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 - 중동 분쟁과 미국 대외정책의 위험한 관계
아브람 노엄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사계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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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 지성계에 더이상 어떤 말이 필요없는 노엄 촘스키 MIT 교수와 레바논계 프랑스 지식인으로 반전운동가이자 유럽에서 손꼽히는 중동 정세 전문가인 질베르 아슈카르가 거의 종합적이고 근원적인 측면에서 현재의 중동 문제에 관한 대담집을 지난 2009년 사계절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 주로 촘스키의 글을 맡아 번역했던 강주헌씨가 번역을 맡았죠.

전세계의 화약고라 불리우는 이 중동의 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양상의 원인이 있는데요. 2차대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유대인들의 정착이 이뤄진 이스라엘의 건국과 심각한 내부 갈등 요인을 힘으로 누르고 중동의 맹주라고 자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미국의 묵인 등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주창하는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이 자생하여 왜곡된 정치체제, 종교적 폐쇄성, 외세의 개입, 빈번하게 촉발되는 내전 등이 현재의 중동을 초래한 대체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이에 아슈카르는 테러와 관련된 주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사회 조직과 사회 안정망이 와해된 것”이 신자유주의와 테러사이의 본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판단과 동일합니다. 촘스키는 한술 더 떠서 “미국이 전세계에 어필하고 강조하는 민주주의란 친미적이고 미국에 협조하는 민주주의 체제”라고 밝히며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미국의 정부적 테러”에 의해 공격당했다면서 과거 레이건 행정부가 일으킨 이란-콘트라 사건의 니카라과나 콜롬비아 등과 같은 합법적 선거로 선출된 민주주의 정부를 무너뜨리는데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의 입김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미국이 현재의 중동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지원에 인색한 것은 만약 이들 지역에서 선거를 통한 정부가 탄생한다면 거의 반미 정부가 될 것이므로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 불리우는 미국이 이를 반기지 않는 것은 정말 한편의 희극과 같은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아슈카르는 “워싱턴이 원하는 결과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지만 민주주의란 얼굴을 가진 정부”라고 일침하는데요. 이것을 이념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현재까지 CIA가 그런일을 해왔고 민주주의란 얼굴을 표명하지만 국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국가에 비민주적인 일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촘스키의 또 한가지 통찰력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1970년대 까지도 미국은 국내 소비를 위한 중동의 석유 수입이 필요치 않았지만, 중동의 원유 자원을 장악하고 관리함으로써 서유럽과 일본에 석유를 보냄으로써 이들 서구 국가들에 대한 일종의 경제적 지렛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분석하는데요. 이런 것은 매우 명쾌하다고 생각합니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 전에 뛰어든 것도 바로 이런 연유와 비슷한데요. 즉,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과 영향력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증거를 특히 서유럽과 일본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현재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와 봉쇄에 대해 서유럽과 일본은 말을 잘 듣지만, 중국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아 많은 미국 관리들은 이 때문에 중국을 매우 싫어한다고 촘스키는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관한 부분에서도 얼마전에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존 미어샤이머의 ‘이스라엘 로비’에서와 같은 미국 의회에 대한 유대인 단체들의 로비 공세가 중동 문제를 악화시키는 진정한 요인이 아니라 미국 내에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조직적으로 친유대적인 발언과 지원을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촘스키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미국 내부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이스라엘은 미국의 ‘분국’과 마찬가지로 여기게 만들고, 사실상 중동의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주변의 중동 국가들에게 훌륭한 지렛대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미국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문제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와는 달리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의 문제가 큰 변수로 남아있는데, 이란은 그들의 지리적 위치와 외부 압력으로 인해 매우 당연하게도 핵무기를 개발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고 촘스키는 단언하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이 글의 개정판 후기에서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공격 가능성에 대한 입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체로 이란 공격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매우 찬성하고 있어서 미국의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이러한 요구를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대입해 볼 수 있는 문제겠죠. 