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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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었던 ‘악의 남용’의 저자이면서 정치철학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석학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의 최근 출간된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일독했습니다. 저는 그의 전작인 ‘악의 남용’을 꽤 흥미롭게 접했는데요. 9.11 테러 이후 당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악마화를 통한 정치적 이득의 셈법이라는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스타인의 신간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구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역자인 김선욱 선생은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한나아렌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역자의 유사한 책인 ‘한나 아렌트의 생각’ 또한 일독을 한 상황입니다. 이 책 후기에서도 자신의 책과 번스타인의 이번 책이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언급을 내비치며, 오히려 역자 스스로 반갑게 번역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와 역자의 자그마한 흑백사진이 양장 겉표지에 실려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책을 초판으로 구한 것이 나중에 의미가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감상에 젖어봅니다.

지난 1975년에 세상을 떠난 한나 아렌트와 저자와의 우연한 계기의 만남의 소회가 번스타인이 ‘근본악’에 대해 탐구하는데 사상적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부역자들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그 평범한 인상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고 이 평범성이 주는 의미 전달 때문에 주변에 많은 동료 학자들과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사실의 문제로 간주했고’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수백만의 유대인 절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이 ‘악의 평범성’의 카테고리를 보면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음대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을 왜곡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런 사소한 정치가 진리와 진실의 발견이 우선된 게 아니라 의견의 교환이 먼저라면 ‘불행하게도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는 가장 성공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는 사실적 진리가 단지 다른 의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잠정적 해석이 뒤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가 권력과 만나거나 권력 자체가 정치적 속성을 기반으로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권력’이 매우 아름답거나 진실되고 순수한 이미지로서의 최선이 아니라 기만과 이미지 정치, 거짓말에 기반하기까지 하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정치적 기만’의 한계는 그 끝이 없다고 말한 일면에 그녀가 경험한 전체주의적 뿌리에 그러한 경험을 얻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사실 이 책을 통해서도 한나 아렌트가 인지하는 정치에 대해 꽤 탈가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앞선 인권도 모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은 매우 뼈아프고, 이 ‘양도 불가능한 권리’는 오직 시민들이 구성한 정부 아래에서나 가능하다는 판단도 굳이 난민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또한 과거의 세계에서도 인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악으로서 무엇이든 가능했던’ 전체주의 시대에 유대인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포르투갈로 그리고 미국으로 탈출하여 혈혈단신 이 거대한 대륙에서 무국적자로 오랫동안 거의 난민과 다름없이 ‘외부자’로 경험한 것으로 비추어 봤을 때 그녀가 진실로 오늘날의 난민 사태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내었을지 절로 짐작이 됩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타당한 정부 아래에서만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고향을 박탈당하고 다른 새로운 고향을 제공받지 못한채 기한없는 수용소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보내야 한다는 점은 윤리적으로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이러한 권리라는 것이 한 국가가 내란이나 치열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된다면 아주 손쉽게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에서 전세계인 누구나 쉽게 그런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나 기존의 국민국가주의적 범주에 다른 외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은 물론 정치적 상황 하나 만으로는 판단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런 주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정치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을 해갔지만 기득권적인 유대인 협회에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영국이 잠정적으로 철수하려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현지 팔레스타인들을 배제한 채,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계획에 반대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녀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조화로운 국가를 바랐지만 유대인 지도층들은 자신들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소수 민족으로 치부하며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과정이 흡사 예루살렘으로 잡혀간 아이히만이 과거에 아리아인들만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잔악한 일들과 그 궤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악의 전체주의 시대를 몸소 체험한 유대인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을 배외자들로 추방하는 것은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에 대한 점고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시기에 흑인 인권 운동에 중요한 지점인 리틀록 사건에 대해 ‘정부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는 입장으로 연방 정부의 개입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차별에 정부가 어떠한 합법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주장도 보였는데요. 그녀가 나중에 이러한 입장을 철회하고 사과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인종주의 때문에 고향을 탈출한 그녀가 그것을 정부가 바로 잡으려고 하는 절차를 사회적 관습 때문이니 하면 안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인종주의, 인종차별 등은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될 문제일텐데 말이죠.

