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생각 - 정의에서 민주주의까지
애덤 스위프트 지음, 김비환 옮김 / 개마고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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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의 정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애덤 스위프트는 현재 옥스포대학에서 주로 정치학에서의 현대 정치이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진보적 평등주의자로서 그가 살고 있는 영국 내에서 꽤 많은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4부 공동체 및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평은 제법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일반적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자유주의 담론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이 글의 4부는 저에게 있어 스스로 생각에 잠기게 할만큼 흥미로웠는데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양자를 비교한 정치학자는 아마 없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06년에 원제 ‘Political Philosoph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번역을 담당한 김비환 교수와 출판을 맡은 개마고원은 이러한 책을 펴낼 수 밖에 없는 조합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스티브 스미스는 정치철학이 정치적 삶에서 가장 심오하고 다루기 힘든 영속적인 문제들을 연구해 왔다는 언급을 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인 애덤 스위프트 역시 3부에서 광범위하면서도 분명한 정치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한 갈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러한 자유, 평등, 공동체,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특히) 정치인들과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 서두에서 언급하고, 또한 정치가 혼란스런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 평생 연구해 온 정치철학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도 간접적이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철학이 집중해야 하는 원천적인 것에는 “국가와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정치라는 것 배후에 있는 도덕적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이 과제일텐데, 문제는 현대의 정치의 내부에 과연 도덕적인 개념들이라는 것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저 개인적으로는 의문입니다. 제가 근래 자주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도 “현재에 정치와 자본주의에는 도덕적 전통과 정의가 사라진지 오래”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정의에는 아무래도 필연적으로 논란이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먼저 2부 자유에서는 이사야 벌린이 주창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가 종래에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으로부터의 자유’와 ‘~할 자유’라는 구분이 벌린의 자유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스위프트는 비판합니다. 특히 그는 적극적 자유가 전체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너무 구분적으로만 취급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실질적 자유와 형식적 자유,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서의 자유, 정치참여로서의 자유 및 정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자유 등으로 세밀히 구분해 자유의 정치철학적 문제를 분석합니다. 여기에는 일부 자유의 방편으로서의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 자유 개념’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이사야 벌린의 우려와는 상반된 이상적 태도로 저자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실질적 자유는 법으로서의 제약이나 제한된 자원에 기반한 자유가 아닌 실질적인 부분에 기반하고 있고 이것은 아마도 복잡한 정치철학적 개념에 앞선 일반적인 ‘인식론적인 자유’에 대한 이론으로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다음 3부인 평등에서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언급하면서 저자 역시 후자인 결과의 평등의 맹목적 선호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로지 일원화 된 결과의 평등에는 저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의사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맡는 것에는 그만큼 위험성과 고차원적인 책임감이 뒤따르며 이러한 일을 하는데 추동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적절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의사와 같은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문제는 이들이 직업에 준하는 그 이상의 권위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사실상의 원인입니다. 의사의 소명의식과 책임감은 분명 중요하지만 과도한 사회적 권력 관계에 따른 직간접적인 이득은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과거 공리주의적 관념에 따라 해석되어온 기회의 균등과 평등 역시 현재의 시점에서는 각 개인들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집합적인 공동선을 위한 기계적인 절차와 정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모의 자식들이 교육과 진로의 상황에서 자원의 이득을 받을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 자본주의적 노선하에 있는 현재의 민주적 공동체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기회의 균등을 현실에서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선택과 삶의 방향성이라는 잣대로 수동적인 균등의 조항을 사회 전체에 주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하이에크는 “사회 정의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콜린 크라우치 역시도 “신자유주의자들은 타인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밝힌 바와 같이 이론적인 것을 넘어 교조적인 수준에 이른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평등의 요구에 병적인 경계심을 갖고 있는데에는 자신들의 자유와 더불어 강제적으로 ‘어떠한 개입없는 시장 자유’를 위해 타인들의 자유까지 인질로 삼기까지 합니다. 저자가 글에 언급하듯이 수많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입에 ‘평등’이라는 단어를 공식석상에서 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정치적 언행에 따른 논법이라는 걸 차치하더라도 그 내면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는 시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거의 명백한 것이죠. 덧붙여, “이사야 벌린이 완강히 거부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제시해 줄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그런 방법에 따라 살도록 갖에하는 교의들이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뒤이어 4부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대 공동제주의라는 비교적 분석으로 양자간의 오해와 한계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에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에 가해지는 7가지 반론을 소개하고 각각의 항목에 대한 분석과 기존에 가해졌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오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각각에 해당하는 저자의 비판적 논법들이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만 기존에 있어서 공동체주의가 자유주의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있었다는 측면의 인식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집합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걸 넘어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를 대결론으로 삼아 자유주의 자체를 제일선이라 주장했던 이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정치적 참여에 따른 적극적 자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과연 ‘타인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인 애덤 스위프트는 이와 관련해서 자유주의자들이 기본적인 공동선 개념을 인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자유가 타인의 권리와 의무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중립적 자유주의자들이 개인의 자율성과 각 개인의 삶의 선택과 영위에 대한 주의로서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의 수적 범위와 영향력은 매우 협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의 전세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여기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보수 우익의 정치인들 그리고 ‘부자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부유층의 결합은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약간의 첨언으로 마이클 왈저와 로버트 달로 비롯되는 공동체적 다원주의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다소 순진하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론격으로 각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해에 왔는데요. 오늘날 극우 및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에 있어 다원주의는 매우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고 있고 정치 문화적인 측면에서 시민들이 분리되고 단순 객체화되는 현상은 각자가 다원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다원성의 회복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 고통이 따르는 것으로 시민들의 노력이 분명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4부 거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에 있어 재화의 사회적 의미에 따라 그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논법이 큰 반향을 얻고 있습니다. 로널드 드워킨은 부유층에게 강제로 돈을 걷어 하위층의 삶의 개선에 투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옳은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하위계층의 삶의 개선이 부유층에게도 이익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드워킨의 논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바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재화의 사회적 의미에 따른 분배’는 도덕적 이상주의적 접근을 넘어 현실적으로 그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과도하고 비도덕적인 경제적 불평등 상황은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에서도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5부 역시 시민의 정치 참여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던 국민국가주의에서 이들은 우리 국민이고 저들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으나, 저들은 그러한 권리를 박탈해야한다는 논리들이 먼저 해소되어야 할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가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좀 더 안전하고 복리에 따른 삶을 영위하고자 각자가 사회 계약에 근거한 사회를 만들었다면 법에 기초한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적 망상으로 치부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각각의 시민들이 ‘각자도생’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각자의 관심과 의무가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립적 자유를 운운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서로를 배려하는 시민이 부재한 도식적인 국가의 역할론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1. 글의 125페이지에 있던 ‘비이적’이라는 단어는 아마도 ‘비의적’이라는 단어로 수정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득 오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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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19-12-17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게 기실 공공영역의 시장화를 포장한 경우가 많지요.
도덕/비도덕의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같은...

베터라이프 2019-12-17 23:45   좋아요 0 | URL
저도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약간 첨언을 드리자면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확실히 민주주의 및 민주체제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정치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실상의 과두제를 그들은 염두해 있고, 각국의 부유층이 자원을 들여 구축하는 자신들의 권리 보호 증진이 실상은 이런 맥락이 아닌가 의심해보게 됩니다. 예전에 태국에서는 변호사들을 비롯 의사들과 각종 전문직들이 지방 농민들에게 투표권을 철폐하라는 시위를 벌인적이 있습니다. 이건 개번 매코맥의 진술이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하여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자들이 많다는 건 분명해보입니다. 이유가 어떻든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