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가 버린 사람들 -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
데이비드 굿하트 지음, 김경락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데이비드 굿하트는 지난 12년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재직하고 이 기간에 독일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로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특히 각계에서 촉망받는 시사 잡지인 ‘프로스펙트’의 창립자로서도 유명한데요. 정치 성향으로는 골수 노동당원이자 중도 좌파 성향을 지닌 그가 현재 브렉시트를 비롯한 영국 내 사회적 이슈들을 진단하며, 진보와 보수라는 기존의 정치이념적 구분을 넘어 다양한 틀에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7년 “The Road To Somewher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아주 최근인 2019년 11월에 소개되었습니다. 다만 번역된 책의 제목과 원제가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국역된 제목이 꽤 절묘한 배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저자가 이 글에 고안해 놓은 ‘애니웨어’와 ‘섬웨어’에 대해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사회과학 서적과 언론 지상을 통해 진보와 보수, 부유층과 중산층과 하위 노동계층, 만성 실업계층 및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것과는 별개로 저자는 ‘애니웨어’와 ‘섬웨어’라는 용어로 영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사회 계층적 구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애니웨어’는 대체로 부유층과 성취 욕구를 갖고 있는 전문직을 포함한 상위 20% 이내의 계층을 뜻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학 졸업장을 취득하고 있고 대체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애니웨어에 속하는 사람은 오늘날 문화와 사회의 지배자다”라는 문장은 아주 대표적인 설명입니다. 반대로 ‘섬웨어’는 대체로 고단한 노동 계층 내지는 사회적 지위로 봤을 때, 중간보다 못하거나 그 밑에 있는 사람들로 전통주의적인 가치관을 지지하고 (정치적으로 때로는) 포퓰리즘을 지지하고 이들 모두가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자유주의적 정치와 경제주의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대부분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엘리트 계층과 소득 및 사회적 지위로 상위 계층을 모두 포함해 섬웨어로 지칭한 것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만 반대로 애니웨어에 대한 설명과 구분이 약간 미흡하지 않나 싶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저자 스스로 애니웨어 및 섬웨어에 대한 한계를 명확히 설명했으므로 더이상 첨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영국내 인적, 사회적 계층을 애니웨어와 섬웨어로 포괄적으로 구분해 그동안 진행된 자유주의적 이행과 EU의 출범 및 대규모의 난민 발생과 이주민과 토착민의 갈등 등 오늘날 영국과 유럽이 겪고 있는 여러 갈등과 대립을 꽤 면밀하고 풍부한 자료를 근거로 글의 설득력을 높이고 있는데요. 특히 그런 가운데, 2장, 3장, 4장 그리고 5장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3장, ‘포퓰리즘 부상과 좌파의 위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우파와 적극적으로 결탁한 ‘우파 포퓰리즘 및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그동안 좌파의 존재감을 지워왔는지에 대해 정치사회학적 공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포퓰리즘 운동은 적어도 애니웨어가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과도한 확산과 여기에 바탕을 둔 정치 기조에 대한 정상적인 반작용이다”라는 비평을 덧붙입니다. 내부자와 외부자 (대부분 섬웨어)의 정치적 소외가 가중되어 기존의 애니웨어가 주도하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포퓰리즘이 되어왔고, 정치적으로 극심한 소외감을 느낀 하위 계층들이 태생적인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의제를 들고 나와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지지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종래의 카스 무데와 같은 많은 포퓰리즘 연구자들이 포퓰리즘 자체를 도식화하고 이론화할 수 있는 정형적인 정치 형태가 없다는 것에 이것을 정상 정치로 봐야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할 수도 있겠는데요. 우선 이 점은 차치하더라도 현재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이들의 하위 계층 지지자들이 기존의 엘리트주의를 타도하고 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 스스로가 그 틈에 들어가려고 하는 정치 본질적 형태를 봤을 때, 이 교묘한 정치인들이 대중 정치를 오도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상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어떠한 대안 없이 그 체제를 자신으로 대체하려는 욕심이 이미 여러 사례로 드러나기도 했었죠.

