의 기득권들과 기업인들이 이를 신뢰하지 않으며, 이러한 가운데 뷰캐넌 역시 ‘대중의 반역’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공감했던 것도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 이런 ‘경제적 자유’에 반하는 토대였냐고 반문해 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고도화 된 금융 기법이 발달하고 미국 내 경제 활동에 대한 보장, 이를테면 아직도 기본적인 노조 활동이 어려운 주들이 태반이고 고소득층에 대한 꾸준한 세금 감면과 세금 혜택 및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을 비롯한 이들을 갖은 방면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이 부문만 봐도 저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2008년 뉴욕 발 금융 위기에서는 리먼 브라더스를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금융 기업들이 구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심지어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사회적 체제를 만드려고 하는 것은 뒤의 헌법 개정 시도 만으로도 충분히 반민주적인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건 모든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까지 자신의 면전에 ‘반민주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매우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글 초입에 낸시 매클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난 제임스 M. 뷰캐넌의 자료가 담긴 문서들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뷰캐넌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는 찰스 K. 롤리는 과연 뷰캐넌에 관해 어떠한 기록을 쓸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다수의 권리나 (기본적인) 이익을 악으로 표명하고 소수의 경제인들과 기업 경영자들의 배타적 권리와 자유에 힘쓴 이 노벨 경제학자의 실체가 뒤에 저자의 수많은 주석으로 그 근거들을 대고 있는데요. 사뭇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뷰캐넌과 코크가 추구한 그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만의 자유였으며 일반적으로 대중 기반에 있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불신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 학자의 행적을 낱낱이 밝힌 책의 진정성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볼수 있겠죠. 그리고 이러한 외눈박이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사회와 정부로까지 확장시키고 현실화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10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 책의 값어치와 내용을 고려 한다면 실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관련된 성명 표기가 이 글에서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로” 로 되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오타로 표시했는데, 나중에 5번 정도 반복해서 나오더군요. 외래 성명 표기여서 구글을 포함한 몇 군데 포탈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미제스로’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문 표기도 Mises인데, 제가 모르는 오스트리아식 독일어 표현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일반적으로 ‘미제스’로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반박할 수 없는데요. 이 부분도 가능하다면 편집자 내지는 출판사의 입장을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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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19-12-01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군요. 대한민국에도 공공선택론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학자들이 학계에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이예크나 미제스처럼 알긴 알아둬야 할 사람인 듯 합니다...

베터라이프 2019-12-01 22:46   좋아요 0 | URL
당시에 뷰캐넌이 고안한 이 공공선택론이 꽤 이론적으로 중요했다고 매클린도 인정하고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그가 학자로서의 명성과 성취에 비해 사회실천과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평하면서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이에크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고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뷰캐넌의 공공선택론에 대해 어떤 숨은 맥락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음모론에 가까울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몇군데 기사를 좀 찾아봤지만 뷰캐넌은 확실히 정부가 사용하는 비용과 지출에 있어서 꽤 비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공비용과 관련된 논의와 사회보장제도와 연관된 지출 등 이런 것들이 민영화되지 않고 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 그 자체로 시장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의 짧은 해석은 대충 이렇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sejongbook 2019-12-1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세종서적입니다.
저희 책을 구매해주시고 수정사항을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다.
추후에 재쇄를 찍을 때 알려주신 수정사항을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도서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진보의 대안 - 자본의 민주화와 역량증진 정치
로베르토 M. 웅거 지음, 이병천.정준호 옮김 / 앨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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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출신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정치철학자인 로베르트 M. 웅거는 29세 때, 하버드 로스쿨의 종신교수의 직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학계에서도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웅거의 글과 관련하여 이 책의 옮긴이 서문을 작성한 이병천 교수도 그의 글이 다른 학자들이나 지식인들과 달리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는 것에 저역시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병약해진 전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혁신적 개선과 치료를 주장한 그의 ‘민주주의 넘어’를 읽었을때도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직관적인 논법에 절로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의 또다른 이론적 동류로서 좀 더 대중적인 이 책이 번역이 된 것은 실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2009년에 원제, “The Left Alternative”로 처음 출간되어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번역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과 관련해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원래 국역된 제목이 ‘좌파의 대안’으로 인쇄가 되어도 될 법한데, 진보라는 단어로 대체한 것은 책에 대한 독자들의 원만한 접근을 위한 시장주의적 의도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자기 검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인민 주권과 관련 ‘인민’이라는 번역을 본문에 사용했음에도 왜 좌파라고 명확히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본문에 진보와 좌파가 동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원래 좌파 The Left를 그냥 진보로 번역했는지 약간 의구심이 드는데요. 뭔가 이래저래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군요.