이외에도 미국 독립 혁명과 헌법의 동의와 같은 민주적 기초에 대한 긍정의 태도와 더불어 “시민이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치적 삶을 날카롭게 벼리는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열망”을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삶이 사적인 삶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의무라고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녀의 존경할 만한 많은 학문적 외침 중에서도 과거 독일 나치의 인종 말살 행위에 있어서 이것과 상관없는 보통의 독일인들과 분리하여 이해하고 자신 스스로도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임에도 명확하게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전범 행위, 전범 행위자들을 구별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유대인 여성으로 태어나 전체주의 시기, 2치대전의 시기에 독일을 탈출해 이방인으로서 미국에 오랫동안 적응해갔던 한나 아렌트,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개인적 배경으로 전혀 굽히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여 정치, 인권, 사회적 정의, 시민의식 등의 여러 주제들로 학문적 탐구에 힘써왔던 것은 정말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번스타인의 이 책이 약간의 한나 아렌트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러 저서들을 주제 및 시대별로 해석해 ‘우리가 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번스타인의 다른 글들이 또 번역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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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도시를 살다 - 동아시아 발전주의 도시화와 핵 위험경관
이상헌 외 지음, 서울대학교 SSK동아시아도시연구단 기획 / 알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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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SSK동아시아연구단이 기획하여 출판한 이 책은 ‘핵발전과 그로인한 위험경관(riskscape)’을 주제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대만의 핵발전 도입과 후쿠시마 사태 이후 변화된 핵발전소에 대한 인식 문제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의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느낀 점은 핵발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위험성을 많은 자료를 통해 깊게 분석하고 이를 통해 가시적인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감이었습니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발전에 대해 쓰여진 글 가운데에서 정말 심도있는 기획이 아닌가 합니다.

1부는 우리의 위험경관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핵발전소의 도입과 핵발전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거버넌스적 접근 및 이를 통한 한국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며, 2부는 일본의 핵발전 도입과 원자력복합체 (nuclear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분석과 후쿠시마 이후 정부와 주민간의 해당 주거지 복귀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와 일본 정부의 파행적인 정책, 중국 광둥성 쟝먼의 핵연료공장 반대에 나선 시민들의 행동을 담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최초로 핵발전소 건설 동결에 나선 대만의 정치적 결단과 시민 사회의 움직임을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이 글의 큰 해석 수단이자 주제인 위험경관 (riskscape)은 “복수의 행위자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위험에 대한 상징들과 구체적인 결과물들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정의하고, 이것의 이론적 틀에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을 잠정적으로 바탕에 두고 설명에 나섭니다. 특히 이 위험경관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요즘의 핵발전 및 핵발전소 건설 이슈일텐데요. 이것과 관련하여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핵발전이 초래할 수 있는 환경적이고 기술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그러한 개발이익을 독점하는 원자력 카르텔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석이 주요한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런 위험경관은 이익을 손에 쥐고 있는 원자력 카르텔과 관련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모습으로서 이 부분을 과연 우리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책 스스로가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핵발전 역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시도가 계기가 된 것으로, 애초에 정치군사적인 비밀 계획과 같은 개념으로 이것이 오늘날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의 모습보다는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 내지는 카르텔의 정보 독점과 비밀화에 앞선 시기의 특수성이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부분을 인정하고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신들만이 특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해당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의사협회’와 같이 스스로 전문가 집단을 자처하는 특수적 요인을 배경 삼아 원전 건설과 시공에 소수의 대기업들이 과점 상태의 시장을 공유하며 이러한 이익을 원자력 업계가 기득권으로서 오랫동안 유지 및 보호해왔다는 것을 책의 1부에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의 유사한 사례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드러난 여러 본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원자력 업계가 정보 폐쇄성과 원자력이라는 특수한 문제를 사실상 제한된 범위에서 다뤄왔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소 허용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소개된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시민에게 정보 공개는 기본임에도 이러한 점을 마치 국가 운영에 필요한 특수한 정보라고 여기는 듯한 업계의 폐쇄적 태도가 일본에서 재앙으로 나타난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도 별 변화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이에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거버넌스적 해법 즉, ‘정부의 규칙과 과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사결정구조로서 비정부 행위자들을 포함시키는’ 등의 방법과 삼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여 적절하게 원자력 업계를 민주주의적 소통의 틀 안으로 편입하게 하는 등의 수단을 밝히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례는 아니겠지만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정부를 상대로 막각한 로비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금권 정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업계가 전자의 정도 만큼 물리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카르텔 수준의 견고한 이해관계는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부에서는 일본의 현상황이 원자력복합체와 정치인과 관료, 금융기관, 건설업체로 구성된 철의 삼각구조 (Iron Triangle) 시스템이 과거 일본의 토건국가 발전론과 연계하여 꽤 견고하게 시스템이 구축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후쿠시마 사태 때, 내각의 수반인 총리인 간 나오토를 ‘바지사장’으로 만들 만큼 도쿄 전력의 위세는 이미 드러난 바가 있으며, 일본 정부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개적이고 투명한 여론 태도를 거의 수용하지 않고 후쿠시마와 그 주변 지역의 세슘을 비롯한 방사선 물질의 피해 규모와 실제 상태를 (실제적으로 그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은 일본 시민의 동요에 기대기 보다는 일견 정보 폐쇄로 얻는 일본 원자력 업계의 이익과 근본적으로 핵발전은 매우 안전하고 자연친화적이다라는 기존의 반복된 입장을 이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부정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우라늄을 정제해 발전용 옐로우 케이크를 만드는 것 자체가 환경에 좋지 않은데 고준위 방사선 폐기물 문제를 자꾸 수면 아래로 가라 앉히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막대한 이익이 이들 집단에 연계되어 있기 때문일겁니다. 핵발전 자체가 발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기간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에 충분한 도움이 된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인 것이죠.

