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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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프랑스 학계를 비롯한 세계 정치사회학 분야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는 자크 랑시에르와 더불어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관한 이해를 독자들에게 비교적 명확히 전달하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최근 글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손에 들었습니다. 발리바르의 이번 글은 몇 가지 시론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민주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입장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외형상 각각 의 주제들이 상이해보이지만 그 속에는 일관된 주제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는 “미국의 독립혁명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인민 주권에 입각해 봉건주의적 현실을 붕괴시키고 시민들의 손으로 공화주의 혁명을 이룩해 낸 전통을 다른 나라는 가져보지 못한 전통을 프랑스는 갖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기초로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의 시민과 정부간의 일종의 계약론을 바탕으로 한 ‘근본적인 공화주의’가 인간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부인할 수 없겠죠. 그것보다도 시민이 부여한 주권을 바탕으로 정당한 권력을 획득한 정부가 어떤 식으로 시민들의 공익에 부합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프랑스주의적 공화에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치 운동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입니다. 발리바르는 과거 이웃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유럽의 악화를 불러일으켰지만, 프랑스는 그러한 부분에서 정치적 전통과 환경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파시즘에 대한 우려는 미약했지만 그것이 결국 현실로 나타난 것에 대해 프랑스의 학자로서 숨길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글에서 묻어나고 있는데요. 근래의 독일에서 발생되는 과거 나치즘에 대한 향수는 젊은 계층들이 현재의 부패와 억압의 상태에서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고, 전반적으로 유럽에 난민과 비유럽계 이민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유럽인들에게 여러 차원의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일겁니다.

그래서 저자는 프랑스 내의 알제리계 시민들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시도하고 오늘날 민족적으로 비 프랑스인들의 이민과 사회내의 계층적 뿌리내림과 관련하여 비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르펜의 국민전선,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식민지 시절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와 알제리의 진지하고 이성적인 성찰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러한 질문은 결국 프랑스 뿐만 유럽의 시민들이 유럽에 유입된 비유럽 시민들의 복합적인 빚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권과 시민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유럽인들이라면 이들에게 마땅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단순히 복지국가라는 평면적 개념보다 ‘국민사회국가’로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통일이 아니며, 인간 집단들 사이의 제도적 매개들의 설립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공간 (우리가 동일한 재화를 소비하고 동일한 세력에 복종하는 공간) 에 대한 매체적 표상을 동반한 가운데 경향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시장위에서 개인들이 서로 순수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독창적인 분석을 내리고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민 불복종’의 개념이 민주주의적 시민권이 대항적 권력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측면에서 파생된 셰계화에 대한 모순과 그로 인한 비이성적이고 파시즘적 사회 분위기에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결국 비타협적 인종주의적으로 해석된 원주민-비원주민 개념을 극복시키고 ‘국민국가’의 한 국민들로써 사회적 시민권이 이미 사회적 국가에서 기본권으로 널리 제도화 되고 있고 따라서 국민들이 지닌 사회적 기본권을 함부로 축소할 수 없다는 공감대를 단순히 이민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권을 축소하거나 제거하겠다는 주장은 시민들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믿고 있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고 이민자들이 단순히 상대적으로 선진화된 사회 시스템에 편입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직간접적으로 그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이민자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그것에 기반한 이론들은 곳곳에 비이성적인 논리 모순과 인종주의적 선입견을 내포하고 있어 이러한 움직임 자체가 과거로 회귀하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정된 자원을 공유해야한다는 다소 억울한 주장을 기존의 시민들이 가질 수도 있으나 어차피 시민의 주권으로 위임받은 정부가 그것을 바탕으로 정당한 행정력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받아들여진다면 마땅히 정부가 자원과 여러 사회적 보장책을 다시 구축하는데 힘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민주주의적 기초를 확대 재생산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마땅한 역할이고 이것에 편견과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히틀러의 나치가 오늘날 곳곳에 발언되는 왜곡된 주의주장들로 600만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것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르펜의 국민전선과 같은 정치적 입장들이 궁극에는 이러한 패착을 다시 가져오지 않을까하는 발리바르의 사심없는 우려에 주권과 공화주의, 그로 인한 시민 민주주의 전체를 다시 통찰해보고 거기에서 해결책을 찾아 보고자 하는 이론적 과정들이 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발리바르의 여러 비판에도 그가 프랑스와 프랑스의 민주주의에 여실히 드러나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모순과 억압으로부터 재구축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끊임없이 있어 왔고,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글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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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수정주의 사고의 프런티어 1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김성혜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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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국내에 출간되어 저역시 인상깊게 읽었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의 저자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의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 비판한 ‘역사/수정주의’를 접했는데요. 