물론 촘스키도 이란과 같은 나라는 함부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글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유심히 지켜봐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을 받으면서 핵무기 사용을 심히 고려했다는 것을 끄집어내며, 자국의 안보와 관련된 문제에서 이란도 이스라엘과 같은 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중동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보는 것은 얼마나 순진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와 만나서 시리아의 내전을 통해 IS를 만들었고 친미 국가로 다시 태어난 이라크에서도 심각한 내부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그너머 이란은 더 위험한 국가이고 예맨은 현재 내전에 돌입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대리전을 치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판단해보면 아마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는 이러한 중동의 분열과 혼란을 유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합법적이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안정적인 체제를 지역의 각 국가들을 유도할 수도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일들을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방치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익을 보존하는데만 급급했지 별다른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정의롭고 합법적인 국가가 항상 정의로울 수 없다’는 처칠의 예언과 들어맞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전체적으로 촘스키와 아슈카르의 이 대담집은 중동의 미국 정책에 대한 아포칼립스적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을정도로 중동의 문제는 매우 극명해보입니다. 저는 이들의 문제를 그들의 믿고 있는 이슬람의 문제로 몰고 가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바라고 있고 얼마전의 이집트와 리비아에서는 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어떠한지 잘 드러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딱히 방법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오늘날에 중동이 처한 거의 모든 정치와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남북문제 만으로도 이미 머리가 아프지만 혹여 중동 이슈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탁월한 지식인’ 촘스키 선생의 가차없는 분석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세계에 과거 버틀란드 러셀에 이어 촘스키라는 지식인이 존재하는 것은 뭔가 빗대어 대단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권력에 경도된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는 상황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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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일본의 국제질서론
사카이 데쓰야 지음, 장인성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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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서 정치외교사와 국제관계 및 외교론의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사카이 데스야 교수의 이 책은 지난 2007년 동일한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2010년 연암서가에서 서울대 외교학과 장인성 교수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인데요. 특히 저자는 한국 학계에서도 꽤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이 책이 번역 출간되었던 당시에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대 일본은 우리에게 치유할 수 없는 식민지배를 강요했던 이웃 나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물론 위의 표현은 상당히 순화해서 언급한 것이고 사실상 오늘날까지의 한일 관계의 모든 불협화음과 문제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일본에서 권위있는 국제정치학계의 학자가 자신의 근대과 외교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는 꽤 중요한 부분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일정 부분 통사론적 입장인 이 책의 성격으로 봤을 때, 학자인 저자가 자국의 국체라고 여겨지는 일왕과 관련된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꽤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므로 이를 감안하고 책을 일독하게 되었는데요. 미리 결론을 짓는다면 전체적으로도 꽤 유익한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근대 일본에서 자국의 국제 정치적 기조와 이념은 국제주의와 제국주의가 거의 한몸과 같았다는 저자의 분석은 꽤 설득적이었습니다. 일왕의 실질적인 일본 내 권력 복귀였던 메이지 체제의 시작과 동시에 정치권과 군부의 이념적 잣대였던 소위 ‘천황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시도된 것이며, 일부 하급 무사들과 그들을 추종하던 무리들을 미화시키는 여러 작업들이 있어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막부체제가 종식되고 개화가 이뤄지는 시점의 일왕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동아시아 정치 무대에서 큰 변곡점이라 할 만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입장에서 말이죠. 동시에 오늘날 일본의 정치외교학에서 한스 모겐소와 E. H. 카 등의 현실주의적 이론가들이 외면을 받고 있는것도 국제정치와 외교 자체가 홉스가 말한대로 무정부적 상태의 법의 역할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국가들간의 헤게모니 다툼이라면 앞의 두 거장들에게서 일본 국제 정치의 정당성이나 이론적 기초와 관련된 일왕제와 과거 ‘다이쇼 천황’이라 알려진 히로히토 일왕의 제국중심주의를 설명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즉, 서론과 종장을 포함한 사카이 데쓰야의 7편의 논문은 앞서 설명드린 어떻게 일본의 제국주의가 국제주의가 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및 정치적 분석일텐데요. 