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 억만장자 코크는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왔는가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이 역사학자로 불리길 원한다는 저자 낸시 맥클린은 브라운대학과 위스콘신 대학에서 각각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마친 뒤, 노스웨스터 대학을 거쳐 현재 듀크 대학에서 역사학 및 공공정책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이 책은 공공선택과 지대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맥길 뷰캐넌과 그의 사상적 행적을 치밀하게 탐구했는데요. 여기에 더하여 뷰캐넌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미국 내 비상장회사 가운데 두 번째 순위에 있는 코크 인더스트리의 찰스 코크의 행적 또한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글에 앞서 뷰캐넌과 코크 이 두 사람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인식하고 기업인들과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매기는 세금과 이와는 반대로 정부에서 보장하는 사회보장제도 역시 인간 자유의 측면에서 대표적인 해악으로 여기는 등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뷰캐넌의 표현대로라면 “사회보장제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긴 해도 그것을 대놓고 솔직히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취지의 내면과 현실의 반대되는 역설을 실질적으로 정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두 사람의 과거를 저자는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Democracy In Chains”로 국내에는 가장 최근인 2019년 11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흔히 좌파들에게 가장 공격 받는 경제학자로 일컫는 제임스 맥길 뷰캐넌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 당시 “시골 공립학교를 다니고, 지방의 교육대학을 나오고, 기득권 대학과는 아무 연고도 없고, 학계에서 유행하는 온건 좌파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지도 않고, 전적으로 비주류인 주제를 연구하고..” 라는 소감을 밝힌바가 있습니다. 저자인 맥클린도 뷰캐넌이 젊은 시절에 소위 아이비 리그 출신들에 대한 반감과 방어기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고 언급합니다. 아주 단순한 개인사에 입각해 그가 노골적인 자유주의 (특히 가진자들과 기득권들을 정부가 수탈한다는 감정을 가질 정도로)에 경도된 것은 스스로 홀로 일어선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손으로 어떠한 성과를 얻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극심한 반감과 혐오를 갖게 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외눈박이 학자’처럼 그저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경제적 자유와 시장에 정치를 투영시키려는 정부를 반대하고 그외의 다른 가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냉담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칠레 피노체트 정권에 기득권과 부유층에 유리한 헌법 개정을 조언하고 관여했으면서도 사실상 다수의 칠레 시민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무감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푸틴 치하의 러시아처럼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신음한 다수 시민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어떻게 민주주의가 그들로부터 박탈당했는지 학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것에는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저에게는 꽤 충격이었습니다. “뷰캐넌과 몽 펠레린 소사이어티 학자들이 칠레의 군부 독재 정권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그토록 쉽게 자신의 임무와 융화시킬 수 있었을까?” 라는 매클린의 질문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요즘같이 학문의 진정성이 결여되어 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학자인 사람이 공익과 시민의 자유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냉담하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과거, 전세계 상아탑의 본산이라 일컫는 미국 대학에서 자리를 잡은 학자가 기본적인 양심도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태도를 보인 것은 저자인 맥클린이 뭔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믿고만 싶을 지경입니다.