이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그 이후의 전후책임에 대한 명백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개 개인으로서도 요즘 일본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죄인의 자식 취급을 받아들이지는 않겠다는 취지로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독일인 에른스트 춘델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는 캐나다에서 머물다 독일에 신병이 인도된 이후로 징역 5년의 구형을 받았고, 아직도 독일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이러한 홀로코스트 부정과 관련해서 양심과 사상의 자유보다 우선해 중형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또 밝히고 있는데요. 예를들어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의 일본의 상황을 비춰보면 이 전후 역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일본 법정은 위안부가 관련된 한국측의 여성 단체에 의한 이의제기에 일본 정부 스스로 법적 책임을 스스로 부인하고 있고, 사법 당국은 고소, 고발장의 접수조차 거부하고 있는 현실은 저같은 일개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오늘날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에 대해 여러 이론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오욕의 기억을 유지하며 그것을 계속 부끄러워하는 일은 그 전쟁이 침략전쟁이었다는 판단에서 귀결되는 모든 책임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전후세대들의 양심이 필요하며, 이런 전후세대들에게는 전후책임을 완수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의 서사적인 기술적 방법으로 각각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이야기적 수사’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다시 말하자는 일종의 일본 전후 역사에 대한 실제적 사실들을 일반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고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꼬집어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인들 자신이 전후에도 끊임없이 주변국 국민들이 말하는 일본의 책임에 대해 이전의 조상들이 벌인 일들에 대해 명확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기억의 되물림’을 통해 후세대들에게도 기억시키게 하는 것으로 사과와 인정 및 기억을 통해야만 이러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들이 종결될 것이라고 다카하시 교수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국민들 사이의 이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 정치권이 더이상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을 국체로 여기는 행위가 근절될 것이라 여기는 듯 한데,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온당한 주장들이지만 실제로 많은 일본 국민들이 한국과 중국의 ‘사과요구’에 어처구니 없게도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고 동아시아 내에 커지고 있는 중국의 세력 확대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 단순히 전후의 역사 문제가 역사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기란 어려운 현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만, 3장에서 짧게 언급되고 있는 ‘도쿄재판’과 관련해서는 당시에 일본 일왕의 책임과 전범들의 죄값이 졸속으로 처리되어 오늘날 독일과 같은 책임의식을 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도쿄 공습과 같은 희생자들을 배경으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적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것은 그것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지만 일본내에서는 이미 거듭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또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자도 이와 관련하여, ‘조선 침략 이래 적어도 70년에 이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귀결이었다는 점에서 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을 지지 않고서는 피폭 피해를 호소해도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한다’고 동일한 취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단순히 역사 수정주의적 역사 개변의 입정 뿐만 아니라 가해자/피해자, 이해/몰이해 등과 같은 양자 모순적인 해석까지 곁들여지고 있는 것이 일본인들은 과거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현재의 표면화된 ‘번영의 일본’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동아공영과 태평양 전쟁으로 희생된 2천만의 아시아인들 중의 한 가지로서 이러한 이웃을 두고 ‘교린’이라는 것을 입에 담아야 한다니 저로서도 이런 인식의 결과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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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위기 - 국제관계연구 입문
E. H. 카 지음, 김태현 옮김 / 녹문당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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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나라 출판계에 수많은 판본으로 무수히 출간된 ‘역사란 무엇인가’의 E.H. 카의 초창기 국제정치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20년의 위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하는 망설임과 함께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 ‘20년의 위기’는 녹문당에서 2017년에 국내에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 다만 제 먼 기억으로는 1990년대 헌책방에서 이 20년의 위기를 우연히 접했던 것 같습니다. 상성당과 현대 판본으로 기억이 나기도 하는데요. 당시에 일본 판본을 판권없이 무단 번역 출판하는 것이 뭐 일종의 관례였으니 그런것과 아예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여튼 저는 일찍이 일본 번역판이라도 접해볼 기회가 있었으나 당시에는 이 책에 별 관심이 없어 늦게나마 이렇게 이 곳을 통해 리뷰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입은 제법 되었는데요. 대략 3분의 1 정도 먼저 읽고 중간에 다른 일로 덮었다가 토요일 하루 아예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을 했습니다. 오늘날 국제정치학 분야를 본격적으로 학문 문대에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한스 모겐소 역시 그의 여러 글에서 이 ‘20년의 위기’를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국제정치라는 속성과 분석을 그 시대상과 연계해 제법 훌륭히 접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의 포로들’에서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당시 만연된 정치적 이상주의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는데요. 여기 카의 언급대로 아마도 19세기의 놀라운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제 1,2차 양대전의 원인이 아니었나 저 개인적으로는 추측해보는데요. 거기에다 2차대전은 1차대전 당시의 결과로 학습한 무참한 살육 전쟁에 대한 공포, 영국의 체임벌린 등과 같은 당시 서유럽의 정치인들이 히틀러의 장담을 너무 순진하게 믿은 탓일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을 수도 있겠죠.