흔히 매번 나오게 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과 허구에 불과했던 동아협동론 내지는 대동아공영론과 만주사변과 같은 불법적인 일본의 외교군사적 전술에 대해 같은 맥락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이상주의적 국제 정치에 경도되어 있던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만주사변과 만주괴뢰국에 관련된 태도에 있어서는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다는 식의 입장 선회에 저자 역시 일정부분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작게는 동북아 지역내에서 동북아협동론 체제의 주도국이 되어야한다는 입장 또한 마찬가지인데요. 그리고 일본 정치외교에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아주 잠시 미미한 영향을 끼친것을 제외하면 이러한 일왕중심의 일본 주도의 제국주의론이 이론과 현실적 배경에서 근대 일본의 중심이었다는 정치역사적 배경을 저자가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꽤 독자들 입장에서는 꽤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많은 일본 지식인들의 태도와 비슷한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다소 한 발 물러선 작위적인 객관적 입장의 서술과 표명을 학자의 양심이라 여기는 식의 분위기와 같은 글은 분명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과거 천황중심의 국가 통치 체제가 결론적으로 주권국민국가에 대한 노골적인 천대와 비판으로 귀결되고 많은 일본 정치인들이 같은 동맹인 독일의 나치 민족주의를 혐오하면서도 그들 자체도 그러와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을 애써 무시해왔다는 점에서 얼마나 일왕 중심 체제에 과도하고 무리한 정당성을 기울여 왔는지는 관동대지진이나 난징대학살 등과 같은 거의 인종 청소라 봐도 무방한 역사적 사건의 외면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자신들이 영국 및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면서도 실체로는 그 후진성과 폭력적 근성이 자리하고 있는 왜곡주의적 국가라는 것을 애써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국가 지배 체제가 얼마나 허위에 기초하고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겠죠. 이와 같은 입장에서도 오늘날의 ‘식민정책론’의 연구의 속성이 그러하고 “식민 정책학은 극히 국가주의적 이론 장치로 굳혀진 학문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이는 식민 정책학의 실상에서 벗어난 견해다”라는 저자의 판단은 약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과거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이론적 근거를 위한 수단으로 ‘식민정책론’을 인용하고 있고 여기에 ‘역사 수정주의’가 맞물려 주변 국가들과의 이러한 파국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던 점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사카이 데쓰야 교수의 이 입장은 단순한 과거 정치역사적 통설의 근거한 제한적인 해석일텐데요. 조금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저자 역시 무비판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을 빌어 식민정책론에 대한 완곡한 평가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것과 같은 부분말입니다. 이 5장의 뒤에서 식민지 없는 식민지정책과 자유주의적 기조가 덧입혀진 1920년대 이전의 일본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보아 이 양자적 입장에 대한 분리를 저자는 시도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아직도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군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미국에게 진것이지 아시아 국가들에게 패퇴한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하는 것과 패배주의적 역사를 극복해야 된다는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 주변의 국가들이 너무나 변함없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고 내정간섭이다 라고 말하는 등의 근거는 결국에는 일왕의 책임을 끝까지 묻지 못한 1945년 당시의 정치 역학 구조에 비롯된 것이고 그것의 여파가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의 의식 구조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으로 결국 일본 정치의 근간이며 핵심이므로 이것을 일본 정치인들 자신이 보편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기란 매우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이 해석은 일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매우 뿌리깊은 본질적인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결부시키는 핵심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저는 한국인들이 일본 왕에 대해 일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근거는 과거 역사에서 삼한시대의 백제와 고구려 등은 ‘내제외왕’ 즉 국내에는 왕이 황제로 자임하고 국외에는 왕으로 대신했는데요. 물론 매번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 당시 백제는 당나라 황제를 당왕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 당태종을 이세민이라 지칭하기도 했죠. 즉 여기서 요점은 자국인들이 황제든 천황이든 마음대로 부르는 것은 관여치 않겠으나 동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 일본 왕을 ‘천x’이라 부르라고 직접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적 입장에서 천[하늘]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굳이 우리가 천뭐시기로 부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식민지배한 역사를 제외하더라도 대한제국 시절의 우리의 고종황제를 황제로 여기지 않는 일본의 역사학계의 입장을 봤을때도 그러하고 결국 우리는 한국인이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왕이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국외에서 자신들의 전제 군주를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격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왜 격하의 표현인지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중국과 우리 그리고 동남아의 국민들까지도 일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봐야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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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인간의 몰락 - 왜 사람들은 고립되고, 원자화되고, 파편화되는가?
