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고쳐쓰기 -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괜찮은 자본주의로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 지음, 홍기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독일 뿐만 아니라 세계 사민주의의 입장에서 많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의 기획으로 세바스티안 둘리엔, 한스외르그 헤어, 크리스티안 켈러만 이 세 명의 저자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위기와 이를 넘어서 ‘괜찮은 자본주의라’는 모토로 꽤 놀랄만한 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번역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인 홍기빈 소장이 맡았고, 한겨레출판에서 책의 출판을 책임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여기 글의 중점적인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 통제의 철저한 우위”라고 저자들은 밝히고 있는데요. 이미 케인스가 상세한 자료와 입증할 만한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성을 담보할 수는 없고, 단지 우리는 모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특히 시장 경제에 있어서 도사리고 있는 많은 리스크들과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더이상 시장이 우리에게 인간의 불합리성을 대체해 주리라는 것은 이미 허구임에 밝혀졌는데요. 즉, 공공의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는 시장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각 국가의 주권의 권리라 여겨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는 시장의 점진적인 실패로 말미암아 벌어지고 있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재현이 얼마나 위험한 단초인지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주의깊게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1부는 2차대전 이후 1970년대를 거쳐 시장 자유주의가 다시 발흥되면서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로 비롯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대해 평가하고 그것의 주된 기반이 되었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스베르너 진의 ‘카지노 자본주의’가 훌륭한 참고 자료가 될텐데요. 금융 시장에서 금융인들의 정보 제한과 시장 참여자의 합리성을 무기삼아 이에 언론인들과 정치인, 사상가들이 여기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해, ‘부채의 무분별한 증권화’로 비롯되는 수많은 금융 기법 등이 시장을 어떠한 식으로 붕괴시켰는가는 지난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로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에도 글래스-스티걸 법이 무력화 되면서 금융계에 대한 규제가 철폐되고 2001년 이후 금융 시장이 자본주의에 있어서 새로운 성장 원동력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파급이 더욱 가중된 것인데요. 이는 자유 시장 논리에 입각한 무분별한 규제 완화가 어떠한 결과를 일으켰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 2007년 이후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관련된 미국의 손실이 IMF 추산 5000억~6000억달러로 집계된 바 있습니다. 거의 대규모 카지노적인 도덕적 해이이며, 시장이 만능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 결과입니다.

뿐만 아니라, 레이건 시대 이후 “주요 보수파 정치인들에게 노동 조합의 세력화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 따위는 이들에게 눈엣가시였다”는 설명과 나날이 그 격차가 심각해지는 소득 불평등이 미국의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복지를 시장경제의 크나큰 해악이라는 날조를 유포시킨 이들 보수층의 행동이 오늘날의 사회 안정망의 붕괴와 빈부 격차를 크게 악화시킨 일종의 이념적 프로파간다의 폐해라는 분석이 옳은 이유인데요. 저는 이러한 미국의 사례로 그렇게 막대한 사회이념적이고 정치권의 백지 수표 지원을 받은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미국 국민들의 기대를 산산이 저버리고 막대한 쌍둥이 적자국이로 전락시켰는지 명확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의 저자들도 앞으로 통제권을 사회로 갖고 오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이 점과 관련하여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3국의 사례와 금융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한 지난 중국 정부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가 바탕이 된 독일과 중국, 일본 등의 막대한 흑자국들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렇게 미국의 만연된 적자 기조에 기대어 다른 국가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겁니다.

