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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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었던 ‘악의 남용’의 저자이면서 정치철학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석학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의 최근 출간된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일독했습니다. 저는 그의 전작인 ‘악의 남용’을 꽤 흥미롭게 접했는데요. 9.11 테러 이후 당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악마화를 통한 정치적 이득의 셈법이라는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스타인의 신간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구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역자인 김선욱 선생은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한나아렌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역자의 유사한 책인 ‘한나 아렌트의 생각’ 또한 일독을 한 상황입니다. 이 책 후기에서도 자신의 책과 번스타인의 이번 책이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언급을 내비치며, 오히려 역자 스스로 반갑게 번역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와 역자의 자그마한 흑백사진이 양장 겉표지에 실려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책을 초판으로 구한 것이 나중에 의미가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감상에 젖어봅니다.

지난 1975년에 세상을 떠난 한나 아렌트와 저자와의 우연한 계기의 만남의 소회가 번스타인이 ‘근본악’에 대해 탐구하는데 사상적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부역자들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그 평범한 인상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고 이 평범성이 주는 의미 전달 때문에 주변에 많은 동료 학자들과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사실의 문제로 간주했고’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수백만의 유대인 절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이 ‘악의 평범성’의 카테고리를 보면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음대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을 왜곡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런 사소한 정치가 진리와 진실의 발견이 우선된 게 아니라 의견의 교환이 먼저라면 ‘불행하게도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는 가장 성공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는 사실적 진리가 단지 다른 의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잠정적 해석이 뒤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가 권력과 만나거나 권력 자체가 정치적 속성을 기반으로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권력’이 매우 아름답거나 진실되고 순수한 이미지로서의 최선이 아니라 기만과 이미지 정치, 거짓말에 기반하기까지 하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정치적 기만’의 한계는 그 끝이 없다고 말한 일면에 그녀가 경험한 전체주의적 뿌리에 그러한 경험을 얻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사실 이 책을 통해서도 한나 아렌트가 인지하는 정치에 대해 꽤 탈가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앞선 인권도 모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은 매우 뼈아프고, 이 ‘양도 불가능한 권리’는 오직 시민들이 구성한 정부 아래에서나 가능하다는 판단도 굳이 난민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또한 과거의 세계에서도 인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악으로서 무엇이든 가능했던’ 전체주의 시대에 유대인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포르투갈로 그리고 미국으로 탈출하여 혈혈단신 이 거대한 대륙에서 무국적자로 오랫동안 거의 난민과 다름없이 ‘외부자’로 경험한 것으로 비추어 봤을 때 그녀가 진실로 오늘날의 난민 사태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내었을지 절로 짐작이 됩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타당한 정부 아래에서만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고향을 박탈당하고 다른 새로운 고향을 제공받지 못한채 기한없는 수용소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보내야 한다는 점은 윤리적으로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이러한 권리라는 것이 한 국가가 내란이나 치열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된다면 아주 손쉽게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에서 전세계인 누구나 쉽게 그런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나 기존의 국민국가주의적 범주에 다른 외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은 물론 정치적 상황 하나 만으로는 판단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런 주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정치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을 해갔지만 기득권적인 유대인 협회에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영국이 잠정적으로 철수하려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현지 팔레스타인들을 배제한 채,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계획에 반대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녀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조화로운 국가를 바랐지만 유대인 지도층들은 자신들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소수 민족으로 치부하며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과정이 흡사 예루살렘으로 잡혀간 아이히만이 과거에 아리아인들만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잔악한 일들과 그 궤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악의 전체주의 시대를 몸소 체험한 유대인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을 배외자들로 추방하는 것은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에 대한 점고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시기에 흑인 인권 운동에 중요한 지점인 리틀록 사건에 대해 ‘정부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는 입장으로 연방 정부의 개입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차별에 정부가 어떠한 합법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주장도 보였는데요. 그녀가 나중에 이러한 입장을 철회하고 사과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인종주의 때문에 고향을 탈출한 그녀가 그것을 정부가 바로 잡으려고 하는 절차를 사회적 관습 때문이니 하면 안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인종주의, 인종차별 등은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될 문제일텐데 말이죠.

이외에도 미국 독립 혁명과 헌법의 동의와 같은 민주적 기초에 대한 긍정의 태도와 더불어 “시민이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치적 삶을 날카롭게 벼리는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열망”을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삶이 사적인 삶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의무라고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녀의 존경할 만한 많은 학문적 외침 중에서도 과거 독일 나치의 인종 말살 행위에 있어서 이것과 상관없는 보통의 독일인들과 분리하여 이해하고 자신 스스로도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임에도 명확하게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전범 행위, 전범 행위자들을 구별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유대인 여성으로 태어나 전체주의 시기, 2치대전의 시기에 독일을 탈출해 이방인으로서 미국에 오랫동안 적응해갔던 한나 아렌트,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개인적 배경으로 전혀 굽히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여 정치, 인권, 사회적 정의, 시민의식 등의 여러 주제들로 학문적 탐구에 힘써왔던 것은 정말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번스타인의 이 책이 약간의 한나 아렌트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러 저서들을 주제 및 시대별로 해석해 ‘우리가 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번스타인의 다른 글들이 또 번역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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