김윤태 지음 / 이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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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자 과거 영국 캠브릿지 대학과 런던 정경대에서 수학한 김윤태 교수는 학자로서의 이력 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에도 본인의 행적이 있는데요. 지난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뿐만 아니라 국회정책연구위원과 국회도서관장을 역임해 단순한 정당인에 그치지 않은 경력도 갖고 있습니다. 이를 학자와 정치인의 결합이라는 ‘폴리페서’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꽤 흥미롭긴 한데요. 더욱이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와 같은 몇몇 유명한 글의 저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도 어쩌면 마찬가지겠죠.

김윤태 교수의 이 책은 크게 독립된 글이라 봐도 무방한 유명한 서문과 총 9장의 주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관통하는 요점은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의 ‘사회적 자본’이 붕괴하여 벌어지는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도 동일합니다.) 다소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가 서로 균형있게 발전하지 못한 또다른 원인의 배경 설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점과 관련해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동시적 협력 발전과 경제 권력이 정치 부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의 문제 등을 여러 방면에 걸쳐 분석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의 개인의 파편화와 수단화, 심각한 불평등, 몰인간성 등은 노동 문제부터 각 사회 현상의 심각한 변화와 분화 등의 원인이 결국에는 정치 체제에서 정치 스스로가 자립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이기심의 발현이라는 잣대로 종래의 정치가 해야만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강제당하거나 하는 악화된 결과로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회학자들로부터 이미 사회적 인간이라 불러도 무방한 각 개인들이 이렇게 파편화되고 분자화 되는 것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여기 김윤태 선생은 이와 관련하여 세분화시켜 각각의 미치는 현상들을 독자들에게 상당한 근거와 여러 학자들의 입을 통해 알리고 있는데요. 다만 이러한 의미들의 확장에 따른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낙하산은 나쁜 것인가’, ‘왜 모든 사회에서 근친혼은 금기인가’, ‘사랑하면 결혼해야 하는가’ 등의 몇몇 소주제에서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를 지적한다면 “남성이 여성을 선택할 때 외모를 보고, 여성이 남성을 선택할 때 경제력을 본다면 여성들의 입장에서 경제적 능력이 있는 남성과 없는 남성의 경제 수준의 차이가 클 때 성형 수술에 대한 동기부여가 크고, 남자는 여자의 외모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의 도식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러한 도식은 사회생태학적인 결정론에 가까워 이것만으로 단정지어 판단하는 것은 익히 그 취지는 공감이 되었으나 약간의 아쉬운 점으로 느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위에 짤막하게 언급한대로, 저자의 이 책에는 정말 많은 분야의 학자들과 주장한 내용과 원전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최근 흥미를 끌고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는 학문적 주장들의 다채로운 모음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이렇게 많은 원전들이 등장함에도 글 전반의 독해는 비교적 수월하게 읽혀졌습니다. 이것은 저자 스스로가 얼마나 다독을 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책의 큰 맥락인 사회 내에서의 개인의 분자화 및 파편화가 오늘날 어떤 식으로 발현되고 목격되고 있는지에 대한 선명한 증명이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이즈음의 이러한 개인의 고립이라고 불릴만한 이 현상이 앞으로 좀 더 어떻게 파급될지는 좀 더 봐야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과연 전통적인 사회화 과정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진단이 나오지는 않아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분화되고 원자화 된 개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와 이를 해석하는 사회학에 좀 더 관심을 갖자는 주장은 익히 나온 것이고, 비슷하게 정치 불신과 관련된 문제 역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종래의 구호와 차이가 없어서 뭔가 읽으면서도 더 배고픈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통찰력은 절로 호의로 다가왔는데요. “최근 현대사회에서 급속하게 확산되는 노동의 유연화는 단순히 기술의 변화 혹은 소비자의 욕구의 변화라기 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변화라는 근본적인 사회학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과 “복지 국가를 지지하는 유럽 국가들은 복지국가를 자본주의를 합리적으로 철저하게 개혁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고 대부분의 이들 국가는 사회주의적 국유화에는 반대했다”는 분석은 의미심장했습니다. 관료제와 관련된 부분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이 기존의 기득권체제와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여러 곳에서 목격되는 것 만큼 관료제가 민주주의 체제에 이로운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저자가 독자들에게 흥미롭게 전하는 주제들이 있어서 ‘전체적인 사회적 불안’에 대한 조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보고 판단해야 될지에 대한 가까운 조언을 저자가 하고 있다는 부분은 크게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미 최근까지 우리 바깥의 학자들인 리처드 세넷이나 랜들 콜린스 등이 시민의 사회학적 관심을 유도하는 글들을 내고 있는데요. 물론 우리의 많은 지식인들도 이와 비슷한 의도로 좋은 글들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의 불안을 어떻게 개선시켜야 하는 점은 분명 쉬운 과제는 아닙니다만 그것을 오로지 정치인들과 국가에만 맡기는 것은 다소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선거로 선출된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결과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책임을 지지 않는 정부와 그외 곁가지들에게도 큰 의미가 되는 글이 아닌가 말미에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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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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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대 사화과학연구소 교수이자 도쿄대에서 정치사상사와 정치철학을 전공한 학자인데요. 