이에 2부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좀 더 괜찮은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 공공 부분의 정부나 시민들이 인지해야만 하는 사항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뉴질랜드나 미국 등을 통해 공공 부문의 시장화의 실패에 대해 다시 공공부문을 세우고, “만사를 시장에 맡겨놓기만 한다면 공공재의 공급은 불출분해진다”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에 대해서는 특히 최저 임금은 평균 임금의 상승에 맞추어 조정되어야 하며, 더 싼 노동력을 위해 이동하는 대규모 자본들과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평균 이하의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일종의 노동에 대한 시장주의적 관점이라 볼 수 있지만 이것을 개선하기 위한 임금 부조와 같은 장치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최저 임금제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시장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은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전 지구적 금융 자본에 대해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며 새판을 다시 짜는 것과 마찬가지의 여러 방책을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미 금융권에 대한 자기 자본 비율에 대한 사항과 여러 개선 사항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자본 잠식과 같은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고 금융 시장에서 도덕적 해이가 벌어지게 되는 무차별적인 이익 추구에 대한 한계 설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국제적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가 과연 실효성이 있을지는 좀 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자본을 가짐으로써 자본 이익을 얻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들에 대한 실질적인 과세를 부여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일전에 미국 당국은 스위스의 UBS에 압력을 넣어 미국인들에 대한 계좌 정보를 건네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단들이 좀 더 면밀하게 고안된다면 그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직도 산업 발전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많은 국가들과 탄소 배출권과 관련된 이견, 앞으로 녹색 성장과 같은 환경친화적인 수단의 마련은 시급하고 중국으로 뒤이어 인도와 같은 거대 인구 국가들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요.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있는 국가들과 후발국 들 간의 전반적인 조정과 타협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경제학자들도 환경과 상생 발전 가능한 이론을 고안해 내는데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끝으로 우리의 경제학은 여전히 스미스의 그늘하에 있다고 무방한데요. 신고전파로 불리우는 주류 경제학이 아직도 인간의 이기심과 사적 이익 추구에 많은 손을 들어주고 있고 정부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은 학자들이 더 많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낙수 이론은 이미 허구임에 드러났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선하는 것만이 파국을 막는 길임을 인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의 저자들도 인정한 우리의 자본주의를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다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아마 많은 독자들이 수긍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배당 - 기본소득으로 위기의 중산층을 구하다
피터 반스 지음, 하승수 해제, 위대선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뉴스위크와 뉴 리퍼블릭 등에 활발한 경제관련 기고를 해 온 저술가이자 지난 수십년간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 기업가로서 미국 내에 적지 않은 명성을 쌓은 피터 반스의 이 책은 지난 2014년 출간된 ‘With Liberty and Dividends for All’을 국내에 번역 출간한 것입니다. 특이점은 따로 녹색당의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이 해제에 참여했는데요. 그만큼 시민들의 소득에 관련된 이슈와 관련하여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피터 반스는 오늘날 만연된 소득 불평등과 관련하여 창의적인 2가지 의견을 갖고 있는데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소득은 필요하다는 것과 공유재 개념을 이용해 국민 배당을 실시하자는 주장입니다. 자신이 밝히는 기본 소득과 관련하여 현재 일정부분 소득을 올리고 있는 시민들에게 공유재를 비롯한 차후 소득을 지원하는 것이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전제하고, 이와 관련하여 “일을 하지 않는데 돈을 주면 사람이 게을러진다”는 반대 의견에는 위의 주장을 선동으로 판단하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제시된 모든 방안에 적용되므로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며 불평등에 대한 많은 시민들의 근본적인 의식 변화 필요성에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득 불평등과 관련된 각 사회의 갈등에는 자본주의 내의 시장 우선적 관점과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배타적 의견이 전제되어 있어 이것을 시민적 공감대로 확대하여 시민들의 기본권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요한 사항임을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미 사회 갈등이 어느 정도 진행된 사회에서는 각 계층간의 견제와 홀대가 만연되어 있어 이를 먼저 극복하는 것도 우선되어야 할 사항일겁니다.