바로 그러한 대전의 원인처럼 현실 국제 정치에서 이상주의적 태도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해 아주 완벽한 현실주의적 해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양 측면의 비교 분석과 그것을 통해 좀 더 현실의 부합되는 면밀한 결과를 도출시키고 있습니다. 즉, 국제 정치가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과 항상 강대국의 정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합리적이라는 이상주의가 현실의 국제 정치와는 맞지 않는 것이고, 절대적 기준을 수립하는 일에 아무리 열심인 이상주의자라도 자국의 정부가 세계의 이익을 자국의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카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4장과 5장, 6장은 앞서 설명드린 대로 이상주의의 대척점인 현실주의도 몇가지 결점을 갖고 있는데, 국제 정치 무대의 각각의 개별적 주체들의 이익이 서로 일종의 ‘이익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이익 조화라는 사상은 특권 집단들이 그들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장하는 탁월한 도덕적 장치인데, 이처럼 국제 정치 자체에서 도덕적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그 원칙적 입장을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며 이른바 허울 좋은 명분으로써, 강대국들에 의해 적절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정치가들이 인정하듯 국내외 문제를 막론하고 특정한 이익에 대해 도덕적 원칙의 옷을 입힐 필요가 있는데 그러한 필요성이야 말로 현실주의가 실제로 맞지 않는다는 증거일 겁니다. 즉 오늘날 미국이 세계에 대한 자국의 패권 정당성을 민주주의 체제의 확대로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강대국의 이익에는 적당한 도덕적 이상이 덧대어져 있고 이 자체로만 봤을 때는 현실주의적 이론이 부정되는 상황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이 책의 3부인 7장과 8장 및 9장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정치와 권력, 그리고 도덕에 대해 이론적으로 열거하며 이것을 국제 정치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데요. 정치와 권력은 서로 밀접하고 권력을 도덕과 조화시키거나 정치현실에서 권력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카는 언급하고 역시 이 딜레마를 완벽히 해소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4부인 법과 변경에서 국제 정치에서의 법의 역할로 다소 나마 질서와 규칙을 세울 수 있을지 않을까 싶은데요. 국가간의 조약이나 협정 혹은 국제 협약의 형태의 그러한 법적인 문제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민족은 마땅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이유가 있으면 조약을 엄숙히 공식적으로 폐기할 권리를 당연히 보유한다”고 천명했지만 이것 역시 모든 나라의 권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등 조약이나 강박에 의한 조약들 역시 거부할 수 있는 도덕적 권한을 인정하는 경향도 있다고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매우 상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강제 합병 조약을 스스로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그 기본적 이론들과 현실적 상황과 이해는 매우 입장이 상이하므로 이것을 최대한 교차점을 찾거나 하는 것은 명백한 딜레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국제 정치 현실과 점목시켜 본다면, 일정 수준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수반되는 국가들만이 자신들의 이익을 그나마 주장이라도 할 수 있고, 이상주의나 현실주의 어느 한쪽의 이론으로만 국제 정치 전반을 해석하거나 평가할 수 없으며, 이러한 일종의 국제 정치적 무정부 상태를 다소 완화시키기 위해 법과 규칙의 원칙이 필요하지만 그것 또한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 사실상 결론일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국제 정치학에서 말하는 많은 이론들이 이러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국력의 차이에서 오는 각각의 행위자들의 배경을 무시하기 어렵고 그러한 힘의 논리를 비도적적이라고 매도할 수 없는 것이 베르사유체제의 시기부터 오늘날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측면이 항상 올바른 사회의 일면을 답보하는 것이 아닌것 만큼 국제 정치에서 힘의 논리에 기반한 인식과 그러한 배타적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강대국의 행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란 어렵습니다. 세계 정치에서 법의 지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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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 생각한다 -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
박한식.강국진 지음 / 부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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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태어나 해방시기에 평양에 있다가 분단이 시작된 1945년 이후에 남한으로 내려와 학업을 마치고 도미, 미국 조지아대에서 2015년까지 국제관계학을 가르친 박한식 전 교수의 북한문제와 남북통일에 관한 글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한국 경제 4대 마약을 끊어라’와 유사한 인터뷰 집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서울신문 강국진 기자가 논의할 주제에 대한 질문자로 참여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예상치 못한 정보를 접하기도 했는데요. 박한식 교수는 과거 김일성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만남에 중재를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 평양을 중재한 카터 전 대통령을 박한식 교수가 중재한 셈이 되었네요. 카터는 박교수에게 통역으로 참여해 달라 요청했는데 그것은 거절했다고 뒤이어 밝히고 있습니다.