특히 그는 우리나라에는 지난 2014년 번역 출간된 ‘서양 정치사상 산책’으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이 책은 많은 학자들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 소개해 드릴 이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는 서양의 근간을 이루는 보수주의에 대한 해석이 동아시아 학자에 의해 쓰여진 경우라 꽤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약간 기대를 갖고 책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은 글의 초입에서 보수주의의 버크를 언급하는 보수주의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제도와 관습이며, 이러한 양자는 역사속에서 다듬어져 온 것이고, 자유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전제하는 질서있고 점진적은 개혁을 지향하는 근거로 해야 한다고 정의하며, 반대로 무늬만 보수주의자들은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과거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현실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며, 자유를 위한 제도를 파괴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수주의라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드번크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과거의 역사는 단절되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산이며 그것의 축적된 이야기를 지키는 것이 보수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도 보수주의의 가치라면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참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와 관련하여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강하게 부정했는데요. 서로 교류가 있었던 토마스 페인과의 격렬한 논쟁도 바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달랐기 때문인데요.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에 따르면 버크는 그야말로 과거 역사의 단절이라는 거대한 집합체인 이 프랑스 혁명을 매우 불행한 것으로 본 모양입니다. 자신의 영국은 왕권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과거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과 그의 보수주의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으로 공화와 민주주의의 길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버크가 보기에 이러한 류의 급격한 진보는 결국에는 국가와 사회를 붕괴시키게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는데요. 권리장전을 포함한 영국의 정치 변화 자체가 점진적이고 부작용이 없는 개혁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아마도 이러한 사고의 과정이 자신의 보수주의가 어떤 틀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 18세기 후반, 버크에 의헤 그 기초가 확립된 보수주의는 그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데요.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대척점으로서의 보수주의입니다. 물론 나치 독일 이전의 히틀러의 괴상한 민주주의가 독일의 사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벌였던 술수의 모습과 같아선 안되지만 사실상 극적으로 이념의 분화가 벌어지고 있던 당시의 유럽에서 영국의 보수주의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문화적인 입장의 전통주의를 중요하게 여겼던 T.S 엘리엇을 저자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엘리엇은 각각의 계급에는 상존하는 문화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상위와 하위 개념으로 분류할 수 없고, “한 나라의 문화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국민은 지나치게 통일 되어서도 지나치게 분열되어서도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을 실으며 엘리엇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보수주의의 기반에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공통감각이고 전통 관념이며 나아가서는 유머 감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그 문화적 굴절성에 비교하면 명백하게 다른 것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오해와 오독이 되고 있는 하이에크와 관련해 그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어쩌면 보수주의의 탈을 쓴 자유주의자 혹은 리버럴로 해석되어야 할텐데요. 법의 지배라든지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중요시 여긴 하이에크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의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노예의 길은 당시의 암울한 이념의 대결 분위기에서 국가에 귀속되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반사회주의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은 분명합니다. 뒤이어 합리주의 자체를 비판했던 마이클 오크숏의 사례 또한 법에 따른 통치를 20세기 사회에 복권 시키고자 했던 것 또한 그 역시 보수주의의 틀로 이해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전체에서 저자의 두 가지 통찰을 발견했는데요. 미국의 보수주의가 기독교와 결합해 반지성주의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과 조지 W. 시절의 네오콘이 국제법과 유엔을 불신하고, 반대로 규칙을 지키게 하고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패권이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평가와 이는 곧 과거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에서 비이성적으로 변화된 미국의 신보수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어빙 크리스톨만 짧게 언급되고 네오콘의 시조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운 점입니다.