1880년에 고안된 세계 최초의 사회 보장 보험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주도된 사업입니다. 이는 당시에 나날이 확장 일로에 서있던 사회주의적 조류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요. 저는 이런 피터 반스의 언급을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해야만 하는 그리고 이것이 사회주의적 접근이 아니라는 의미로서의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을 개선하는데 노력하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여겨지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피터 반스가 제시하는 시민들의 기본 소득과 관련된 다른 수단의 언급은 자본주의와 그 시장이 다하지 못하는 것을 일종의 보조적 방법으로 보완하는 것이겠죠. 반스도 시장을 타파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개선하자는 입장을 명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4장과 6장은 매우 중요한데요. 4장의 초과 이윤과 관련된 자본과 노동에 대한 고찰과 “초과 이윤은 전체에 초과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가져온 것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초과 이윤을 바탕으로 6장에서는 미국 알래스카 주에서 현재까지 행하고 있는 ‘공유재인 석유 생산의 이익’을 공공 펀드화 같은 방식으로 알래스카 주의 주민이 각 1주를 부여받아 배당금을 분배하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매년 모든 알래스카 주민에게 1000달러(4인 가족이라면 4000달러)가 넘는 배당금을 지급했으며, 2008년에는 1인당 3269달러를 지급해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그는 소개하는데요.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자원을 공유재로 만들어 그것의 이익 시민들에게 소득이라는 혜택을 보장한 신선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에 이와 같은 것을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관점을 바꿔서 국민 연금이나, 국부 펀드에서 발생되는 이익을 전환해 시민에게 돌려준다거나 직접노동세를 감면해 실질적으로 소득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고민해 볼 여러 조건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국부를 여러 인프라나 공공 지원에 할애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금 발상을 전환해 여러 방안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반스도 8장에서 탄소 배출권과 관련된 사항에서도 상쇄권을 이용해 시민들에게 혜택을 돌릴 수 있다는 의견을 또한 개진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소득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를 복지 제도의 개선과 같은 일방향적인 수단으로 바라봤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우리 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충분한 대체 자원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반스의 제안은 꽤 창의적인 의견과 해석이 뒷받침되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만한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나 싶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담의 오류 - 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예일대학에서 수학하고 MIT. 프린스턴대학, 컬럼비아 대학원 등지에서 강의했던 던컨 폴리는 특히 ‘자본의 이해’라는 글로 경제학에서 큰 명성을 얻었는데요. 그의 책 ‘아담의 오류’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온전히 주류경제학을 따르는 학자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보수적 이론을 추종하지는 않고 이를테면, 정부의 역할이나 개인의 이기심에 대한 재해석이 눈에 띄었습니다. 사실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경제학이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기심의 확대가 인간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관점은 그것의 맹점이 어떠한지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폴리의 이 책은 유사한 방식을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얼마전에 작고한 조반니 아리기에 의해 우리가 통념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던 애덤 스미스의 실체를 알 수 있었는데요. 이 글의 서두에서도 폴리는 애초에 도덕철학자에 가까웠다는 평가부터 후에 명성을 얻게 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특히 스미스와 관련해서는 그가 ‘사적인 부의 축적이 공적인 이익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한 해석으로 ‘현대의 개인주의적 후생 경제학에서는 개인의 후생이 아닌 전체 사회의 후생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관된 논지인데요. 이것은 대표저인 아담 스미스의 오류로 즉, ‘이기적인 행위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공적인 기여로 전환될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됩니다. 개인의 이기심 추구를 기본적인 측면에서 선으로 여기고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사회에 복이 될 것이라는 점은 그의 ‘자유방임주의’와 더불어 오늘날의 상황에는 복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폴리도 이와 관련하여 자유 방임이 아니라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과 같은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관세 부과, 수출 보조금, 저금리 대출을 통해 성공적으로 유치산업을 육성해 왔다’고 언급하며 경제 개발 초기에 있어서 이들 국가들처럼 정부의 개입과 보조금의 활약이 있었고 이것을 스미스의 해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중국도 그러했고 인도 또한 그 길을 밟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어 우리에게도 유명한 데이비드 리카도와 긴밀한 교류를 해온 전업 정치경제학자이자 인구론의 저자인 토머스 로버트 멜서스의 대해 나아가고 있는데요. 그는 당시 인류는 비참함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수학적 필연의 결과로 이어지는 높은 사망률, 특히 높은 영아 사망률로 인해 당시 여성의 피임을 통한 성교가 자연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악’이라는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따랐습니다. 전체적으로 멜서스의 학문적 성향은 음울했다고 봐야하며 인구학적 균형과 빈곤율 문제에 대해 연구를 벌였는데요. 특히 “복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멜서스의 정치경제학적인 접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폴리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멜서스는 선구자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며, 리카도를 비롯한 당대의 경제학자과 때론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엄격한 비판으로 알려져 있는 칼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이른바 ‘혁명의 공포’로 인한 그에 대한 배외적 분위기가 있어왔지만, 과거 냉전 구도 시기에서 학문적 목적에서 조차도 마르크스는 금서가 되어 왔는데요. 여기에서 폴리는 그의 유명한 저작 ‘자본론’을 통해 자본을 만들게 되는 상품과 이윤 그외 토대들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알려진 일반적인 내용들이라 새로운 것은 거의 없지만, 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인 “기독교는 죄와 사후의 삶에 대한 심리적 강박을 주입하면서 사람들을 직접적인 현실적 삶으로부터 괴리시켰다”고 여기는 것은 과거 냉전 시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실마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시민들에게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명백하며 물론 개선할 부분도 분명 있지만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선택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봤을 때 충분히 보장해야 될 부분이라고 봐야겠죠. 다만, 이윤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그의 분석인 ‘자본이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노동이 만들어내는 것인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더욱이 폴리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자들이 이런 상품들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만 한다” 소개에서 실질소득이 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데요. 전체적으로 경제학에 있어서 자본의 구성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오늘날의 상황에 비교해 봐도 크게 떨어지지 않은 이론은 얼마간의 비판에도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효율성 개념과 관련하여 한계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한계주의적 접근의 시각은 심각한 가상적 비약에 기초하고 있고, 한계주의자들은 개인이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균등화되는 한계효용의 비율과 현실 경제의 실제 시장가격을 매우 유사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측면에서 폴리는 비판하고 이러한 한계주의적 관점이 부딪힌 한가지 난점은 “경제가 효용을 극대화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명백하게 분석합니다. 저는 이를 개인의 이기심은 각자가 최대를 누리려고 하며, 이들은 경쟁상태에 있다는 측면에서 이것이 한계 상태에 있는 자원과 관련하여 이를 원활하게 충족시키기란 더없이 어렵다고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초에 이런 한계주의자들의 평면이론적 접근은 적절한 모델이 없다고 봐야하겠죠.