다 읽고나서 드는 느낌은 “돈 많고 능력 있고, 잘생긴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맞다.” 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배려있는 에티켓성 금언이 생각났습니다. 북한과 북한 사람들에 대한 글쓴이의 온정과 온건의 마음이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는데요. 혜안이 느껴지는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또한 다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한국과 한국민이 북한과 평양 정권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것이 정치적으로 혹은 여론의 복잡한 입장에서 본질이 왜곡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한 목적이 있어 보였습니다. 우리가 한민족이라는 동질성과 현재 분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앞으로 통일에 대한 필요성 등을 꽤 설득력 있게 저자는 쓰고 있는데요. 북한도 자주 왕래했고, 미국 정치권에 북한에 대한 여러 조언을 했던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은 생생한 현장 경험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북한이라는 의미는 사람마다 느껴지는 것이 다르고 더욱이 한국 전쟁의 경험 때문에 다소 부정적인 기류도 있습니다. 최근의 핵문제는 말할것도 없고요. 그리고 북한을 한 국가로서 마땅히 인정되는 정권이 해당 주민들을 통치하고 있다고 전제해 받아들이면, 북한의 정권이 그다지 이성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측면은 과거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마 폭탄 테러라든지, 대한항공 여객기 폭발 사건이라든지 문득 머리속에 떠오른 것만 해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관련 여부가 명시적으로 드러난게 없다고 해서 장성택을 비롯한 고위층의 숙청과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을 살해한 배후가 북한 혹은 김정은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숙청은 정치투쟁이 연계되어 발생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정의 내리고 있는데, 그것이 정상 국가라면 반대 세력의 정치인이거나 권력의 걸림돌이라고 여긴다면 아마도 법의 테두리 안의 수단에서 찾아볼 것입니다. 즉각적인 인명 탈취의 방법은 사용하지 않겠죠. 악으로 규범짓고 비도덕적인 잣대로 상대방을 해석하는 것은 물론 옳지 못한 일이겠죠. 그렇지만 북한의 사례는 과거의 명백한 증거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찌됐든 오해의 측면이 있다고 다시 재해석하고 전환시키는 것은 최근의 핵과 미사일 문제 등으로 불안을 느꼈던 한국인들이 발상의 전환을 하기에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자가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친분이 있어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한 정권의 권력 속성과 집단 지도체제 및 근간의 주체사상에 대한 연원에 대해 설명을 하긴 했습니다만 북한 인권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북한 정권이 다수의 정치범 수용소와 인간의 기본권과 여러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상황이며, 사유재산 체제가 거의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몇년간 기근으로 30만명이 넘는 아사자가 나온것은 명백하게 북한 정권의 반절 넘는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한 건데, 그런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미국과 남한의 경제적 봉쇄와 같은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 것도 있다고 밝히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인권 문제는 어떠한 식으로든 옹호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죠. 다만 저도 김정은을 단순히 미치광이로 몰아가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차후 북한이 붕괴한다면 독일이 아니라 시리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도 지극히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북한의 핵문제는 클린턴과 김일성 간의 정상회담 이후 엘 고어 부통령이 차기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해결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더욱더 설득에 나서 제네바 합의를 조금 손보는 차원에서 북미 대화를 권유하거나, 최근의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과의 4+1 합의처럼 이란 핵위기와 유사하게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회는 몇 차례가 있었는데, 국제 정치와 외교의 속성상 어떻게 보면 이론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것이겠죠.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제가 적잖은 비판을 한 것 같은데요. 이 점을 제외하더라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북 퍼주기 논란’과 관련된 실제 지원 방법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북한과 중국간의 관계에 대한 근원과 두 나라의 공감대와 동류의식 등’을 다루고 있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이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통일과 관련해서는 경제적 리스크가 분명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니 지금의 위기를 잘 관리하여 좀 더 뒷세대에 통일 과제를 유산으로 넘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분단 상태의 기간이 적지않게 흘러가서 민족의 동질성까지 해치지 않게 될까 우려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북중 관계라든지 주한 미군의 존재 여부 등 단순히 통일을 통해 얻게되는 심리적 만족감 보다는 주변의 제반사항이 우리 한국 정부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길게 보고 생각해야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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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행동의 논리 : 공공재와 집단이론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07
