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버나드 크릭 지음, 이혜인 옮김 / 스윙밴드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2008년 작고한 버나드 크릭은 하버드, 버클리, 런던정경대 등에서 강의하고 후에 셰필드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노동과 교육 부분에 다앙한 활동을 하고, 이어 영국 교육노동부 자문위원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영국 등지에서는 그를 정치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에서 석학이라 인정하고 있는데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강의까지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 Democracy : A Very Short Introduction 으로 출간된 후 영미 문화권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많은 판매고를 올린 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1962년에 출간된 ‘정치를 위한 변호 In Defience of Politics’ 도 매우 유명한 글입니다. 위의 정치를 위한 변호는 과거에 정식 판권이 아닌 번역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데요. 현재는 이 책과 관련해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버나드 크릭의 이 글은 제목대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역사와 더불어 이론적인 기원과 고찰을 동시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거쳐 중요한 영국의 입헌주의 군주제의 시작과 계몽주의,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등의 시대 배경을 거쳐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까지 공화정과 혁명, 여러 사상가들의 이론을 빠짐없이 열거하며 민주주의라는 큰 그림을 매우 객관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부정 보다는 조심스런 낙관를 예측했는데 이것은 ‘제제가 없는 민주주의의 난관’을 그가 인식했던 것으로 어쩌면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을 끄집어 낸 것은 즉, 무분별한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소간 시민들의 규율과 제한을 기본으로 두고 일종의 조정을 통한 민주주의가 더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의 글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껴졌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토크빌이 “다수에 의한 폭정”을 경고하면서 “어쩌면 그가 민주주의보다는 자유를 중시했는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인식은 꽤 신선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근거없는 낙관주의 대신 이성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민주적 자유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것도 비판적 인문주의자로서의 저자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것으로 홉스 이후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한다는 기본적 정명에서 약간 벗어나 좀 더 개인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외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허버트 스펜서의 언급대로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비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계몽주의 이전, 절대군주제를 거쳐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권리 확보를 통한 영국의 정치 실험이 입헌군주제의 색다른 정치를 초래했고, 다른 앵글로 색슨의 미국은 이주민들의 수월한 토지 확보 이후, 재산권의 부여에 의한 이들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가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결정적 차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1인 1표의 기발한 정치적 전환이 미국이 독립시기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권력의 견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재산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행사를 했던 다수의 미국의 일반인들이 미국 고유의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도 경제적 풍요에 기반한 부르주아의 성장이 민주 정치의 힘이라고 본 것처럼 크릭의 이 글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토크빌은 미국을 부분적으로 오해해 민주주의를 거의 평등과 동의어로 보았는데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평등의 개념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고 오늘날 복지와 의료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의 선택 내지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다수의 미국인의 중요한 관점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유럽과는 달리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하는 특유의 자유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원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이라는 측면의 토크빌의 선험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은 조건들의 평등에 기반해 개인의 이기심을 적절히 조절해야 민주 정치가 안온해 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평등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미국의 ‘중산층 무계급’에 의한 민주주의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다수에 의한 지배가 다수에 의한 폭정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고 추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민화에 대한 가능성 등을 불길하게 예측한 토크빌의 입장은 최근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저자는 보이면서 토크빌의 자유에 대한 입장과 관련해서 “민주적 다수결주의와 자유 사이에 알맞는 균형을 맞출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는 토크빌의 결론으로 약간의 희망적인 태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의 명백한 긴장 관계 보다는 민주주의의 왜곡된 변형이라 지칭될 만한 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체제의 최대 위협이라고 저자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강력하고 흉악한 무기인 ‘선동’과 기존의 체제와 엘리트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 선동가적 포퓰리스트를 제거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과제일텐데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기득권과 밀접한 기존의 엘리트주의가 너무 과도하면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엘리트 계층의 진입에 대한 모든 시민들의 기회가 보장되어야만 하고 가진바 능력대로 발휘하고 정체되지 않고 수시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필요해 보입니다. 포퓰리즘이 융성하게 되는 요인들 중에 하나는 고착화되고 폐쇄되어버려 자본주의적 계층 이동을 포함한 민주주의 사회 내의 건강함이 사라져 일반 시민들에게 좌절감을 더욱 더 안겨주고 이런 여론과 방향성을 선동과 폭력적 언어로 유인하는 포퓰리스트에게 유인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인 크릭이 특별히 소개한 한나 아렌트가 인민과 군중을 구별했다는 점은 이 후자의 군중들이 우민화와 포퓰리즘을 확대하는 경로가 되는 만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데모스라 지칭되는 민주사회의 시민들이 각자 스스로 사색과 면밀한 독서, 활발한 토론 등으로 무장해야만 민주주의 정체가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존경받는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조건들을 언급하며 시민성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급진적으로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까?로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 질문의 대답은 권력의 분산이며 크게는 전세계의 가짜 민주주의 체제를 구분하는 수단이자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민주주의의 확대만이 우리의 삶과 자연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람직한 공화주의적 민주정치를 저자 역시 크게 바란 것처럼 이것을 지켜나가기 위한 우리 시민들의 노력이 더 엄중해지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