이런 후쿠시마 사태 이후로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광둥성의 쟝먼 핵연료공장 반대 시위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중국에서는 핵발전 자체가 정부 방침과 다름없어서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거의 이적행위와 다름없음에도 해당 주민들이 반대에 나선 것은 핵발전 위험성이 시민들에게 인지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만과 같은 경우는 현재 건설중인 핵발전 2기에 대한 반대에 나선 것은 실로 의미있는 일인데요. 독일, 스위스와 더불어 핵발전 반대 움직임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핵발전 반경 30Km내외에 3,341만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삽입된 지도는 원전의 유사사태 발생시 인명피해가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중국 산둥반도의 건설중인 하이양 원전은 자연 재해로 인한 원전 붕괴시 직접적으로 우리 나라의 서울과 수도권, 충청권을 편서풍으로 직격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런 부분인데요. 원전의 안전 확보를 해당 국가에 희망적으로 기대야만 한다는 점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정부를 과연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느냐의 이 원초적 질문과 동시에 공기와 설계를 비롯한 건설 전반을 밀도있고 적법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본격적인 산업 고도화 시기에 들어선 중국의 국내적 상황으로 봤을 때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기란 정말 요원한데요. 그래서 눈에 바로 보이고 손에 잡히는 쉬운 수단인 핵발전으로 석탄과 석유를 비롯한 수많은 화력 발전을 대체하겠다는 것은 미세먼지가 (안전을 답보할 수 없는) 방사능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점은 울리히 벡의 위험도시 이론과 연계된 산업사회의 불안전한 환경 문제와 시민 안전과 관련되어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현재의 중국 원전 건설 사례가 매우 전자의 이론과 유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끝으로 관련 학자들의 심도있는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인 제가 보기에도 꽤 수월하게 글이 이해되었습니다. 더욱이 주제들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설득력이 있어서 핵발전과 원자력 카르텔에 대해 좀 더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이 책을 일독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여러 논의들이 마음에 와 닿았지만 특히 우리 원자력 업계의 이 특수한 폐쇄성이 박정희 시대에 핵개발 역사의 유산이라는 해석을 보니 뭔가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비밀에 핵 재처리 기술을 비롯한 무기화 개발에 나섰을 때,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개발 시도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으로 반대했는데 이미 핵무기 개발 연원이 오래된 북한의 핵개발 역사를 미국 정부가 몰라서 그리 말한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단지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반대를 하기 위해 북한을 판 것인지는 양자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뒷맛은 씁쓸합니다. 핵무기 개발을 못해서 씁쓸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나라의 이 올가미 같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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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 - 아베의 아름다운 일본은 있는가
이헌모 지음 / 효형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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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한 후, 지바현 소재 중앙학원대학의 법학부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이헌모 선생의 ‘도쿄 30년, 일본 정치를 꿰뚫다’를 일독했습니다. 저자는 한국인이면서 도쿄에 30여년 체류중인데, 아마 제목의 도쿄 30년은 이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법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일본 대학의 한국인 교수가 과연 현재 일본의 아베 정권과 그들의 우경화 그리고 조만간 있을 헌법 개정에 어떠한 분석을 하고 있을지 적지않게 기대했습니다만 전체적인 글의 수준은 원론적인 정도의 평가로 여겨집니다.