멘슈어 올슨 지음, 최광.이성규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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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8년 심장질환으로 작고한 멘슈어 올슨 교수의 이 ‘집단행동의 논리’라는 글은 사회과학 전반, 특히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 등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로부터 빈번하게 인용이 되었는데요. 공공재와 집단이론이라는 부제와 함께 당시 꽤 신선한 이론이었던 ‘집합재’와 그와 관련된 창조적 해석으로 찬탄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오늘날 ‘특수이익 집단’과 기득권자들에 관한 일종의 이론적 해답을 찾고자 이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범위를 한정지어 ‘인간의 이기심’과 관련하여 개인들은 각각 이기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오래전부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개개인의 이러한 사익추구를 위한 행동 때문에 마찬가지로 집단도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하는 약간의 묵시적인 가정에 근거하는 한, 널리 퍼져있는 견해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요. 즉, 달리 말하면 사익 추구를 전제하는 개개인들이 모여 이룬 각 집단들이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익추구화의 목적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이익이나 집단이익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전제로 소규모 집단과 나아가서는 대규모 집단의 각기 다른 여러 특성들을 많은 이론과 근거를 통해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어쩌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에서 크게 대표적으로 주장하는 개인이 합리적일지라도 이런 개인들이 모인 군중은 그렇지 않다는 논의는 비슷하게 연계되어 해석되는 부분이겠죠. 물론 양자의 표면상의 연계 유사성만을 놓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슨 교수가 지적하는 집합재는 일종의 개인 이익과 공동 이익 및 혜택이 융합된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사익화의 개인들이 모인 이러한 집단에서의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집합재 공급에 드는 모든 비용을 지불해 주기를 바라며, 대체로 자신들은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거나 전혀 부담하지 않더라도 집합재가 제공되는 혜택만 받으려고 한다는 일종의 ‘무임승차론’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무임승차는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집합재와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많은 학자들로부터 이 ‘무임승차’와 관련된 용어 자체와 해석 등이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 안에는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며, 정치적 담합과 같은 정치행위도 보여지는데, 정치적 담합은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업의 과점 추구 욕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집단의 규모로 구분되는 소규모 집단과 대규모 집단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르며, 대규모 집단의 존재는 소규모 집단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올슨 교수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노동 조합과 같은 대규모 집단과 관련된 부분은 미국의 노동 조합을 예를 들어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노동 조합의 소속된 노동자들이 궁극적으로는 ‘고용의 통제’를 목표로 두고 있고, 이러한 과정이 ‘고통의 통제’라고 부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더군요. 그러니까 노동 조합의 대의적인 측면의 주장이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이익의 통제라는 측면에서 ‘고용의 통제’를 효과적으로 발현시키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다고 밝히는 것이겠죠. 그리고 본질적으로 비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특수 이익 집단과 기득권층에 관련해서는 다수결 원리에 기초를 둔 민주정치에서 정치적 힘이 유산계급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 왜 자연스러우며 필연적일까라는 질문과 함께 산업적인 측면에서 과점적 규모의 형태와 그러한 산업 집단에 힘이 쏠려 있어 어쩌면 의사협회와 같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게 그러한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이는 과거 부패 혐의로 물러났던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 사태 때 태국의 의사와 변호사 등의 기득권들이 농촌의 농부와 저소득층에게 투표권을 제한하라는 주장을 한 사례와 유사합니다.

끝으로 최종적인 논의의 확장이었던 압력 단체와 관련된 다원주의적 이론의 뒷받침과 해석이 다소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로비 단체에 의한 금권 정치는 다수의 공동 이익을 해치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궁극적으로는 민주 정치의 의도하지 않은 훼손이라 판단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로비 단체를 뒤에 업은 정치가들의 정치적 담합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과점의 효과와 다름없다는 올슨 교수의 해석은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익 추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대의적인 측면에서의 민주주의적인 여러 가치의 함양과 주장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의 사익 추구의 측면을 고려해 봤을때, 정부가 자경 기능에 국한되지 말고 법과 제도를 명확하게 세워 이러한 사익 추구를 적절하게 규제해야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차피 애덤스와 같은 부류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그 한계가 드러났고 무턱대고 정부의 역할을 줄여나가자고 하거나 시장에게 맡기자는 주장은 가려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슨 교수가 국가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원천이 많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고 언급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매우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저자의 주장들과 깔끔한 번역은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주는데요. 역자가 소개한대로 올슨 교수의 이 책은 20세기 통틀어 매우 중요한 저작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조만간 한번 더 정독을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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