이렇게 무시못할 유럽의 포퓰리즘 세력의 등장과 정치적 재배치는 이들의 정치 기조가 부정할 수 없는 인종주의와 혐오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프랑스 르펜의 극우정치는 다소간 인종주의적 구호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저자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잘못 평가하고 있는 트럼프와 같은 경우는 그가 과거 흑인에 대한 심각한 인종적 편견으로 비추어 봤을 때, 반대로 우리가 집중해서 살펴봐야 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몇 년전, 프랑스의 이슬람 청년 이슈들과 영국의 여러 지역이 오늘날 미국의 남북으로 인종적 포용이 구분되는 것처럼 반이민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는 특히 섬웨어에 속한 사람들에게 내면화 되었습니다. 노동 시장에서의 이민 유입은 섬웨어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이 되었고, 이러한 이민 유입을 대체로 지지한 애니웨어에게 광범위한 엘리트 지배체제에 대한 거부에 까지 이르렀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엘리트 지배체제는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직업적 정치인들의 등장과 지배의 권한을 시민이 위임한 것으로 우리가 일반적인 기득권 지배체제에 대해 동의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현 상황에 대한 건설적 구축은 그 반대에 마땅하고 현실적인 대안이 존재해야 하며,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뒤이어,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에 유입된 난민(일전에 밝혔듯이 저는 난민이라는 표현 보다는 실향민 내지는 내쫓긴 국적박탈자 등으로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은 9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대규모 이민 행렬과 더불어 기존의 유럽 사회에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선 저자는 애니웨어와 섬웨어 간의 기존의 세계를 보는 인식 구조에서 먼저 이것을 구분하고 가장 먼저 선결해야되는 부분은 “이 이슬람 이주민들에 대한 기존 토착민들의 사회적 규칙에 대한 교육과 정상적인 사회공동체로의 편입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무슬림들은 다른 소수 인종에 견줘 상대적으로 사회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이러한 상황에 놓인 무슬림들의 사회 분리가 과연 이들만의 책임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고려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런 외부 유입된 이민들의 사회 통합이라는 주제가 특히 국민 국가적 가치에서 기존의 사회 안전 보장책들이 그 안에 통합된 사회 구성원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는 노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땅히 이주민들도 자신이 새롭게 둥지를 튼 사회에 적극적으로 통합될 노력을 기울이고 기존의 사회 구성원들 역시 이들을 포용하여 이주민들이 정당한 납세자의 위치로 올라서 동등한 세금 납부와 더불어 책임감을 갖추게 하는데 조언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4장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보다 ‘분별력 있는 세계화’에 노력하지 않고 “엘리트들이 평범한 이의 두려움을 외면하며 심지어 깔보는 듯한 태도를 반복해 왔다”는 것은 어떤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데이비트 굿하트는 자신이 설명한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관계에서 섬웨어가 애니웨어가 되기란 어려울 것이라 예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너희들도 노력해서 엘리트가 되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사회 전반적인 상황에서 애니웨어와 섬웨어가 투입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시점에 개인의 노력 만으로 전통주의적 계층 이동을 바랄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온건한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 모색으로 그 길을 찾아보고자 하고 있는데요. 과연 포퓰리즘이 온건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꽤 부정적입니다. 시민 모두가 적절한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물론 당연하겠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객관적인 분별력을 발휘하기란 매번 어려운 법입니다.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속한 주의 시민들이 지난 대선에 어떠한 선택을 했고, 나가서 총들고 싸우라는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서의 과격한 발언에 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우리도 이미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 내의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갈등의 첨예화는 유럽의 경우 난민 문제와 유럽 통합 등과 같은 다른 문제로 수면 아래에 불안하게 나마 잠겨 있지만, 이것을 언제까지나 극우 포퓰리즘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가 분명 2008년의 실패를 안고서도 어떤 시각과 행동의 변화를 찾지 않는다면 기존의 민주주의적 질서와 완만한 사회 구조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도 있을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돈을 더 줄 것 같은 사람”에게 투표를 해왔고, 그처럼 각자의 이익에 기반한 참정권의 권리를 행사해 왔습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이상에 부합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에게 꽤 강하고 절박한 변화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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