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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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영국에서 타계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에게는 세계의 불의와 부정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목소리를 냈던 위대한 지식인이자 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에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바우만의 여러 글이 번역되어 슬라보예 지젝과 더불어 ‘어떤 현상’으로까지 비춰지게 되는데요. 여기에는 특유의 무엇과도 타협할지 모르는 정신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겁니다. 그런 그의 학문적 맥락과도 맞닿아 있는 이 책은 지난 2013년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의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거의 같은 해에 번역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매한 판본은 선집판으로 표시되는 2019년 판인데요. 저자인 바우만과 제목으로 비추어 보아 꽤 판매가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초판에서 약간의 번역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그 점을 제외한다면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받는 이유가 독자 입장에서는 현 시대를 반영하는 척도이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척 콜린스의 “왜 세계는 불평등한가”에서도 자세한 지표로 소개되어 있듯이 오늘날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 지수는 매우 심각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바우만의 언급대로 “소득의 최상위층과 그 나머지 계층의 차이”라고 해석해도 될만큼 이 심각한 차이는 계속 누적되어 왔습니다. 또한,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많은 기업의 수장들이 대규모 인원 감축을 자신의 성과로 여겨왔으며, 그로인한 퇴직금 보너스 경쟁은 파리드 자카리아가 비난한 ‘거대한 도덕적 해이’와도 일치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여기에는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수많은 중산층이 프레카리아트화 되었다는 것도 언급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세계화 이행을 보며 바우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소수의 부가 과연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는가?” 라는 뼈아픈 진실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우만은 이 글 3장에서 우리가 왜 광범위한 기제로서 ‘경제적 불평등과 이를 고착화 시키는 맹목적 현실 이론들과 인간 경험의 결과물들”을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소위 인간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존재 의의로 해석 되는데에는 시장은 인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시장 안에서 경제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존재 의의는 마찬가지로 부정당할 수 없다는 검증과 검토가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우만은 경제학과 시장은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초에 주어지거나 운명으로 여기는 것에 학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제와 시장의 신격화는 우리가 현재의 불평등을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과거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이 전에는 “일상적인 노역과 부역이 조금만 늘어나도 ‘관습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농민 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다”고 그는 지난 역사로서 뒤돌아 봅니다. 사실상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권력이 자리할 수 없다는 종래의 계몽주의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될 권리와 인권으로 결국 억압에서 해방으로 나타났듯이, 바우만은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우리의 자포자기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더욱이 GNP 열거되는 경제성장주의에 대한 사회국가적 맹목과 이러한 궤도 안에 한웅큼이라도 뭔가 ‘경제적 덤’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일반적인 이상과 현실의 차이보다도 더 냉엄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음에도 우리는 그저 마냥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앞선 저 부분과 관련해 일종의 ‘갇혀있는 이중구조’라고 생각합니다. 금융 자본주의의 발전 상황에서 증권화를 비롯한 고도화 된 금융기법이 가만히 숨만 쉬어도 초단위로 가진 부가 증대하는 소수의 부유층들이 그 본질로서 오로지 ‘자신의 보호와 이익 보전’에만 힘쓰고, 이러한 시스템이 뭔가 잘못된 것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배타적인 이익추구가 결국 공익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 뜻모를 믿음과 자본주의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마찬가지로 그 혜택이 사회 전반에 도달할 것이라는 종교인과 같은 믿음 말이죠. 이 두 가지의 구조가 결과적으로는 그 나머지 다수의 시민들을 고통에 이르게 했으며, “이러한 기존의 부자들이 ‘실물 경제’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는 것”과 “개인의 재능과 능력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였다”는 바우만의 말은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구조 가운데서 자본주의와 새로 이식된 ‘소비 지상주의’는 전통적인 도덕적 관념에서 개인과 개인들의 유대나 이해에 반하는 ‘개인적 나르시시즘’에 더 몰두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소비를 하는 자들은 행복하고 소비를 못하는 자들은 더 불행하게 만드는 단순한 괴리 현상으로 여길 수 없을만한 폐해를 낳았습니다. 즉, 이러한 소비를 배경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개인의 이기심’이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바우만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분을 담은 글도 일찍이 출판 되기까지 했습니다.

결론과 함께, 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정의로 가는 열쇠’로서 우리가 필히 수행해야 될 ‘인간 친화적이고 협력적인 공생’이라는 주제로 여러 방안들을 그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잠깐 요약해 본다면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가 그동안 전혀 ‘검토나 의혹이 없는 앞선 수많은 암묵적 전제들’을 스스로 나서서 검증해 나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우만은 글의 2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고 언급했습니다. 우리의 이상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이 높으면 높을 수록 이것을 현실로 체념하게 된다는 그의 조언은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숙제를 남기고 간 바우만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바우만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그가 말했던 ‘우리가 서로 손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우리의 선택이 진정 중요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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