현재 아베 총리는 과거 요시다 독트린으로 일본을 전후 부흥에 나서게 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총리 연임 기록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는데요. 아베는 지난 2016년 불거진 모리토모 학원 국유지 헐값 매각에 이어 카케 학원 수의학부 설립 허가에 청탁과 권력의 압력이 있었다는 의혹으로 정권 최대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아베 총리의 자민당 정권이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나 북한의 존재와 김정은의 도발로 아베를 비롯한 자민당에게 있어 ‘아주 더할나위 없는 고마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 점은 저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점으로 이 아베 총리에게는 ‘적절한 운’이 매번 작용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민당 파벌 정치를 박살낸 고이즈미 전 총리의 지원을 받아 차례로 자민당 간사장, 관방장관에 임명된 것은 그의 정치적 후광을 더 강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조부였던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임을 평소에도 자랑스럽게 밝히고 다닌 아베에게 있어서 3.11 대지진으로 인한 민주당의 정치적 무능도 그에게는 큰 운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다만 저자는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철의 트라이앵글 (Iron Triangle) 인 정, 관, 재계의 카르텔과 동일한 일본 관료조직의 전횡을 막기 위해 민주당 정권이 배제한 것에 대해 시기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었다고 보는 점은 사뭇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더욱이 간 나오토 총리 시절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관료 들의 항명이라기 보다는 도쿄원전과 원전 마피아에 의한 조직적인 관련 정보 은폐가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리를 바지 사장으로 만든 것은 도쿄 원전의 작태라고 봐야 하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주목한 것은 8장 이후 분량인데요. 이 8장은 아베 정권과 일본 헌법의 개정 시도를 다루고 있고, 10장은 요 근래 몇가지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던 일본의 왜곡된 티파티라고 부를 수 있는 ‘일본회의’에 대해 할애하고 있는데요. 분석의 결과로만 봤을 때는 상당히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민당과 공명의 연합정권이 의석 수의 3분의 2를 달성하고 후에 2020년 도쿄 올림픽 이후 아베 총리가 본격적으로 개헌에 나설 것이라는 분석과 이를 뒷받침하는 일본회의의 연혁 등은 매우 기본적인 사항이라 봐도 무방했습니다. 다만 여기에 일본회의가 종래의 ‘일본을 지키는 국민 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해 일왕의 연호에 대한 법제화 각 학교와 공공기관에 있어서 기미가요의 확대, “현행 헌법의 최대 결함인 국가 방위를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이 우려다”는 현 일본회의 회장의 주장으로 봤을 때 아베와 자민당 그리고 일본회의는 일왕이 통치하던 과거 일본제국 시절의 극우 민족주의로 회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은 매우 우려되는 부분으로 현재 중국이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목적으로 과거 지위에 대한 회복 열망을 직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시점에서 역외 균형 전략을 지속하고 있는 미국 정부와 집단 자위권을 명목으로 잠정적 일본의 재무장을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쪽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가능성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는 면밀히 주시하고 대응 마련이 필요하지 않나 싶군요.

끝으로 저자는 글 중간에서 요근래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헤이트 스피치와 혐한에 대해 자신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딱히 인종 차별주의적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타국과 타지에 거주하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적응과 노력이 필요하단 취지로 그동안의 소회를 남기고 있는데요. 이미 많은 글들로 혐한 시위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국내에도 퍼지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일본인들에 대한 매우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인종 차별적인 시위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현재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는 실로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국제 사회에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자임하고 있는 국가가 자신들의 국민들이 이성에 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전적으로 그 책임을 사법부에 일임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스스로 많은 일본인들에 의한 환대와 지지를 살면서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현재 일본 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극우 민족주의와 여기에 적극적으로 수렴하는 아베와 자민당 정권의 행태는 독도 문제와 결부되어서도 제대로 끝내지 않고 있는 과거사 문제에도 일본 정부와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내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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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불평등을 낳는가 - 세계화를 해부하는 아홉 가지 질문
피어 몰란더 지음, 홍지수 옮김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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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와 국제통화기금, 유엔개발계획 등의 국제기구에 정치경제학 관련의 컨설턴트로 스웨덴의 명문인 호로닝헌 대학과 룬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오늘날 스웨덴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피어 몰란더의 전세계적 이슈인 불평등과 관련 이 책 ‘무엇이 불평등을 낳는가’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몰란더는 세계 각국의 불평등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인데요. 마찬가지로 과거 뉴욕 타임즈와 같은 언론 매체에도 앞선 주제와 같은 글을 기고하며, 세계에 불평등에 의한 문제에 관해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음의 세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왜 사회는 하나같이 불평등하고, 이러한 불평등을 과연 완화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정치철학 이념들은 현상으로서의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같은 불평등에 대한 중대한 질문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저자가 충분한 답을 내렸다고 평가하기는 다소 미흡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의 불평등 문제를 오래전 역사의 ‘생존 문제’ 내지는 ‘생존 게임’ 정도로 원론적인 해석에 그치고 있다는 점과 불평등의 진정한 해결책은 일정 부분 부족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글의 서두에서 저자는 “사회의 주변 환경이 불평등을 제약하게 하는 것”으로 불평등을 다소간 방지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으로 밝히는 점은 고유한 식견으로 느껴졌는데요. 