결국 존 레이너드 케인스가 활동하던 시기 이후 고전적인 경제학의 관점이 개선되어졌고, 적절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여긴 그의 주장에 대해 많은 전통 경제학자들이 비판을 가했지만, 거대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사조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에 대한 많은 연구와 분석이 이뤄졌고 현실에서도 적극 그의 이론이 고려되었습니다. 폴리는 그의 여러가지 입장 중에서도 “화폐임금과 화폐 물가의 연속적 하락은 상당한 수준의 실업을 겪고 있는 경제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해결책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개념적으로는 이를 물가론과 결합시켜 화폐 발행에 대한 선택이 필요하고 이러한 매커니즘은 잘 작동할 수 있어야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경기 순환과 관련하여 사회의 실업 문제는 어디서나 심각한 문제일텐데요.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적 기조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시장의 가격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다소 무리해 보인다 하더라도 기업에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를 오로지 시장에 일임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을 너무 과신 하는 것이며 공급과 수요에 대한 일차론적인 입장에 급급해서는 오늘날 복잡한 사회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경제 논리에 입각한 수단들은 엄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전체적인 입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마찬가지로 폴리는 한때 자유주의의 부활과 융성을 부르짖었던 하이에크와 같은 입장은 단지 다른 방식으로 아담 스미스의 오류를 표현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결국엔 이 아담 스미스의 오류를 벗어나는 것에 경제학의 운명이 있지 않은가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거의 결론에서 폴리는 다루고 있는데요. 종내에는 인간이 경제학을 탄력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균형적 발전에 힘을 쏟음으로써 그 역할을 경제학이 해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반니 아리기는 “경제학이 사회에 개입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어느 학문이나 사상에서 마찬가지겠지만 맹신을 하지 않는 것을 제일 가치로 삼아야 하며,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선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결론지어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은 저의 짧은 경제학 지식으로 일독이 오래 걸린 책중에 하나가 되었는데요. 여간 집중하기 어려워서 후에도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경제적 역사와 그 논리에 대해 꽤 명쾌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 슬라보예 지젝 특강
슬라보예 지젝 지음, 민승기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유한 사유, 깊은 통찰력으로 한때 세계 철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슬라보예 지젝이 지난 2012년 경희대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엮은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지젝의 글은 두 번째 리뷰입니다. 약간의 여담이지만 저는 이상하게 지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문득 생각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연이 끝나고 약간의 질의응답을 담은 마지막 4장은 이택광 교수가 사회자를 맡았는데요. 이 교수가 지젝에게 많은 학문적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감히 짐작해 보기도 합니다. 뭐 지젝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전세계에 한두명은 아닐테지만요.