성찰적 근대화를 앞서서 부르짖었던 앤소니 기든스의 주장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과거 세계 제2차대전 이후의 복지와 안정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경제적 주의가 급격하게 보수와 신자유주의로 돌아서게 된 것은 건전하고 도덕적인 진보주의가 부재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저자인 우노 시게키 선생도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로 영향력이 있는 진보가 전무했기 때문에 보수주의가 사회의 대척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봐도 진보와 보수의 건전하고 균형적인 무게추가 사회 안정에 좀 더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보수가 존재하는에 대해서도 여기 이 글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21세기의 보수주의는 가급적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고, 과거 사회주의에 맞서려고 했던 보수주의의 정신대로 법과 사회를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비정치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들을 견제하는데 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사회를 신봉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보수의 역할이라면 당연하고 마땅하게 그 앞길에 서야만 하겠죠.


리뷰는 기존의 걸 지우고 다시 재업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댓글란은 잠시 막아놓겠습니다. 북플 회원만 댓글 가능하게 만들어주시면 좋은텐데 아쉽네요. 익명으로 분탕질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댓글은 막게 되었습니다. 이 점 너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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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정훈 옮김 / 김앤김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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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켄터기 주립대학 출신의 피터 자이한은 현지 언론의 입을 빌어 표현하자면 ‘떠오르는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데요. 미국에서 발간한 2권의 저서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지정학과 인구통계학 및 자원학에서 특히 셰일 가스에 대해 연구하는 등 그는 다방면에 걸쳐 연구를 하고 있는데요. 또한 주로 에너지 기업과 금융기관, 미군 등에 세계 정세 분석과 지정학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 등을 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 ‘Accidental Superpower’의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한 글을 올해 7월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3월에 서평을 썼던 조지 프리드먼의 ‘21세기 지정학과 미국의 패권전략’이라는 글과 제법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자이한의 이 책이 좀 더 내용이 두텁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국내에 (다소 공격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유명한 이춘근 교수의 추천의 글이 있어서 저로서는 조금 기대반 두려움 반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분류해 본다면, 1장부터 5장까지는 지리경제학의 수단으로 과거 셰계에 영향을 끼쳤던 국가들과 배경 등을 담고 있고요. 이후 나머지 15장까지는 인구통계학과 더불어 미국의 패권을 중심으로 각 지역의 분석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자이한이 말하고 있는 바는 미국의 패권이 결코 끝난것이 아니며, 이제서야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 미국의 그것에 도전하는 여러 국가들과 협력할 만한 상대국, 돌출 행동을 보일 국가들에 대해 인구통계학과 지리경제학 및 다른 제반 수단 등을 동원해 꽤 세밀하게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지 못할 부분도 제법 있었는데요. 이를테면 그리스와 관련된 분석에서 “그리스 정부는 유로를 담보로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돈을 흥청망청 썼다”는 것은 꽤 공격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와 비슷하게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주도적인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 대 다른 변수, 다른 부상하는 국가,돌출 행동의 여지를 갖고 있는 국가, 협력 가능성이 있는 국가 등으로 일종의 양자분석으로 약간의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분명 글의 한계라고 봐야할지, 스스로 국제 정치에서 어떤 변수가 어떻게 작용하고 그 파급효과가 어떤식으로 나타날지 충분히 알고 있는 학자임에도 뭔가 과한 해석이랄까요. 