이와 같은 불평등을 방지하는 저자의 이론적 해석이 설득력있게 느껴졌지만 뒤이어 “사회 체계가 바람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해주는 정책이나 제어 장치는 절대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과 사실상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조정하기 어렵다”는 측면의 논리 전개는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꽤 실망스러 기분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협상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론적 근원을 찾아가던 중에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정부와 시민은 각자 사회적 계약 관계’에 의한 대의적 공화주의로 묶여야 한다는 오늘날 시민 혁명으로 인한 근대 민주주의 사회의 이론적 근거였던 이 ‘계약론’을 잠정적으로 실패로 보는 점도 물론 그동안의 수많은 고안된 사회적 제도들이 불평등과 관련된 제대로된 해법을 내놓지 못한 결과에서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판단이지만, 데이비드 흄의 입을 빌려 사회계약이 허구라고 보는 점은 저로서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시민과 정부 사이의 균일한 사회 계약적 관계는 많은 정부가 시민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고 그것을 ‘국가 개입의 터부’로만 여겨 개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적절하게 절제시키지 못하고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 쭉 경제적 시스템의 불편한 우위와 독점적 정보를 제공받은 남들과 다른 거대 자본이 이를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부자들을 시장 경제주의적 방탄막으로 차별적 옹호의 수단으로 해석해 근원의 ‘인간의 이기심’을 가볍게만 본 것이 누적된 현재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저자의 다음과 같은 판단 즉, “자유주의자는 전통이 아니라 이성이 모든 사회 제도들의 기반이 되어야 하며, 이성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제도나 관습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파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옳다면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은 마땅히 각 개인의 이성으로서 제어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흡하다면 제도로서 구축해야 하지만, 과거 토크빌이 우려했던 대로 ‘제어되지 않은 개인들의 이기심이 많은 사회를 사실상 분열로 빠트린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이에크와 칼 포퍼의 주장대로 각 사회를 이성의 제어로 넘치는 제도들을 수시로 조정과 개조를 하는 것이 과연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또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 그 개인들로 이뤄진 사회가 유토피아적 가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그러한 천국은 세계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각 국가에 만연된 불평등 문제를 다소나마 해결 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글 말미에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근본적인 딜레마에서 정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협상에 내재된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제어할 장치로 국가를 이용한다”고 아마 모국인 스웨덴의 축적된 경험으로 이렇게 단정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이 강고한 국가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가 주는 어감을 극복하기 위한 일차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사회보장과 복지와 관련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을 먼저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등의 선행 작업이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가 처해 있는 엄밀한 불평등의 문제를 점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 제도와 시민들, 정부간의 신뢰가 쌓여야 하며, 이 지점에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시민들간의 의견 통합과 문제 인식의 공유, 시장 만능주의에 대해 이제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등도 필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이 당면한 과제들은 협상과 설득이 중요하고, 모두가 공감대의 장에 올라섰을 때, 법과 제도, 특히 헌법을 시민들의 삶에 맞게 다시 살펴보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 그것을 경제적 시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해석상의 한계가 명백하니 정치사회적인 입장의 통합의 의견으로 실마리를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소모적인 정치 대결로 몰고가서 종전의 훔볼트의 입장과 동일한 불평등과 차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폐쇄성으로 이끄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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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버나드 크릭 지음, 이혜인 옮김 / 스윙밴드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2008년 작고한 버나드 크릭은 하버드, 버클리, 런던정경대 등에서 강의하고 후에 셰필드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노동과 교육 부분에 다앙한 활동을 하고, 이어 영국 교육노동부 자문위원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영국 등지에서는 그를 정치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에서 석학이라 인정하고 있는데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강의까지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 Democracy : A Very Short Introduction 으로 출간된 후 영미 문화권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많은 판매고를 올린 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1962년에 출간된 ‘정치를 위한 변호 In Defience of Politics’ 도 매우 유명한 글입니다. 위의 정치를 위한 변호는 과거에 정식 판권이 아닌 번역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데요. 