이 책은 전체적으로 10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3장의 주제와 4장의 약간 열린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대한 문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과학 기술의 통제 없는 진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보다 큰틀에서는 각 사회에 변질된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양면성의 형태로 나타날지에 대한 고민과 이에 대한 통찰력있는 지젝의 사례와 전망이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다시피 지젝의 글쓰기 내지는 사상의 전달은 매우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스스로도 달변으로 잘 알려져 있죠.

버틀란드 러셀은 과거에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동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주의주의를 강요하는 동물도 인간이고, 그런 이데올로기를 대의라 지칭하며 삶의 지표로 삼는 개인들도 많지요. 오늘날 전세계 아니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어떤 이데올로기들이 대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현실은 아프리카와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극빈의 모습으로 잘사는 곳과 못사는 곳의 격차가 심각한데요. “자신이 삶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얼마간의 돈을 지갑에서 꺼내어 여러 구호단체에 기부하는 것만으로 심리적 만족과 동시에 현실의 망각을 받아들여 위안을 삼는 것”은 이러한 고착화를 불러 일으켰다고 봐야 할 텐데요. 지젝은 이것을 얄팍한 도덕적 위안이라고 보고 있는데요. 서구의 선진국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많은 개인들이 대량소비를 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한번이라도 통찰과 숙고가 없는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죠. 지젝은 여기 글에서 스타벅스와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며 자신의 입장을 내비치고 있는데요. “이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일련의 체제들이 우리가 숨쉬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일종의 미신이라고 믿겨지는 것 같다”는 말을 지젝은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 말이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익히 알려진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을 통해 민주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승자가 되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보다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좌파들의 끊임없는 비판과 견제, 성실하고 실용적인 목소리가 필요했는데, 그런면에서 좌파는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할텐데요. 지난 그리스의 위기에서 어디에도 좌파가 없었다고 지젝은 평가하며, 그야말로 좌파는 실패했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사실상 기득권층의 후위대라고 봐도 충분한 보수 우파들에 대해서 이런 좌파들의 실패는 결국에는 포퓰리즘까지 머리를 들이밀게 되는 이유가 된게 아닌가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서 어딘가에 기부를 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커피로 인해 착취당하는 산지의 농부들이나 노동자들을 또 도덕적으로 잊게 되는 것은 곳곳에 교묘한 장치들이 있어서 이런 것들은 개인들의 힘만으로는 본질을 찾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은데요. 결국에는 많은 곳에서 진보와 좌파가 생활정치에서 멀어진 것과 생활속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전염성이 높은 자본주의화에 따른 결과가 아닌가 떠올려봅니다.

뒤이어 나오는 4장의 열린 토론에서도 지젝의 놀라울 만한 사고는 이어지는데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 대한 것을 재정립하고 꽤 열린 자세로 질문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해답을 이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이상하게 지젝의 이 책은 고 노회찬 의원이 눈앞에 떠올랐는데요. 그래서 우리의 진보는 더 불행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0-31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3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18-10-3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녀님 비밀댓글로 남기신 것에 저도 비공개로 글을 썼는데요. 혹시 보이지 않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소녀N 2018-10-3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 감사드립니다. 물론 장문의 댓글이 날아간 것은 아쉽지만요^^;; 베터라이프님 글을 읽다보니, 확실히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현위치를 공고히한 데에는 2차세계대전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확신이 드네요.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중국의 높은 성장률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추천해주신 카지노 자본주의는 꼭 한번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

베터라이프 2018-10-31 21:46   좋아요 0 | URL
제가 쓴 댓글을 보니 서평 2탄이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 약간 더 참고로 말씀드리면 브레턴우즈 체제도 현재 달러 지위에 적지않은 공헌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전후체제에 1차대전 종전 이후에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주저했던 반면에 2차대전 이후에는 서유럽의 기반 붕괴로 미국이 나설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었나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루즈벨트는 이미 종전 처리중에 소련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으므로 냉전 시기의 소련 봉쇄가 결과적으로는 자유 진영의 생존을 지켜낸 것만은 분명해보이네요. 미국의 패권에 대한 우수리로 얻은 결과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민주주의 세계를 유지시킨 것만은 다행이리고 생각해요. 물론 CIA의 무수한 검은 공작들이 소위 반미 국가들에게 행해진 그늘도 있지만요 ㅜ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따위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치적 안온주의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소녀님의 질문을 통해 해봅니다.
 