저자인, 로베르트 웅거는 스스로를 ‘민주적 평등주의자’로 읽혀지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입니다. 이 표현이 조금 이상해보입니다만 민주주의의 평등의 원칙이 바로 서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의 (수정된) 제목대로, 우리는 과거 마거렛 대처가 부르짖었던 ‘신자유주의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는’ 정치경제적 일방주의의 이념이 강요된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웅거는 2008년 미국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가 그 실체를 잃고 말았다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지만, 분명 신자유주의가 철회되거나 재구성된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정권 이후 등장한 버락 H. 오바마 정권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금융인들을 어떠한 법적 기소 없이 놓아주고 심지어 공적 자금으로 이들이 은퇴 자금 놀이를 한 것을 그냥 수수방관 해버린 점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종말을 고했다고 봐야 했으나, 웅거가 일침하는 대로 경제적 합리성을 맹신하는 일관주의적 입장에 의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재조정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웅거는 “세계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에 맞서 이를 극복할 필요성으로 금융과 생산 관계를 조절하는 구조를 재구축할 기회 경제의 회복과 재분배를 동시에 실현할 연결고리 모색의 중요성의 기로에 서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웅거의 금융 부문에 대한 명료한 대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제한적인) 한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한적인 한계라는 구절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웃기지만 확실히 웅거가 금융 시장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만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안 제시가 약간 부족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경제적 불평등의 입장에서 충분한 국내 저축과 소비세 징수로 여건의 개선을 노려볼만 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만, 특히 소비세 징수 정도에 대한 문제와 이를 위한 과세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과연 어떤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초반의 문제제기 겸 해결 당위성과 관련해, 진보 내지는 좌파가 신자유주의적 파고의 시기에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샹탈 무페의 현실 인식과 상당히 유사한 발언인,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진보 좌파가 전격적으로 투항해 세계화에 수용되었다”는 점을 먼저 꼽고 있습니다. 반대의 보수 우파가 자유주의적 경제 합리성에 순응해 조절 기능이 없는 자유방임 시장주의에 경도되어 어쩌면 미국의 억만장자 코크와 같은 자들이 자신의 권력과 대중 정치의 불신으로 경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보수 정치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데 일조했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사회나 정치 일선에서 가장 기본적인 대안이라는 것은 과반의 힘을 가진 정치 세력을 견제하는 반대의 창의적인 정치 세력이 있어야 함은 매우 자명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민주주의적 혁신’과 ‘고에너지적 민주주의’ 등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 프레카리아트라는 표현이 학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전세계의 수많은 근로 노동자들은 숨가쁜 노동에 짓눌려 자신의 삶이 개선되고 좀 더 나은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조차 꿈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 사회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계급 이동성의 제약, 정치 참여의 감소, 사회적 연결의 악화 등 반 민주적 굴절들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죠. 달리 말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미국의 적당한 시장에 대한 거리두기를 저자 역시 확실하게 비판합니다.

이렇게 웅거가 강조하는 진보 좌파의 역할론과 관련해 일찍이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마스 프랭크는 “우파는 돈이 되지만, 좌파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양 정치의 극단적인 차이를 드러낸 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합리화가 부국이 빈국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처럼 강요되어 여기에 합류한 보수 우파와는 달리 진보 좌파는 이념적인 것을 떠나 사회와 시민을 위해 적절한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극적 대안으로 비롯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가 충실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 사회화 비용을 과세로 충당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좌파가 어떠한 대안을 명확히 제시하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연유로 진보 좌파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왜 금권 정치와 경제적 합리성에 매몰되지 않는 꽤 건전한 보수주의는 탄생하지 않았는지 이것을 맹목적인 이념적 강요로 해석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즉, 전통적인 정치와 경제에서의 도덕적 가치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보수와 진보의 대결 문제는 거의 무의미한 논쟁이 되지 않았나 성급히 판단해봅니다. 다만,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 문제로 변질되는 대결 구도를 ‘무제한적인 다원주의’가 아니라,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건전한 다원주의’가 이를 치료하고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더할 나위 없는 기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역시 깊은 공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다원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는 이졸데 카림이 예견한 바와 같이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견으로는 다원주의가 꽤 단순한 이상주의로서 쉽게 그 노정이 완료될 것으로 보이나, “사회 통합적 성장에 대한 탐색과 달리, 다원주의에 대한 요구를 정치경제적 대안이 그 효력과 범위에서 보편적이기를 요구하는 것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로베르트 웅거의 통찰은 매우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그동안 진행된 사회학에서의 자기 합리화와 인문학에서의 현실도피주의 경향은 전반적인 이들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데 부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것은 오로지 미국 내의 현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조가 전세계적으로 매우 특별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아주 쉽지만 어려운 해결책의 길은 미국의 세계 경제를 포함한 주도권과 헤게모니를 정상적인 민주주의하에 놓인 국가들과 연대해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를 민주화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한 전략과 관련해서도 웅거는 여러가지 선결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량이 상당해 이곳에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시장의 변덕과 정치적 불운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기본적 권리와 역량을 보장해야 한다”는 명제로 대체할까 합니다.

결국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안의 수단을 잃어버린 진보 좌파가 대의적인 측면에서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수많은 근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변해 나가는 것이 최초의 걸음이라고 웅거는 제시합니다. 시장을 전복시키거나 어떠한 위기 상황의 혁명을 꿈꾸는 진보 내지는 좌파 세력은 그 정치적 선명성을 결코 달성할 수 없으며, 인간의 고유한 양심을 지켜내려는 그 어마어마한 시도와 동일하게 어려운 길에 들어서야 하며, 모든 젊은인들을 정치에게서 멀어지게 한 그 음모론을 불식시키고 모두가 에너지 넘치고 활발한 정치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진정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것이 이상과 현실에 가장 부합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뿐만 아니라 시민과 시장 사이의 호혜적 관계 또한 구축해 진정한 경제와 시장주의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우리의 남은 과제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더불어 진정 한 사람의 속내 깊은 웅변과도 같은 이 글이 모쪼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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