현재는 이 책과 관련해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버나드 크릭의 이 글은 제목대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역사와 더불어 이론적인 기원과 고찰을 동시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거쳐 중요한 영국의 입헌주의 군주제의 시작과 계몽주의,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등의 시대 배경을 거쳐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까지 공화정과 혁명, 여러 사상가들의 이론을 빠짐없이 열거하며 민주주의라는 큰 그림을 매우 객관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부정 보다는 조심스런 낙관를 예측했는데 이것은 ‘제제가 없는 민주주의의 난관’을 그가 인식했던 것으로 어쩌면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을 끄집어 낸 것은 즉, 무분별한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소간 시민들의 규율과 제한을 기본으로 두고 일종의 조정을 통한 민주주의가 더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의 글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껴졌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토크빌이 “다수에 의한 폭정”을 경고하면서 “어쩌면 그가 민주주의보다는 자유를 중시했는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인식은 꽤 신선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근거없는 낙관주의 대신 이성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민주적 자유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것도 비판적 인문주의자로서의 저자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것으로 홉스 이후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한다는 기본적 정명에서 약간 벗어나 좀 더 개인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외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허버트 스펜서의 언급대로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비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계몽주의 이전, 절대군주제를 거쳐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권리 확보를 통한 영국의 정치 실험이 입헌군주제의 색다른 정치를 초래했고, 다른 앵글로 색슨의 미국은 이주민들의 수월한 토지 확보 이후, 재산권의 부여에 의한 이들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가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결정적 차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1인 1표의 기발한 정치적 전환이 미국이 독립시기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권력의 견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재산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행사를 했던 다수의 미국의 일반인들이 미국 고유의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도 경제적 풍요에 기반한 부르주아의 성장이 민주 정치의 힘이라고 본 것처럼 크릭의 이 글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토크빌은 미국을 부분적으로 오해해 민주주의를 거의 평등과 동의어로 보았는데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평등의 개념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고 오늘날 복지와 의료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의 선택 내지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다수의 미국인의 중요한 관점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유럽과는 달리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하는 특유의 자유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원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이라는 측면의 토크빌의 선험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은 조건들의 평등에 기반해 개인의 이기심을 적절히 조절해야 민주 정치가 안온해 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평등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미국의 ‘중산층 무계급’에 의한 민주주의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다수에 의한 지배가 다수에 의한 폭정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고 추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민화에 대한 가능성 등을 불길하게 예측한 토크빌의 입장은 최근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저자는 보이면서 토크빌의 자유에 대한 입장과 관련해서 “민주적 다수결주의와 자유 사이에 알맞는 균형을 맞출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는 토크빌의 결론으로 약간의 희망적인 태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의 명백한 긴장 관계 보다는 민주주의의 왜곡된 변형이라 지칭될 만한 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체제의 최대 위협이라고 저자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강력하고 흉악한 무기인 ‘선동’과 기존의 체제와 엘리트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 선동가적 포퓰리스트를 제거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과제일텐데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기득권과 밀접한 기존의 엘리트주의가 너무 과도하면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엘리트 계층의 진입에 대한 모든 시민들의 기회가 보장되어야만 하고 가진바 능력대로 발휘하고 정체되지 않고 수시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필요해 보입니다. 포퓰리즘이 융성하게 되는 요인들 중에 하나는 고착화되고 폐쇄되어버려 자본주의적 계층 이동을 포함한 민주주의 사회 내의 건강함이 사라져 일반 시민들에게 좌절감을 더욱 더 안겨주고 이런 여론과 방향성을 선동과 폭력적 언어로 유인하는 포퓰리스트에게 유인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인 크릭이 특별히 소개한 한나 아렌트가 인민과 군중을 구별했다는 점은 이 후자의 군중들이 우민화와 포퓰리즘을 확대하는 경로가 되는 만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데모스라 지칭되는 민주사회의 시민들이 각자 스스로 사색과 면밀한 독서, 활발한 토론 등으로 무장해야만 민주주의 정체가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존경받는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조건들을 언급하며 시민성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급진적으로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까?로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 질문의 대답은 권력의 분산이며 크게는 전세계의 가짜 민주주의 체제를 구분하는 수단이자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민주주의의 확대만이 우리의 삶과 자연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람직한 공화주의적 민주정치를 저자 역시 크게 바란 것처럼 이것을 지켜나가기 위한 우리 시민들의 노력이 더 엄중해지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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