꽤 훌륭한 자료들과 인구 분석에 따른 국가간의 양태에 대한 현명한 통찰력은 분명 있어보이지만 과한 분석들도 있어서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가지 더 예를들면 캐나다의 앨버타 주가 미국에 편입될 것인가와 같은 분석 그리고 그 결과로 캐나다의 분열 이런 측면의 해석은 좀 과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자는 미국의 오늘날 미국의 패권이 기틀을 잡게 된 역사적 사건으로 2차대전 이후 세계 질서와 경제 문제 등 제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브레튼우즈 회의’를 꼽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달러로 연동되는 금본위 체제인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후 미국의 시장을 각국에게 개방하고 막대한 재정적 원조 그리고 각 자원로에 미국의 해군을 파견하여 수송로를 안정시키는 등의 여러 차원에서의 세계적 임무를 미국이 자임했고,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밖에 없었으며 이 시기 전의 영국은 이미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종결지어 과거의 영국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음은 자명했고 마찬가지로 프랑스나 소련 또한 그러했다고 분석합니다. 이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 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큰 골격이 되고 이런 상황에 저자는 미국의 이익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함구하고 있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양날의 검이라 볼 수 있는데요. 기축 통화국 주도의 금본위제도는 일장일단이라고 봐야하는 막대한 통화발행과 다소간의 무역적자를 잉태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주도적으로 전후 질서를 만드는데 이 브레튼우즈 체제가 기여한 측면은 있지만 세계 경제의 활성화 및 그로 인한 산업 발전 단계의 자원 배분과 수송로의 안전 확보 등에 미국의 해군력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 아닌가 또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동의 맹주로 만들고 이스라엘을 정착시킨 것은 오로지 미국의 의도였다고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개입을 무산 시키고 중동을 대체로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은 자국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팍스 아메리카나’의 도덕적 사명감을 갖고 행한 일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이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찬성해야 했던 이유는 싸우고 싶어서도 아니고, 지역 전략을 고려할 때 전쟁할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다. 참전하지 않으면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그러면 동맹체제 전체가 와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저자는 밝히는대요.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을 동일하게 미국에 대한 신뢰문제로 주장하는 것에는 전부 수긍하기는 어려웠지만 일종의 미국의 딜레마가 엿보였습니다. 이익이 존재하지만 어찌됐든 댓가를 치뤄야하만 그런 주고 받는 입장 말이죠.

물론 이 책의 큰 장점은 꽤 훌륭한 기법으로 전세계를 독자들이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기사에 나온 ‘카스피해를 호수로 볼 것이냐, 바다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일종의 일차적 정보와 같은 부분이 이 책에 담겨져 있습니다. 각 지역의 해당국들에 대한 언급도 잘 나와 있고요.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한국이 미국의 동맹체제에 뚜렷한 기여를 할 수 있는 협력국이 될 것이냐 아니냐는 한국에게 달려있다.”라는 분석으로 나옵니다. 한미 동맹이 오로지 한국에게 달려있다 라는 식의 해석은 아닐 겁니다. 동맹의 주도권이 우리나라에게 있을 순 없겠죠. 한국이 오스트레일리이와 뉴질랜드와 더 협력을 기울이고 이 지역의 미국 주도 바퀴살 동맹 체제에 기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모양인데요. 중국이 체제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명확히 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주도의 동맹 외교는 다른 쪽으로 봐야된다고 자이한은 여기는 모양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국제 정치를 보는 시각이 미국 위주의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래 국제정치학이 지정학과 인구문제와 만나 또 새로운 국면을 보이고 있는데요. 국제정치학 자체가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진 권력 관계인 만큼 힘을 가진 국가가 주도권을 갖으려고 하는 태생적인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하는 시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여기에다 지정학이 어떤 해석을 더 보여줄지는 앞으로 계속 출간되는 관련 책들을 통해 집어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거의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글이었는데요. 번역은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관련된 지도에서 동해를 ‘sea of japan’ 그대로 나와 있는 것을 복사 붙여넣기 해서 살짝 기분 나쁘긴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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