초기에 뷰캐넌이 관여했던 몽 펠레인 소사이어티의 기조 역시 “정부가 나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의 이른바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훗날 시카고 경제학파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 집단은 최종적으로 시민이 경제적으로 정부에 기대는 것을 이론 및 사상적으로 확립시키고 시장 전반에 있어서 기업인들에 대한 전면 재량권과 과도한 세금을 철폐하고 사실상 정부가 야경 국가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점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1900년 이전으로 국가 시스템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경제적 말살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극심히 반대하고 혐오했습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붕괴한 경제 시스템과 사회 기반을 되돌리기 위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소위 부유층 및 기업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렸던 것으로 유명했고, 당시 내각의 구성원들이 거의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뷰캐넌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있었고 경제학 전반에서의 ‘지대 추구 이론’을 밝혀냈음에도 기업들이 법적 그리고 정치적 수단을 통해 좀 더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가 없던 것으로 보아 앞선 해석들과 더불어 뷰캐넌이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초임으로 근무하던 버지니아 대학의 경제학과 당시 공립학교들의 흑백 통합 분위기에 리틀록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난하면서까지 인종주의적 차별 의식을 보이는 것 또한 정치역사의 진보를 믿는 우리라고 하더라도 심히 뜨악한 장면입니다. 그가 근무하던 대학의 버지니아 주는 보수주의자인 해리 버드의 영향력에 있던 소위 귀족주의적 분위기였습니다. 거의 이 글 전반을 장식하고 있는 ‘주의 권리 state’s right’는 국가 차원의 정책에 있어서 연방 정부의 관리를 받는다기보다 각각의 주들은 스스로 통치할 권한이 있으며 또한 주마다 각각의 상황이 있다는 인식을 넘어 ‘연방정부가 일일이 관여할 수 없는 배타적 권리’를 표방합니다. 마찬가지로 뷰캐넌이 그토록 혐오하는 ‘집합주의’에 대해서도 과거 파시즘 시대에서나 통용될 만한 인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합쳐 정부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중 다수를 몰아 비판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약간 조심스러운 내용이지만, 일반적인 보수 다수와 극우들을 포함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명목상의 수단화로 삼아 겉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표상을 밝히고 있지만,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 정치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주도하는 정치와 이들의 다수결 및 의견 개진을 소수의 기득권들과 기업인들이 이를 신뢰하지 않으며, 이러한 가운데 뷰캐넌 역시 ‘대중의 반역’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공감했던 것도 이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사회 정치적 상황이 이런 ‘경제적 자유’에 반하는 토대였냐고 반문해 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고도화 된 금융 기법이 발달하고 미국 내 경제 활동에 대한 보장, 이를테면 아직도 기본적인 노조 활동이 어려운 주들이 태반이고 고소득층에 대한 꾸준한 세금 감면과 세금 혜택 및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을 비롯한 이들을 갖은 방면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이 부문만 봐도 저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2008년 뉴욕 발 금융 위기에서는 리먼 브라더스를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금융 기업들이 구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심지어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사회적 체제를 만드려고 하는 것은 뒤의 헌법 개정 시도 만으로도 충분히 반민주적인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건 모든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까지 자신의 면전에 ‘반민주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매우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글 초입에 낸시 매클린은 2013년 세상을 떠난 제임스 M. 뷰캐넌의 자료가 담긴 문서들이 방치되어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뷰캐넌의 전기를 쓰려고 한다는 찰스 K. 롤리는 과연 뷰캐넌에 관해 어떠한 기록을 쓸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다수의 권리나 (기본적인) 이익을 악으로 표명하고 소수의 경제인들과 기업 경영자들의 배타적 권리와 자유에 힘쓴 이 노벨 경제학자의 실체가 뒤에 저자의 수많은 주석으로 그 근거들을 대고 있는데요. 사뭇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뷰캐넌과 코크가 추구한 그 ‘자유로운 사회’는 자유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만의 자유였으며 일반적으로 대중 기반에 있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불신한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 학자의 행적을 낱낱이 밝힌 책의 진정성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볼수 있겠죠. 그리고 이러한 외눈박이 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사회와 정부로까지 확장시키고 현실화하려고 했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10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 책의 값어치와 내용을 고려 한다면 실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관련된 성명 표기가 이 글에서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로” 로 되어 있더군요. 처음에는 오타로 표시했는데, 나중에 5번 정도 반복해서 나오더군요. 외래 성명 표기여서 구글을 포함한 몇 군데 포탈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미제스로’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문 표기도 Mises인데, 제가 모르는 오스트리아식 독일어 표현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일반적으로 ‘미제스’로 알려져 있는 것은 거의 반박할 수 없는데요. 이 부분도 가능하다면 편집자 내지는 출판사의 입장을 듣고 싶군요.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풍오장원 2019-12-01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군요. 대한민국에도 공공선택론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학자들이 학계에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이예크나 미제스처럼 알긴 알아둬야 할 사람인 듯 합니다...

베터라이프 2019-12-01 22:46   좋아요 0 | URL
당시에 뷰캐넌이 고안한 이 공공선택론이 꽤 이론적으로 중요했다고 매클린도 인정하고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그가 학자로서의 명성과 성취에 비해 사회실천과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평하면서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이에크의 그림자는 너무나 크고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뷰캐넌의 공공선택론에 대해 어떤 숨은 맥락을 갖고 접근하는 것이 음모론에 가까울수도 있지만 이와 관련하여 몇군데 기사를 좀 찾아봤지만 뷰캐넌은 확실히 정부가 사용하는 비용과 지출에 있어서 꽤 비판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공비용과 관련된 논의와 사회보장제도와 연관된 지출 등 이런 것들이 민영화되지 않고 정부에 의해 관리되는 것이 그 자체로 시장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저의 짧은 해석은 대충 이렇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 하여튼 댓글 감사드립니다.

sejongbook 2019-12-1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세종서적입니다.
저희 책을 구매해주시고 수정사항을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다.
추후에 재쇄를 찍을 때 알려주신 수정사항을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도서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