발전에서 살아남기 - 신자유주의를 넘어 대안 사회 건설까지
세르주 라투슈 지음, 이상빈 옮김 / 민음사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프랑스의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이자 경제학자인 이 책의 저자 세르쥬 라투슈는 특히 프랑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유엔과 같은 국제 기구내에서 활발한 여론 활동을 해왔는데요. ‘발전에서 살아남기’ 라는 이 글도 유네스코가 관여해 만들어진 연구물이라고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민음사가 라투슈의 글들을 거의 독점적으로 출간하고 있는데요. 지젝이나 랑시에르의 사례와 같이 유사하게 저작 시리즈물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라투슈는 지난 204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낭비 사회를 넘어서’란 책으로 많은 관심을 이끌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1980년대 이후부터 제한되게 해석한 세계 발전론의 일환으로 ‘신자유주의 사조’가 마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확산되게 이르렀는데요. 헨리 키신저는 꽤 노골적으로 “세계화는 미국의 헤게모니 정치의 새로운 이론에 불과하다”고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된 세계의 북반구와 이와는 다르게 아직도 낙후되어 있는 남반구 사이의 긴장과 이러한 차이에서 발전적 욕구를 갖고 있는 남반구 세계의 현실과 일찍이 허구로 입증된 낙수 효과 이론(trickle-down effect)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과 궁극적으로 환경과 발전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것을 주요한 골자로 하는 내용을 라투슈는 이 책에 담고 있습니다.

꽤 의미있게 봤던 그의 주장들 가운데는 북반구의 선진 국가들이 아직도 경제 발전 이론에 기대어 더욱더 발전을 표명하고 있다는 것과 많은 선진국의 경제 이론가들이 “국민 총생산의 수준과 성장을 인간 사회를 평가하는 최종적 판단으로 간주한다”는 것에 비판을 보이는 것 또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외형상 단순히 낙후되어 보인다는 이유 만으로 폭발적인 생산과 소비가 연계된 것을 주입시키고 실행을 강요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신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왜곡된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많은 인간들이 차별적 수준의 위치해 있고,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국가들이 경제 발전을 잣대로 삼고 있는 것은 일견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적으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 국가들의 국민들의 무분별한 소비 생활이 지구 환경을 병들게 하고 있고, 앞으로 후발주자로 대기하고 있는 13억이 넘는 중국인들이 오늘날 미국인들과 비슷하게 소비하려고 든다면 과연 지구가 이를 견뎌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결국 전세계에 만연된 불평등의 문제는 이처럼 신자유의적 기치로 인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라투슈의 판단은 다른 여지가 없는 것인데요. 불평등의 문제를 경제 발전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그의 판단과 결국에는 어느 정도 복지체제의 확립에 희망을 거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도 크게 수긍할 만합니다. 이미 이 책의 서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3명이 가장 가난한 48개국의 국내 총생산 총액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가장 부유한 15명의 개인 재산은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의 국내 총생산을 넘어선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32명의 재산은 남아시아의 국내 총생산 총액을 넘어서고, 가장 부유한 84명의 재산은 12억 인구를 가진 중국의 국내 총생산을 넘어선다”는 점은 이러한 무차별적인 부의 불평등이 단순이 개인의 능력 문제로 전가하거나 발전 상태의 차별로 비롯되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2008년 뉴욕 금융 위기의 비참한 결말 뿐만 아니라 여느 오페라에서 극적인 장치로 대비되는 비극적 현실과 동일시되는 ‘경제적 불평등의 총체’도 그것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해 보입니다.

중간에 북반구에 의한 남반구 지역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서구 백인들은 발전할 수 밖에 없었고, 남반구의 유색 인종들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아직도 해석하는 서구의 이론가들 내지는 시스템의 존재 문제 또한 이러한 결말을 부채질한 것으로 봐야겠죠. 결국엔 북반구의 선진 국가들이 발전주의를 다소 후퇴시키고, 환경과 발전의 양립과 하등 쓸모도 없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을 제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라투슈는 보고 있는 듯 했습니다. 핵심적으로도 우리의 경제이론가들도 마땅히 환경과 경제의 양립 가능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라투슈의 이 책은 분량이 크게 많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의미있고 통찰력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질을 노려보는 글들은 읽고 나서 적잖은 안도감을 주기도 합니다. 나중에 세르주 라투슈의 다른 글들을 좀 찾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